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K팝과 K드라마 등 우리 문화가 전 세계를 열광시키고 있다. 소설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며 우리 말과 글의 아름다움은 이제 세계인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한국어를 배우려는 외국인이 해마다 크게 늘고 있는 것도 이런 흐름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이 빛나는 성취의 이면에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이야기가 있다.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우리 말과 글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애국지사들의 희생이 그것이다. 오늘 우리가 무심코 쓰는 말과 글 속에는 그들의 눈물과 헌신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류도, 노벨문학상도 없었을 것이다.
그 헌신의 대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가 바로 김해 출신의 한뫼 이윤재(1888~1943) 선생이다. 그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맞서 우리 말과 글을 연구하고 지키다 광복을 눈앞에 두고 옥중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였다.
이윤재 선생
◇우리 말과 글의 가치를 깨우치다
말과 글을 빼앗긴다는 것은 단순히 소통 수단을 잃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정체성 그 자체가 흔들리는 일이다. 2차 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독립한 신생국 가운데 상당수는 식민 통치국의 말과 글을 공용어로 그대로 받아들였다. 중남미에서는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가,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는 프랑스어가 공식 언어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달랐다. 35년간의 일제 식민 통치와 민족말살정책 아래서도 우리 말과 글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이윤재 선생의 삶은 바로 그 살아남음의 한가운데 있었다.
선생은 1888년 12월 김해에서 태어났다. 김해는 고대 금관가야의 중심지로,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품은 고장이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소년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나라가 하나둘 무너져 가는 현실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일제는 학교에서 우리말 수업을 줄여 나갔고, 거리에서는 일본어 간판이 조선어 간판을 밀어냈다. 나라를 잃는다는 것은 곧 말과 글을 잃는다는 것임을 그는 온몸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서당에서 익힌 한자 문장들이 이 땅의 백성과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도 그즈음 뼈저리게 와닿았다. 책 속의 글귀가 아니라 지금 이 땅의 언어와 역사를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이 그의 가슴 속에서 서서히, 그러나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불씨는 1908년 대구 계성학교에 진학하면서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그곳에서 선생은 한글 연구의 선구자 주시경 선생의 사상을 접하게 된다.
"나라의 바탕을 보존하려면 우리 말과 글을 잘 지켜야 한다"는 그 신념은 젊은 이윤재의 가슴을 정통으로 파고들었다. 방향을 찾지 못한 채 타오르던 불꽃이 비로소 하나의 길을 향해 타오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성웅 이순신
도강록(박지원 저, 이윤재 역)
계성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1913년부터 마산 창신학교, 의신여학교 등에서 한글과 국사를 가르쳤다. 일제가 일본어를 국어로 강요하던 시절, 교실은 그 자체로 조용한 저항의 공간이었다. 선생은 1918년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평안북도 영변의 숭덕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미국 선교사가 세운 기독교 계열 학교라 민족 교육이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이듬해 3·1운동의 함성이 전국을 뒤흔들자 선생은 망설임 없이 영변 만세 운동에 뛰어들었다. 주동자로 몰려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른 이 경험은 그에게 단순한 고난이 아니었다. 차디찬 감옥 속에서 선생은 오히려 더 선명한 깨달음에 이르렀다. 총칼로는 나라를 되찾을 수 없다. 민족의 말과 글을 학문으로 굳건히 세우는 것, 그것이 진정한 독립의 길이었다.
1921년 출옥한 선생은 곧바로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대학 사학과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마치 운명처럼, 단재 신채호 선생과 교류하며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 독립의 뿌리임을 더욱 확신하게 됐다. 말과 글, 그리고 역사. 선생이 평생을 걸고 지켜나갈 세 가지 사명이 이렇게 하나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김해한글박물관 상설1관
◇'우리말 사전' 꿈을 꾸다
1924년 귀국한 선생은 배재학당 등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우리 말과 역사를 가르쳤다. 1927년에는 조선어연구회(후의 조선어학회), 1934년에는 진단학회 설립에 적극 참여하면서 한글 학자이자 역사 연구자로서 우리 학문의 토대를 다지는 데 앞장섰다. 선생은 '한글 맞춤법 통일안' 작업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주시경 선생의 뜻을 이어받아 '우리말 큰사전' 편찬의 실무 책임까지 맡았다.
