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야당이 반대한다고 못해?" 불같이 화낸 박정희…경부고속도로의 탄생

박정희와 김대중<15>
“앞으로 우리 경제와 산업이 어느 정도 성장하리라는 전망을 가지고 더욱 크게 국토건설계획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서울~인천, 서울~부산, 대전~목포 간에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대(大)국토건설계획’의 일부를 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안에 착공하겠습니다.”
1967년 제 6대 대선 투표일(5월 3일)을 코 앞에 둔 4월 29일,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는 서울 중구 장충단 공원 유세에서 경부고속도로의 건설 계획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단군 이래 최대 토목공사’로 일컫는 경부고속도로의 청사진이 처음으로 공개된 순간이었다.
박정희, 1967년 대선 승리 후 경부고속도로 건설 강행
재선에 성공한 박정희는 같은 해 10월 단행한 개각에서 국토개발 전문가인 주원(朱源)을 건설부장관에 발탁하고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일환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본격적으로 밀고 나갔다.
12월에는 국가기간고속도로 건설추진위원회와 산하 계획조사단이 설치됐다. 박정희는 대통령 직속으로 청와대 파견단을 만들어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직접 챙겼다. 여러 난관이 있었지만 이듬해인 1968년 2월 1일 기공식이 열렸고 대역사(大役事)의 막이 올랐다(기공식 3개월 전에 이미 육군 공병단이 공사를 시작했기 때문에 경부고속도로 건설 개시 시점을 1967년 겨울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막대한 소요 자금 마련과 기술 부족 등 문제가 많아 회의론과 반대 의견이 적지 않았다. 특히 야당인 신민당을 중심으로 반대론이 거셌다. 신민당은 재정 파탄과 경제적 비효율성을 이유로 강하게 반대하는 당론을 정했고, 당시 김영삼 원내대표를 앞세워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유진오 당수도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고속도로 건설 취지 자체는 반대하지 않지만 경제 현실상 우선순위에 의문이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반대한 김대중 "경부고속도로보다 동서간 도로 건설이 먼저"
가장 체계적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강행의 문제점을 파고든 것은 김대중이었다. 당시 국회 건설위원회 소속이던 김대중의 1968년 2월 22일 국회 건설위원회 3차 회의 발언이다.
"···시급한 것은 동서를 뚫는 그러한 교통망이 필요하다. 이것은 누구나 알다시피 과거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대륙에 진출하기 위해 남북종단에 철도와 도로를 치중하였기 때문에 그 유산으로서 이와 같은 교통 체제가 되어있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정된 재원 또 한정된 능력을 가지고 지금 우리나라 현실로 보아서 그래도 가장 발달된 그 노선에 다시 고속도로를 건설하겠다, 급한 것은 뒤로 미루고 안 급한 것은 먼저 한다, 이런 일을 정부가 하고 있다는 것인데 ···” (국회 속기록).

요약하면 남북종단 교통체계는 어느 정도 갖춰져 있지만 군사용 도로를 제외하고는 철도·도로시설이 거의 없는 강원도와 서울을 연결하는 동·서 도로 즉 서울~강릉 간 도로 건설이 더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김대중은 IBRD(국제개발부흥은행. 세계은행 본체)의 보고서를 그 근거로 제시하기도 했다. 이 보고서는 우리 정부 요청으로 IBRD 교통조사단이 방한해 7개월 간 한국의 교통사정을 조사해 제출한 것이다. 보고서는 한국 도로 사정이 매우 열악하여 도로 정비와 개선이 시급하다고 지적하고, 대규모 고속도로 건설보다는 기존 도로의 정비가 우선이며 신규 도로를 건설하려면 동·서 간 도로 건설이 먼저라고 제안했다.
여론도 좋지 않았다. 고속도로를 만들어봐야 부유층 일부 사람들만 누릴 호화 시설이 될 뿐이라는 의견도 많았다. 자동차 소유가 일반화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IBRD 보고서가 “자동차 보유 대수가 얼마 안 돼 경제성이 적다”며 경부고속도로 시기상조론을 편 근거이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부산 축 중심의 경제개발계획을 구상하고 있는 박정희 관점에서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시급한 과제였고 균형발전을 주장하는 측과는 전혀 다른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독일 방문 때 아우토반 보고 고속도로 건설 꿈 품은 박정희

박정희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구상하게 된 계기는 미국 방문과 서독 방문 중 곧게 뻗은 고속도로를 직접 보고 깊은 인상을 받으면서였다고 한다. 박정희는 특히 1964년 12월 하인리히 뤼브케 대통령 초청으로 서독을 방문했을 때 고속도로 아우토반을 유심히 살펴봤다.
박정희의 서독 방문 목적은 경제개발에 필요한 차관을 얻기 위한 것이었지만 고속도로 건설에도 큰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박정희는 뤼브케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이 끝난 뒤 본~쾰른 간 아우토반을 시속 160㎞로 왕복하면서 가는 길과 오는 길에 고속도로상에 차를 멈추게 하고 2, 3분씩 노면과 중앙분리대, 교차로 시설 등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고 한다. 차 안에서는 안내를 맡은 뤼브케 대통령 의전실장에게 아우토반 건설 과정과 관리, 건설 비용 등에 대해 소상하게 질문하고 설명을 메모 했다(조갑제, ‘박정희 7’).

