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나누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기준이다

1985년 일본 고베 유니버시아드. 스페인 육상 선수 마리아 파티뇨는 ‘여성성 증명서’를 두고 오는 바람에 볼 안쪽 세포를 살짝 긁어내 성별 검사를 받았다. 와이(Y)염색체가 확인됐다. 겉모습은 완벽한 여성이었지만 파티뇨는 남성 특징을 발달 못 시키는 ‘안드로겐 무감증’이었다. 국가대표팀에서 쫓겨났다. 장학금이 끊기고, 기록은 말소됐다. 언론은 대서특필했고, 약혼자는 떠났다. “저는 감쪽같이 지워졌어요.” 앤 파우스토-스털링의 ‘섹싱 더 바디’(홍승효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는 파티뇨의 이 증언에서 출발한다.
분자생물학자인 저자는 생물학 연구와 과학사적 맥락, 페미니즘 내부의 이원론 비판을 교차하며 “생물학적 과정과 사회적 의미는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생물학 이해 방식 자체가 문화와 제도의 렌즈를 통과한다는 것이다. 테스토스테론 역시 다양한 생리작용에 관여하는 분자일 뿐이지만, ‘남성호르몬’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이미 특정한 의미가 덧씌워진다. 생물학적 사실 자체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그 해석 기준이 삶을 가를 뿐이다.
이 책은 섹스와 젠더, 본성(선천적 조건)과 양육(후천적 형성) 같은 이원론을 뫼비우스의 띠 비유로 해체한다. 호르몬과 유전자 같은 생물학적 과정과 사회적 의미는 분리된 층위가 아니라 하나의 연속된 표면 위에 놓여 있다. 어디까지가 자연이고 어디부터가 사회인지 나누는 일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저자는 오랫동안 “남성과 여성의 뇌는 구조적으로 다르다”는 주장의 핵심 근거로 제시된 좌우 반구를 연결하는 신경다발, 즉 ‘뇌들보’ 연구에 주목한다. 연구마다 결과가 엇갈렸고, 일관된 결론은 없었다. 그럼에도 연구는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는 진짜 차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만 되풀이됐다. 저자는 “뇌들보는 젠더 차이를 말해주는 기관이 아니라, 우리가 차이를 어떻게 만들고 읽어내는지를 드러내는 사례”라고 강조한다. 일부 과학자는 유전자·호르몬·뇌 구조 같은 요소를 엮어 남녀 차이가 자연적이고 객관적으로 입증된 것처럼 설명하지만, 그 망에는 이미 문화적 가정이 스며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점차 염색체 기반 성별 검사는 폐지됐다. 호르몬 검사가 이를 대체하고 있다. 국제육상연맹이 2018년 여성 선수의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일정 기준을 넘을 경우 출전을 제한하는 규정을 도입한 것이다. 여성 평균보다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높다는 이유로 출전 제한 논란의 중심에 섰던 남아프리카공화국 육상 선수 캐스터 세메냐 사건이 계기였다. 테스토스테론 수치 역시 성별을 가르는 명확한 경계가 아니라 넓게 겹쳐 분포하는 연속체일 뿐이다. 생물학적 수치에 사회적 의미를 덧씌우는 과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저자는 강조한다. “신체의 생물학에 대한 우리의 논쟁들이 언제나 사회적·정치적 평등과 변화 가능성에 대한 도덕적·윤리적·정치적 논쟁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결코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보다 더 중요한 말은 없다.” 704쪽, 4만4천원.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 21이 찜한 새 책

지구를 태워 만든 풍요
김덕호·박진희·이은경 지음, 에코리브르 펴냄, 3만5천원
에너지라는 렌즈를 통해 본 현대 문명사. 산업혁명 이후 300여 년 동안 석탄과 석유, 그것을 에너지원으로 삼은 증기·내연 기관과 전기가 만들어낸 현대 문명의 성장과 쇠락을 정리했다. 화석연료 덕분에 인류는 상상할 수 없는 물질적 풍요를 누렸지만, 그 대가로 지구온난화에 직면했다. 탄소 문명 몰락과 인류 종말이라는 ‘기후위기’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한영 육아 번역기
임현주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1만7천원
영국인과 결혼한 아나운서가 결혼생활과 육아 경험을 녹였다. ‘만나서 사랑하고 부모가 되고 가족이 돼가는 과정’을 담았지만, 그 ‘뻔함’(?)이 없다. 육아는 ‘잘’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가는 과정이며, 누가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헤쳐’나가야 하는 영역임을 일깨워줄 뿐. 육아의 세계에 기꺼이 발을 내딛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찬사를!

러시아 제국 연구
로널드 수니·발레리 키벨슨 지음, 조호연 옮김, 너머북스 펴냄, 5만6천원
9세기 키예프 루스에서 시작해 15세기 모스크바국, 18세기 제정러시아, 그리고 20세기 소련에 이은 현재의 러시아까지. 장구하고 복잡한 러시아 역사를 그림·사진 54장과 함께 조망했다.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가진 러시아가 오랫동안 결속력을 유지한 이유, 블라드미르 푸틴 대통령이 체첸·조지아·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배경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집은 중립적이지 않다
서윤영 지음, 지노 펴냄, 1만7천원
현대 사회에서 집은 어떤 의미일까? 한국에서 집, 특히 아파트는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 삶의 질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지위를 대변한다. 건축 칼럼니스트인 지은이가 고대 로마의 도무스부터 현대의 아파트까지 공간 속에 담긴 사회와 문화의 역사를 흥미롭게 풀어냈다. 건축이나 역사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어도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 더욱 반가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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