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 마피아’가 왔다…“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미친 왕과 욕망의 여전사가 건네는 위로 [인터뷰]

고승희 2026. 4. 9.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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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오페라단의 ‘나부코’ 주역
바리톤 최인식·소프라노 최지은
벨칸토 품격에 더한 베르디의 칼날
서울시오페라단 ‘나부코’ 에 출연하는 바리톤 최인식, 소프라노 최지은. 이상섭 기자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아버지와 딸이 한 무대에 있다. 단 한 번도 딸로서 인정받지 못한 서자이자, ‘전쟁을 위한 도구’로만 쓰였던 여전사 아비가일레. 천하를 호령하던 왕은 벼락을 맞아 정신 착란에 빠진다. 왕좌를 뺏으려는 자와 세계를 집어삼킨 자의 긴장감이 팽팽하다. 결핍이 응축해 온 아비가일레의 핏빛 분노가 나부코를 덮치려 하자 미친 왕의 눈에 표정이 깃든다.

“눈빛이 변하는 순간, 잡아먹힐 것처럼 무서워요. 저도 지지 말아야겠다 싶죠.” (소프라노 최지은)

온몸으로 서로의 에너지를 주고받는다. 하나의 프레임에 이 둘이 담기면 매 장면이 명장면이다.

서울시오페라단의 ‘나부코’는 독일 극장에서 활동하며 ‘뛰어난 실력’ 덕에 ‘코리아 마피아’로 불리는 바리톤 최인식과 소프라노 최지은의 고국 입성작이다. 공연을 앞두고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최인식은 “눈과 음악으로 소프라노에게 에너지를 주면 그것을 그대로 돌려주는 에너지가 인상적”이라며 “시너지가 날 수 있는 파트너인 것 같다”고 말했다.

첫 도전 ‘나부코’…“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의 이야기”

“이제야 때가 됐다고 생각했어요.”

독일 쾰른 오페라 극장의 전속 솔리스트로 11년째 활동 중인 바리톤 최인식은 그간 숱한 무대에 섰지만, ‘나부코’는 이번이 처음이다. 사실 2년 전 극장에서 이 작품의 러브콜을 받았으나, 최인식은 고사했다. “맞지 않는 옷”이라 생각해서다. 당시엔 ‘피가로의 결혼’과 같은 작품을 소화할 때였다.

매니지먼트처럼 솔리스트의 커리어와 레퍼토리 확장을 도와주는 극장의 예술감독이 “베르디로 천천히 옮겨보자”고 하던 때에 ‘나부코’가 찾아왔다. 최인식은 “성악가로의 삶에 변곡점 같은 작품”이라며 “베르디 오페라의 첫 작품을 서울에서 데뷔할 수 있어 굉장히 뜻깊은 첫걸음”이라고 했다.

최지은도 베르디 오페라는 ‘아이다’에 이어 두 번째이지만, ‘나부코’는 처음이다. 그 역시 아비가일레의 캐스팅 제안은 많았다. 그는 “두세 번 제안이 들어왔지만 늘 거절했다. 농익은 소리가 나야 하는 배역인데, 관객이 공감해 줄까 자신이 없었다”고 돌아봤다.

오페라 ‘나부코’ 에 출연하는 바리톤 최인식, 소프라노 최지은. 이상섭 기자

‘나부코’는 2500년 전 바빌로니아 제국의 예루살렘 정복과 유대 민족의 포로 생활을 그렸다. 장서문 연출가는 이 작품을 야만족 왕의 나라를 배경으로 삼아 오페라판 ‘왕좌의 게임’으로 치환, 이 시대의 언어로 다시 만들었다.

베르디의 ‘나부코’는 독특한 경계에 있는 작품이다. 초기작인 탓에 벨칸토 오페라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베르디 오페라의 직선적이고 드라마틱한 음악적 색채를 요구한다. 두 사람은 ‘악마적 난이도’라고 입을 모으며 고개를 저었다.