김대중도 6대 국회의원 시절인 1966년 2월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최영근, 박영록 의원과 함께 미국을 방문했을 때 봤던 고속도로에 대한 소감을 자신의 회고록에 남겼다. 워싱턴, 덴버, 뉴올리언스 등 미국 주요 도시에는 엄청난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길은 자동차 홍수였는데, “제일 인상적인 것은 곧게 뻗은 고속도로였다”고 했다(김대중, ‘회고록 1’). 김대중 역시 박정희 못지않게 1960년대 선진국들의 고속도로를 많이 부러워했던 것이다.
미국의 고속도로 부러워했던 김대중도 "균형발전에 문제"라며 반대
그럼에도 김대중이 박정희가 강력히 추진하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비판적이었던 것은 국가적 대역사를 박정희 정권이 국회와 충분한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점과 국토의 균형발전상 문제가 많다고 봤기 때문이다. 다음은 김대중이 육성으로 남긴 회고록 중 관련 부분이다.
"그 당시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대역사였어요. 그렇게 큰 일을 하는데 박정희 정권은 국회와 충분한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했습니다. 나는 국토의 균형 발전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국도(國道) 상황이 열악한 곳이 많았기 때문에 우선 이런 곳의 도로 사정을 개선하고 그다음에 물동량을 보고 고속도로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 내 주장이었어요. 도로 사정이 제일 좋은 구간에 고속도로를 먼저 건설하면 물류와 산업이 한쪽에 집중되어 지역 간 균형이 깨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때 내 생각이 옳았다고 봅니다.”(김대중, ‘육성회고록’. 한길사, 2024).
김대중의 지적대로 국가적 대역사를 추진하면서 박정희 정권이 야당과의 충분한 협의와 여론 수렴 등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1964년 12월 서독 방문 당시 고속도로 건설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박정희는 1967년 4월 6대 대통령 유세기간 중 선거공약으로 발표하기 전까지 일절 언급을 하지 않았다. 대신 고속도로 건설 구상을 소수의 사람에게만 밝힌 채 관련 자료수집에 몰두했다고 한다.
극비리에 몰아부친 이유는 막대한 예산 때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우선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필요한 막대한 예산 확보가 쉽지 않았다. 박정희는 비공개로 경제기획원, 건설부, 재무부, 서울시청, 현대건설, 육군 공병감실에 430㎞ 경부고속도로 구간의 건설비용을 계산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는데 180억 원에서 490억 원 범위의 보고가 올라왔다. 1967년 정부 전체 예산이 1,600여 억원이었음을 감안할 때 전체 예산의 12%, 많게는 30% 안팎의 재원을 마련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급히 진행해야 할 국가사업들이 산적해 있는 상황에서 긴급해 보이지도 않는 고속도로 건설에 막대한 재원을 쏟아붓는다면 시작도 하기 전에 반대에 부딪히게 될 것이고 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일찍 알려질 경우 땅 투기가 성행해 건설비 상승을 부추길 게 뻔했다(최광승, ‘박정희는 어떻게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였는가’,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4호, 2010).
박정희가 재선에 성공한 뒤 경부고속도로 추진에 본격적으로 나섰을 때까지도 재원 마련 전망은 불투명했다. 당초 기대를 걸었던 IBRD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부정적 입장을 취하고 차관 제공을 거절했다.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충당되는 규모도 많지 않았다. 외자도입에 실패했으니 석유류세의 인상과 통행료 수입, 도로공채 발행 등 내자도입을 통해 건설비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경부고속도로 건설 재원 확보계획은 1968년 2월 경제장관회의에서 휘발유세와 통행료 도입 등 내자와 대일청구권자금 27억원을 포함한 총 331억 원으로 최종 확정되었다(최광승 앞의 글).
야당 반대로 관련 법안 통과 안되자 불같이 화낸 박정희
난관은 또 있었다. 국회의 관문이었다. 2월 28일 임시 국회 회기를 하루 남겨두고 경부고속도로 재원으로 쓰일 석유류세법 개정안과 도로정비촉진법 개정안이 주무부처 장관에 의해 여당인 공화당에 전달됐고, 공화당은 당일 국회에 안건을 제출했다.

사전에 아무런 설명이 없어 공화당도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는 상태였지만 야당은 “사전에 무슨 설명도 없이 무조건 불쑥 들고 와 심의 상정해 달라는데 동의할 수 없다”며 회의장에서 퇴장해버렸다. 당시 여야 관계는 김성은 국방부장관 경질과 이호 내무부장관 해임안 문제로 갈등이 깊어진 상태이기도 했다. 임시국회 마지막 날인 2월 29일 오후 두 개정안이 본회의에 상정됐지만 야당의 지연 전략으로 처리가 어려웠다.
이효상 국회의장, 김종필 공화당 의장과 원내대표단은 이날 밤늦게 다음 회기에 처리할 것을 건의하기 위해 청와대로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갔다. 김종필 당 의장이 야당의 반발 상황을 설명하고 다음 회기에 통과시키도록 하겠다고 하자 박정희는 불같이 화를 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이 나라 경제 발전을 위해 경부고속도로를 만드는데, 뭐? 야당이 반대한다고 국회에서 통과를 못 시켜? 뭐 이런 게 다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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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성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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