선생의 신념은 확고했다.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이다. 정신이 살고 생명이 살아있다면 그 민족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 그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듯, 선생은 전국 팔도를 돌며 방언을 수집하고 사라져가는 우리말 단어들을 하나하나 기록했다. 선생에게 사전은 단순한 책이 아니었다. 일제가 짓밟은 이 땅에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독립의 날을 위해 온 생애를 바쳐 준비한 가장 큰 유산이었다.
1933년에 펴낸 '한글공부'는 문맹 퇴치를 위한 문자 보급 운동의 주요 교재가 됐다. 같은 해 발표된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거의 일치하는 과학적 체계를 갖췄다는 평가를 받으며 2011년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1937년, 선생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이 들이닥쳤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이끌던 민족 실력 양성 단체 수양동우회가 일제의 집중 탄압을 받으면서 선생도 그 검거의 손길을 피하지 못했다. 이 사건으로 안창호 선생이 순국하고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줄줄이 투옥됐다. 선생 역시 두 번째 옥고를 치러야 했다. 출옥 후에도 모진 고문의 상처는 쉬이 아물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은 그 만신창이의 몸을 이끌고 다시 우리말 사전 편찬 작업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은 갈수록 거칠어졌다. 1942년 10월, 일제는 마침내 조선어학회를 독립운동 단체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우리 말과 글을 학문으로 지키려 했던 것 자체가 죄가 되던 시절이었다. 학교는 물론 관공서와 일상생활에서도 우리 말과 글 사용을 전면 금지하고 일본어만 쓰도록 강요하던 바로 그 시절이었다.
우리말의 표준을 세우고 사전을 편찬하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선생은 가장 먼저 체포돼 함경남도 함흥으로 압송됐다. 가혹한 고문과 혹독한 조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선생은 일제의 강압에도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 구금과 고문으로 선생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다.
1943년 12월 8일, 선생은 그토록 완성하고 싶었던 사전을 끝내 손에 쥐지 못한 채 차가운 감옥 안에서 55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김해한글박물관 상설1관
◇한뫼의 꿈, 그리고 이어지는 발걸음
선생이 그토록 만들고 싶었던 우리말 사전은 해방 후 후학들의 손으로 1947년 '조선말 큰사전'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다. 선생과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목숨을 걸고 집필했던 원고는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8일, 기적처럼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됐다.
일제가 증거물로 압수했던 이 원고가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되찾아진 것이다. 1929년부터 13년간 공들여 작성한 원고지 2만 6500여 장 분량의 이 원고는 훗날 국가등록문화유산 '보물'로 지정됐다.
임규홍 경상국립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는 "선생은 국어학자뿐만 아니라 사학자로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면서 "한평생 우리 말과 글을 지키다 모진 고문 끝에 광복을 보지 못하고 순국한 선생의 업적을 후대에 더욱 널리 알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선생과 수많은 선각자들이 목숨으로 지켜낸 우리말 속에는 여전히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다. 일본어에서 넘어온 말들이 일상 속에 깊이 뿌리내려 있고, 법률이나 행정 용어에도 일식 한자어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해방 후 80년이 지났지만, 우리말 다듬기는 아직도 진행 중인 과제다.
진주에서는 '토박이말바라기' 같은 단체를 중심으로 토박이말 교육과 순우리말 알리기 활동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일제의 잔재를 걷어내고 우리 말을 온전히 되살리려는 이 노력은, 선생이 차가운 독방에서도 놓지 않았던 그 꿈의 연장선에 있다.
정부는 1962년 선생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김해시는 2021년 한글박물관을 건립해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그곳에서 선생이 직접 쓴 친필 원고와 옥중 유물을 마주한다면, 우리가 누리는 우리 말과 글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