최인식은 “벨칸토를 배제하면 안 되고, 베르디에만 집중해도 안 된다”며 “베이스는 벨칸토이되 음표는 베르디로 생각하며 스스로도 어렵게 다가서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철같은 베르디의 선율에 실크 같은 벨칸토의 유연함을 불어넣는 작업이다.

최지은은 ‘베르디의 디테일’에도 집중하고 있다. 그는 “작은 요소가 모여 큰 그림을 만드는 만큼 스타카토, 레가토, 포르타멘토 놓치지 않고 있다”고 했다. 한강 작가의 소설을 즐겨 읽는 헝가리 출신의 오페라 코치에게 배운 가르침이다.

나부코의 아리아 역시 만만치 않다. 인물 자체도 감정의 진폭이 극단적이다. 오만한 정복자에서 광기에 사로잡힌 미치광이로, 그리고 회개에 이르는 3단계 심리 변화를 보여줘야 한다. 최인식은 “목소리의 질감 차이로 심리변화를 표현하고, 무대 위 드라마가 격해지더라도 베르디 특유의 프레이징과 코어를 놓치지 않는 것, 무엇보다 악보의 쉼표 하나까지 정직하게 지켜내는 것이 나의 전략“이라고 귀띔했다. 최지은 역시 최인식을 ‘쉼표 악마’라며 웃었다.

주고받는 에너지는 서로를 끊임없이 끌어올리고 있다. 최지은은 “나부코의 에너지가 너무 강해 처음엔 이걸 받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것이 서로에게 상승 작용을 한다”며 만족해했다. 최인식 역시 “제가 선율을 노래할 때 하모니로 밑에서 받쳐주는데, 모든 소리를 따뜻하게 변환한다. 제 악기가 이 사람과 무조건 같이 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며 “파스텔톤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2500년 전 바빌론의 이야기는 지금 이 시대에도 공명한다. 권력을 향한 집착과 가족 간의 갈등은 현대 사회와도 닮았다. 최지은은 “다양한 인물이 공존하는 ‘나부코’에서 아비가일레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해 욕망과 야망으로 내달린 여자”라며 “현대 사회 우리와 닮아 있다. 나쁜 선택을 한 자기 모습도 돌아보고, 스스로 가엾게 여기면서도 결국 위로를 얻어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오페라 ‘나부코’ 에 출연하는 바리톤 최인식, 소프라노 최지은. 이상섭 기자

“나부코가 왕좌에서 추락해 광기에 사로잡히는 모습을 보면서, 쉼 없이 달리다 갑작스러운 상실 혹은 변수 앞에 무너지는 우리 현대인의 모습이 겹쳐 보였습니다. 그 처절한 무너짐은 사실 실패라기보다,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일 수 있지만 비로소 인간다운 모습으로 돌아가는 필연적인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나부코의 여정을 따라가며,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와 스스로를 보듬어주는 따뜻한 공감을 얻어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최인식)

대기만성형 소프라노와 자기객관화의 아이콘

“한국에서의 거의 모든 작품이 데뷔작”이라는 두 사람은 요즘 부쩍 눈에 띄는 젊은 성악가다. 탄탄한 발성, 정교하면서도 섬세한 표현, 탁월한 음색으로 국내외 무대에서 자신을 증명하고 있다.

최지은은 자신을 ‘대기만성형’이라고 말한다. ‘방황의 시간’이 길었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 후 성악을 완전히 그만두고 사무직으로 직장 생활을 하며 대리 직함까지 달았다. “이렇게 큰 몸은 필요없다”며 뼈말라로 살았던 때다. 그는 “무대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고, 노래를 왜 해야 하는지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돌아봤다.

3년의 세월은 “강력한 터닝포인트”였다.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해 하루하루 소모되는 일상 속에서, 어느 순간 “갑자기 죽어도 미련이 없겠다, 내가 왜 살아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존재의 이유’를 찾았던 근원엔 결국 ‘노래’가 있었다. 그 길로 최지은은 독일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그때 처음으로 꿈과 비전을 품었어요. 노래가 너무 좋고, 무대가 너무 좋더라고요. 그것이 지금까지 버텨온 원동력이었어요. 어느날 갑작스러운 변곡점이 찾아온 것이 아니라, 이 시간이 쌓여 지금이 온 것 같아요.”

