[현장 취재] 불멸의 '미란다'— 메릴 스트립

하은정 기자 2026. 4. 9.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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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만에 돌아온 ‘미란다’, 메릴 스트립이기에 가능했다

[우먼센스] 배우 메릴 스트립이 한국을 찾았다. 20년 만에 '미란다'로 돌아온 시점에서, 그의 첫 내한이다.

사진=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그의 이력을 설명하는 수치들은 이미 익숙하다. 아카데미 3관왕, 역대 최다 노미네이트. 그러나 숫자가 닿지 못하는 영역에 그의 본질이 있다. 매번 다른 인물의 생(生)을 빌려 살면서도, 그 변화를 수십 년간 지속해왔다는 사실이다. 스스로를 갱신해온 시간들이다. 이제 메릴 스트립은 어떤 수식어도 필요치 않다. 그 이름만으로 이미 하나의 완성된 세계다. 

그를 상징하는 캐릭터 '미란다' 역시 그렇다. 2006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완성된 이 인물은 냉정한 카리스마를 넘어, 완벽주의 이면의 균열까지 드러내며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20년이 흐른 지금, 그는 다시 그 자리에 선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는 과거의 기억을 되짚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권력의 중심이 종이에서 디지털로 이동하고, 미디어 환경이 완전히 재편된 이후의 세계. 그 속에서 '미란다'라는 인물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고 선택해 나가는지를 따라가는 이야기다.

"이 시나리오는 20년이 필요했다. 지금의 환경이 아니었다면 이 이야기는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진=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그가 말한 '시간'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다. 기술이 세상을 바꾸고 관계의 방식이 달라진 지금에야 비로소 가능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미란다가 잡지 업계의 절대 권력이었다면, 지금의 미란다는 급변하는 디지털 환경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다시 증명해야 하는 인물로 돌아왔다. 이번 이야기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미란다는 여전히 영리하며 자신을 통제한다. 다만 지금은 자신의 입지가 예전보다 위태롭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더 치열하게 싸운다."

캐릭터의 본질은 여전하지만 그가 발 딛고 선 자리는 변했다.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존재가 아니라, 흔들리는 입지를 인지하며 자리를 지켜내야 하는 자의 분투. 이번 '미란다'는 바로 그 팽팽한 긴장감 속에 있다.

사진=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사진=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이번 복귀는 배우 자신의 시간과도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다. 그는 캐릭터를 빌려 지금의 산업 환경을 담담히 짚어낸다.

"70대 여성이 보스 역할을 맡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나이가 든 여성의 존재감이 흐릿해지고 그들의 목소리가 소외되는 환경에서, 이 캐릭터를 다시 연기할 수 있음은 고마운 일이다."

이제 '미란다'는 단순히 상징적인 악역에 머물지 않는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끝내 자신의 자리를 증명해야 하는 한 인간의 투쟁으로 읽힌다. 앤 해서웨이와의 재회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20년이라는 시간은 관계의 결을 바꾸었고, 그 성숙한 변화는 현장의 공기를 다르게 채웠다.

"1편 당시에는 서로를 깊이 알지 못했다. 고립된 채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많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현장은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로 가득했다. 앤은 이제 확고한 자기 세계를 가진 배우로 돌아왔다. 항상 진심을 다하는 동료를 곁에 두는 건 즐거운 일이다."

앤 해서웨이 역시 이 작품과 메릴 스트립에 대해 명료한 언어로 자신의 시간을 정리했다.

"이 작품은 내 생애 가장 큰 선물이었다. 스물둘에 메릴 스트립과 함께했던 그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는 나의 모든 면에 깊은 자취를 남긴 배우다."

사진=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사진=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메릴 스트립은 방한 내내 과장된 수사 없이 배우로서의 품위를 지켰다. 말과 태도에 깃든 절제는 그 자체로 깊은 신뢰를 주었다. 그가 건넨 K-컬처에 대한 이야기도 같은 맥락 위에 있었다. 칭찬을 위한 수사가 아니라, 이미 일상이 된 풍경을 담담히 전했다 

"손주들이 매일 K-팝을 부르고, 나 역시 한국 음식을 즐긴다. 지금은 전 세계가 하나의 혈관처럼 연결된 시대다. 아이들에게 한국의 콘텐츠는 특별한 현상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호흡하는 일상의 일부다."

2026년, 메릴 스트립의 '미란다'는 박제된 과거의 아이콘이 아니다. 변화하는 시대의 파도를 견디며 다시 살아 움직이는 실존이다. 그리고 그 생명력은 오직 메릴 스트립이라는 서사가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

하은정 기자 hah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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