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일 더 가혹하게 해… 글은 내 영혼의 평생 직장”

황지윤 기자 2026. 4. 9.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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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쓰는 직장인] <2>
‘출판계 미다스 손’ 박혜진 편집자 겸 문학평론가
편집자 박혜진의 과로 사유는 “이 책은 내야 합니다”라는 말을 당당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는 이 말에 무게를 싣기 위해 “조직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고 했다. 사진 촬영 당시 다른 출판사에서 낸 그의 최근 저서를 맨 위에 올리자고 했더니 민음사에서 출간한 그의 비평집 ‘언더스토리’로 살포시 바꿔치기했다. 조직원의 순발력이 돋보였다. /김지호 기자

올해 15년째 민음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는 문학2팀 박혜진(40) 부장은 성공한 문학 편집자다. 100만 부 넘게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 ‘82년생 김지영’을 담당 편집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른바 ‘출세작’ 이후로도 쉬지 않고 대표작을 쏟아냈다. ‘딸에 대하여’는 김혜진 작가에게 문단의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게 했다. 드라마로 만들어져 역주행한 이혁진 작가의 ‘사랑의 이해’도 그의 손을 거쳤다. 작년 출간한 ‘꽤 낙천적인 아이’는 스탠드업 코미디언 원소윤을 전도유망한 신예 작가 반열에 올려놓았다. ‘출판계 미다스 손’이란 별명이 과하지 않다.

지난달 27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민음사 사무실에서 만난 박혜진은 “편집자 초년 시절에는 내가 발굴한 작가가 인기가 많아지고 다른 출판사와 일하게 되면 내 작가를 뺏긴 것 같아 서운했는데, 지금은 굉장히 큰 보람”이라고 했다. “일하면서 제일 즐거운 건 작가가 부자 될 때”라며 웃었다. “작가가 유무형의 영향력을 갖게 될 때 편집자로서 가장 보람을 느낀다”는 것. 그는 “작가의 목소리가 더 잘 들리게 볼륨을 조절하고, 무대를 만들어주는 일의 즐거움이 해를 거듭할수록 커진다”고 했다.

“세계문학전집을 읽는 것이 20대 때 자존의 원천이었다”는 그는 “읽는 집단에서 벗어나 만드는 집단에 속하고 싶다”는 생각에 출판사 문을 두드렸다.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2011년 세계문학전집으로 유명한 민음사에 입사했다. 그런 박혜진은 책 만드는 사람인 동시에 책 쓰는 사람이다. 2015년 본지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으로 등단해 왕성하게 활약 중인 문학평론가다.

등단한 그해 시무식은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았다. 박맹호 민음사 회장(2017년 작고)이 무척 기뻐하며 “우리 회사의 한 소녀가 신춘문예에 당선됐다”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얼떨결에 ‘소녀’로 호명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전 사원의 박수를 받았다. 박혜진은 “등단하고 삶이 글과 책으로 수렴하게 됐는데 다른 삶은 더 필요 없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비평을 쓰다 보면 이 작가랑 작업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잡지(그는 민음사가 펴내는 문학 잡지 ‘릿터’의 편집장이다)를 만들고, 잡지 기획이 책이 되고….”

단독 저서로 비평집 ‘언더스토리’(민음사), 산문 ‘이제 그것을 보았어’(난다), 잊힌 국내 단편을 재발굴해 엮고 평을 붙인 ‘퍼니 사이코 픽션’(클레이하우스) 등이 있다. 이 밖에 그의 해설이 실린 소설 단행본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러나 박혜진은 자신을 ‘작가’라고 칭하지 않는다. “저자 정체성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저자로서 목표는 “‘수학의 정석’ 문학 버전을 쓰는 것”이다. 구체적이고 야심 찬 포부다. “문학에도 답이 있으니 정해진 대로 읽으라는 게 아니라, 문학 읽기의 기본을 다지고 훈련할 수 있는 책을 쓰고 싶다”고 했다.

편집자 박혜진의 민음사 사무실 자리. 그는 “뒤에 창이 있어 너무 덥거나 너무 춥다. 팀장의 자리는 열받고 외로운 자리”라고 농반진반 답했다. /김지호 기자

책 만드는 편집자와 평론가로서 저술 활동은 교집합이 있지만, “두 가지가 섞이면 망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편집자와 평론가라는 “두 자아가 긴장 관계를 유지해야 시너지가 난다”는 것이다. 편집자는 대중을 의식하며 책을 만들지 않을 수 없다. 반면 평론가는 문학적 가치를 생각하며 글을 쓴다. 그는 “이런 두 자아가 날 서 있을 때 의외의 에너지를 가진 책이 나오게 된다”고 했다. 문학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입체적 에너지를 가진 책이 탄생하는 비결이다.

박혜진은 편집자, 즉 직장인 자아가 훨씬 큰 사람이다. 그는 저자로서의 활동이 편집자로서 하는 일에 지장을 줘선 안 된다는 생각에 “(직장에선) 의식적으로 더 일을 많이 하고, 가혹하게 일하는 편”이라고 했다. 그러다 보면 일이 일을 부른다. 그러나 거기서 비롯되는 고통은 당연시하는 듯했다. 그는 “힘들이지 않고 얻은 건 다 사라지더라”며 “힘들었던 시간만 실체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도 유독 힘든 날이 있다. 진력을 다하는 직장인은 “퇴근길 동호대교를 건너며 종종 운다”고 털어놨다. 단 “1~2년 차 때와 15년 차 때 우는 눈물의 사연은 다르다”며 “고통의 질이 달라져 성장하고 있으니 괜찮다”고 했다. 워커홀릭 끝판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밤 9~10시 넘어 퇴근하는 것이 일상인 성실과 과로의 아이콘. 추측건대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문학’을 위해 일한다는 헌신의 자세가 있기 때문이다. “문학은 내 영혼의 평생 직장. 여기서 죽을 때까지 일하며 사랑을 벌고 살아갈 힘을 얻어낼 것이다.” 박혜진의 책 ‘이제 그것을 보았어’의 마지막 문장이다. 그는 차분한 말투로 조곤조곤 이렇게 덧붙였다. “지금까지는 내가 문학이란 직장에서 월급을 받았다면, 지금부터는 이 문학이라는 회사가 나 때문에 돈을 벌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픽=김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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