콩쿠르의 영광을 안았고, 독일과 한국에서도 서서히 주역 자리를 맡고 있다. 어딜 가든 “한국인은 노래를 잘한다”는 인식이 있다고 한다. ‘코리아 마피아’라는 별칭이 나온 이유다. 최지은은 그러나 “많은 선생님의 쌓아온 역사가 있어 이젠 독일 어느 극장에서든 한국인들이 인정받고 입지도 탄탄해졌다”며 “수혜를 많이 받은 세대인 만큼 나만 할 수 있는 것,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한국인의 민족적 한을 무기로 가질 수 있도록 매일 연습실로 향하고 있다”고 했다.

최인식에게도 긴 슬럼프가 있었다. 불면증으로 4개월간 노래를 못 했던 때도 있었고, 팬데믹 시기엔 “오늘 하루만 버티자”며 자기 최면으로 하루하루 견뎠다. 독일 극장에서 활동하며 최인식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익숙함에 안주하는 것”이다. 그는 “예술가에게 메타인지는 나침반”이라며 “자기 자신을 제3자의 시선으로 끊임없이 바라보는 것, 그것이 이기적인 예술가가 아니라 청중을 위한 예술가로 남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오페라 ‘나부코’ 에 출연하는 바리톤 최인식, 소프라노 최지은이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헤럴드경제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

콩쿠르에 끊임없이 도전한 이유도 자기 객관화의 연장이었다. 2018년 테네리페 국제 성악 콩쿠르, 2020년 프란치스코 비냐스 국제 성악 콩쿠르에서 입상했고, 2023년 빈체로 콩쿠르 우승 타이틀을 안았다. 그는 콩쿠르 우승은 “운전면허를 딴 것과 같다”며 “도로에 나갈 자격을 얻었을 뿐, 얼마나 안전하고 우아하게 주행할지는 전적으로 나의 몫”이라고 했다. 주행도 성공적이었다. 그는 쾰른시가 최고 오페라 가수에게 주는 오펜바흐상까지 받으며 클래식 음악 본토에서 실력을 입증했다.

본토 무대에서 활동하나 두 사람에게 한국 무대는 더 특별하다. 기회가 많지 않아 더 귀하고, 심미안 높은 청중들을 만족시켜야 하기에 두려움도 크다.

최인식은 “한국 관객들의 귀는 매우 예리하다. 가수 입장에서는 한 회 한 회가 마치 결승전 같은 긴장감을 준다”며 유럽이 ‘성악가가 생활인으로서 뿌리내리고 노래하는 곳’이라면, 한국은 ‘아티스트가 가진 모든 기량을 단기간에 폭발시켜 예술적 정점을 보여주는 곳’“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저 같은 젊은 성악가들에게 한국은 우리의 뿌리이자, 그간 해외에서 쌓아온 역량을 가장 뜨겁게 증명해 보이고 싶은 기회의 땅”이라고 강조했다.

‘나부코’는 일종의 출사표다. 우아하고 섬세한 표현력으로 음악의 품위를 들려줄 두 사람에게 이 작품은 도전이자 도약이며 변곡점이다. 두 사람은 이 무대를 통해 성악가로의 예술적 정점과 관객을 향한 정서적 치유의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포부다.

이 공연을 마친 후 최인식은 독일 무대에서 ‘에르나니’, ‘맥베스’, ‘리골레토’를 통해 베르디 계보를 이어간다. 그는“앞으로 걸어갈 인생의 큰 챕터를 연 기분”이라며 “베르디라는 큰 흐름이 하나로 모이는 뜨겁고 중요한 분기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최지은은 독일에서 첫 공연을 마쳤을 때 한 할머니 관객이 손을 붙잡고 “오늘 내 저녁이 너무나 행복했어”라고 했던 일화를 들려줬다. 그는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도 귀한 일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며 “뻔하다 생각하지 않고 계속 궁금하고 보고 싶은 음악가, 행복을 주는 음악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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