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보다 호화로웠던 권력의 집, 진양부는 어디에 [강화 속 고려를 찾아서·(35)]
최우 저택, 관청공원 일대 유구로 위치 윤곽 드러나
수십 리 원림·1300명 연주…사료 속 초호화 생활상
아들 최항까지 이어진 권력의 공간, 잔치 끊이지 않아
유물만 남고 자리 미궁…군청옆 견자산 언저리 추정

강도(江都) 시기, 왕보다도 더한 권력을 쥐고 흔들었던 최우(?~1249)가 살았던 집은 궁궐 그 이상이었던 것으로 여러 기록에 그려진다. 그 집이 강화군청 옆 견자산 언저리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데 그곳이 어디였는지 구체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 다만, 2020~2021년 견자산 남동쪽과 북쪽 자락에 ‘관청공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고려시대 건물지로 추정되는 유구가 여럿 발굴되었다. 전문가들은 이를 토대로 이 일대가 최우의 저택 진양부(晉陽府) 자리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진양부가 당시 최고 권력자의 집이라는 점에서 그 위치 찾기는 왕궁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강화도 고려왕궁이 어디에 있었는지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은 것처럼 진양부의 위치 또한 아직 정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강화도 최우의 집이 진양부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천도 이태 뒤인 1234년 10월이다. 이때 국왕 고종은 최우를 진양후(晉陽侯)로 책봉했다. 도읍을 옮긴 공을 치사한 거였다. 당시 제후의 집을 일컬어 부(府)라 했다. 그때 최우의 집 짓는 모습이 ‘고려사절요’에 언급돼 있다.
‘우가 제 집을 짓는데, 도방(都房)과 사령군(四領軍)을 모두 부역시켜 배로 옛 서울(송도)의 재목을 실어 오고, 또 집동산에 심을 소나무·잣나무들을 실어 오므로 사람이 많이 빠져 죽었다. 그 원림(園林)의 넓기가 무려 수십 리였다.’
이렇게 사람 목숨과 바꿔가며 지은 최우의 집을 ‘견자산 진양부’라 불렀다. 최우는 이미 천도하면서 개성에 있던 재산을 강화로 옮겨 놓았다. 1232년 6월 강화 천도를 주장함과 동시에 재산부터 실어 냈는데, 그 양이 엄청났다. ‘고려사절요’는 ‘우가 녹전차(祿轉車) 100여 량을 빼앗아 가재(家財)를 강화로 옮겼다’고 썼다. 녹전차는 곡식 운반용 대형 수레쯤으로 이해하면 된다.
최고 권력자 최우는 고위 관료인 재(宰)·추(樞)들을 자신의 집에 불러 밤 늦게까지 잔치를 벌이고는 하였다. 그 잔치의 화려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채색 비단으로 장막을 두르고, 그 가운데에 그네를 매고, 은 단추와 자개로 꾸미고, 여름이었음에도 커다란 얼음 봉우리를 만들고, 1천300명이 넘는 연주자들로 기악백희(伎樂百戲)를 벌였다. 최우는 이때 얼음을 쓰려고 지난 겨울, 서산(西山)의 빙고(氷庫)에 백성을 시켜 얼음을 실어 날라 보관시켰다.
최우가 죽은 뒤 견자산 진양부는 아들 최항(1209~1257)의 차지가 되었다. 최항은 1250년 2월, 최우가 죽은 지 3개월 만에 진양부를 자신의 집으로 삼았다.
집주인은 바뀌었지만, 진양부에서의 화려한 잔치는 계속되었다. 재·추들과 잔치하면서 격구하고 활 쏘는 것을 구경할 정도로 집이 넓었다. 또 별초군이 말을 타고 보여주는 희마(戱馬) 의식도 그 집에서 벌였는데, 황금으로 말 장니(障泥)를 장식하고 금 잎사귀와 비단 꽃을 말 머리와 꼬리에 꽂을 정도로 화려했다.
1255년 3월 ‘고려사절요’에는 ‘최항이 여러 왕씨를 자기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이튿날 또 재추에게 잔치를 베풀었다’고 할 만큼 견자산 진양부에서의 잔치는 끊이지 않았다.

몽골의 침략에 백성들은 죄다 죽어나가는 와중에도 견자산 자기 집에서 화려한 잔치에 여념이 없던 최항이 1257년 윤4월 초이튿날 갑자기 세상을 떴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최항 묘지명’에 그의 죽음에 대하여 신비롭게 기록한 대목이 있다. 최항이 어느 날 높은 누각에 올라 ‘어지럽게 휘날리는 붉은 꽃비가 장강을 건너간다’는 내용의 시를 짓고는 그날 저녁 병이 들었고, 다음 날 새벽 견자산 동쪽 기슭의 별제(別第)에서 작고했다는 내용이다. 그 견자산 동쪽 기슭 별제가 바로 지금의 견자산 동쪽 기슭에 조성된 ‘관청공원’ 입구 어디쯤이 아닐가 싶다.

최항이 죽은 지 4개월 20여 일 뒤인 8월 26일, 진강현(鎭江縣) 서쪽 창지산(昌支山) 기슭에 장사 지냈다고 묘지명에 적혀 있다. 최항 묘에서 고려청자 최상품이 나왔다. 국보 ‘청자 동화연화문 표주박모양 주전자’. 붉은색을 입히는 진사 기법과 전체적인 디자인 측면에서 고려청자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강도 시기의 고려청자 기술이 절정에 달했음을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최항이 잠든 무덤은 진양부와 마찬가지로 그 자리가 어디인지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물건은 나왔으되 자리가 드러나지 않은 것은 도굴 때문이다.
/정진오 기자 schild@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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