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웅의 곁을 지킨 승부사, 당포해전의 전설이 되다
남도 의병 열전①진무성(1566∼1638)

이순신 장군의 빛나는 승리는 이순신 혼자만이 싸워 얻은 결과는 아니다. 첫 승리인 옥포해전부터 최후의 전투인 노량해전에 이르기까지 유능하고 신뢰할 만한 장수와 참모들이 있었다.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동의록(同義錄)’ 등에 이름이 나와 있는데, 이 가운데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진무성 장군이 있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1592년 5월4일부터 9일까지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합포, 적진포 등지에서 일본 함선 44척을 격파했다. 1차 출전이었다. 당포해전은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수군과 원균의 경상우수영 수군이 연합함대를 결성한 조선 수군이 1592년 5월29일부터 6월1일까지 치렀던 사천해전에 이어 6월 2일 치른 해전으로 2차 출전에 해당하는 전투였다.
당시 조선 수군은 당포 주둔 왜군 공격에 나섰다. 일본 수군은 판옥선과 같은 대선 9척과 중·소 선(船) 12척 등 모두 21척이 부두에 정박하고 있었다. 대선 중 한 척에는 높이가 3~4장이나 되는 높은 층루가 우뚝 솟았고, 밖으로는 붉은 비단 휘장을 두르고 휘장의 사면에는 ‘황(黃)’자를 크게 썼는데 왜군 최고 지휘관이 탄 대장선이었다.
조선 수군은 먼저 거북선이 층루선 밑으로 다가가 배의 머리 부분에 있는 용의 입으로 현자철환을 쏘게 하고 또 천자·지자총통으로 대장군전을 쏘아 함선을 격파했다. 그러자 뒤따르던 여러 전선도 철환과 화살을 쏘았고, 중위장 권준이 돌진해 왜장을 쏘아 맞히자, 거꾸로 떨어지므로 사도첨사 김완과 흥양 출신 군관 진무성이 왜장의 머리를 베었다. 진무성이 큰 공을 세운 것이다. 이날 당포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일본함대 지휘관을 포함해 일본 수군 6명의 목을 베었고 일본 군선 21척을 모두 불태웠다.
당포해전은 임진왜란 초기 조선 수군의 연전연승을 굳힌 전투로, 옥포·합포 승리의 기세를 이어 왜선이 정박한 포구를 기습 격파함으로써 남해안 일대의 해상 주도권을 공고히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특히 항구에 정박한 왜 함대를 기습해 화포로 제압한 뒤 돌격하는 방식은 조선 수군의 화포 중심 전술과 기동 운용이 효과적임을 입증했다는 점에서 전술사에서도 빛났다.
진무성은 조선 숙종 때 남인계열 대학자로 명성이 높았던 윤휴가 지은 ‘제장전(諸將傳)’에 이름이 올려져 있다. ‘제장(諸將)’에는 진무성을 비롯해 정운·송희립·이억기·류형·정사립·이완·안위·김대인·원균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전기 형식으로 쓰인 ‘제장전’에서, 윤휴는 진무성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진무성은 흥양 사람으로 용력이 뛰어났다. 이순신이 전라도에 부임해 그의 기개를 높이 사 패장(牌將)으로 발탁했으며, 당진(당포를 말함)의 싸움에서 일본군의 적장을 앞쪽에서 지키는 일본군을 쏘아 죽였다.” 곧 당포 싸움에서 적장의 목을 벤 사건은 후대에도 전설로 남아 있었다.
진무성에 대해 1961년 ‘임진비사’의 하나로 집필된 ‘송계 진무성 장군사적’이라는 책이 있다. 이를 통해 그의 일대기를 구성할 수 있다. 그는 1566년 고흥군 두원면 신송리에서 태어났다. 을묘왜변(1555년) 직후로 일찍이 진무성은 왜적에 대한 적개심이 형성돼 있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예하 여러 군진의 지휘관을 소집해 대책회의를 했다. 일부에서는 전라좌수영 관할인 전라도만 방어하자고 했으나, 녹도만호 정운, 군관 송희립은 대적(大敵)이 경계를 압박해오고, 위력이 점차 강해지는데 좌수영 관할만 고수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며 나아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신하 된 자의 직분을 다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순신이 크게 기뻐하며 “나라가 큰 위기를 맞이했는데 어찌 위치가 따로 있겠는가! 제장의 뜻이 장하니 나아가 싸우자”고 독전했다.
이때 군관 송희립이 흥양 출신 청년을 이순신에게 소개했다. 진무성이었다. 그의 나이 27이었다. 일본군이 4월 14일 부산에 상륙했다는 말을 1주일이 지난 4월20일 들은 진무성은 나라를 위해 죽을 때가 됐다고 생각하고, 선영을 찾아 알리고 부인에게도 결심을 전하며 이순신을 찾았다. 이순신은 진무성이 평소 병서를 읽고 심신을 연마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고 반가워하며 비장 직책을 맡겼으나 사실상 백의종군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진무성은 이순신이 그의 능력을 인정하자 용기백배해 전투에서 선봉에 섰다.
진무성이 옥포, 합포해전 등 첫 출전 해전에서 탁월한 전공을 세우자, 이순신은 그에게 군관직을 주어 격려했다. 이때 진무성은 당연히 할 일이었다 하며 사양했으나 이순신이 강권했다고 한다. 한편, 앞서 당포해전에서 진무성은 부상을 입었는데 부상 군관 이름에, ‘蛇渡一船軍官陳武晟(사도일선군관진무성)’이라고 나와 있다.
곧 그가 사도 소속 제1선 군관임을 말해준다. 사도는 고흥군 점암면 금사리에 해당한다. 당포 해전에서 진무성은 적의 화살을 맞았으나 다행히 치명상은 피했다. 이때의 전투 상황이 이순신이 올린 장계에 드러나 있다.

이어 선조에 올린 장계에, “뒤에 있는 여러 전선도 철환(鐵丸)과 화살을 섞어서 퍼부으며 중위장 권준이 뚫고 들어가 왜장을 쏘아 맞추매 화살 시위하는 소리에 응해 거꾸로 떨어지자 사도첨사 김완·흥양 보인(保人) 진무성이 적도(賊盜)의 머리를 베었고, 적들이 겁내어 도망치며 총 맞고 화살 맞은 자들이 여기저기 자빠지는 데 적의 수급 6명을 베었다”라고 했다. 이순신이 진무성의 공적을 국왕에 보고하는 장계에 넣을 정도로 높이 평가했음을 알 수 있다.
당포 전투에서 일약 영웅으로 등장한 진무성은 이후 한산도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을 최근접 보위하며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앞장섰다.
한편 1593년 6월 22일부터 29일까지 제2차 진주성 전투가 있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성을 비우는 공성(空城)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천일 의병장은 진주성이 함락되면 바로 호남이 위태롭다고 하며 진주성을 사수하려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순신은 진주성이 포위됐다는 소식을 듣고 상황을 알아보려 했다. 정말 목숨을 건 위험한 작전이었으나, 진무성이 선뜻 자원했다. 그는 적의 포위망을 뚫고 진주성에 들어가니 김천일·최경회·황진·고종후 등이 깜짝 놀랐다. 진무성은 20여 명의 적을 베며 성을 벗어났는데 온몸에 상처가 가득했다.
진무성은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한산도에 머물러 있을 때 그곳에 함께 있었고, 명량해전·노량해전에도 함께 했다. 진무성 장군은 이순신을 보필한 많은 막료 가운데 가장 가까이 있었던 참모였다.
진무성 장군은 선조 33년 선무원종 1등 공신에 책록됐다. 이보다 앞서 선조 32년(1599년) 무과에 합격했다. 유원진첨사·경흥부사·통제영우후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인조 16년(1638년) 12월 29일 73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그에게 가선대부 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 5위도총부부총관이 추증됐고, 다시 자헌대부 호조판서겸지의금부사 5위도총부도총관을 추증했다. 그리고 사당인 용강사(龍岡祠)에 배향됐다. 용강사는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철거되자 1882년 영호남 유림들이 고흥 고향 두원에 사우를 복원해 무열사(武烈祠)라 했다.
한경국기자 hkk42@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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