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도상 답습 않고 조선의 ‘소박한 일상’ 담아내[붓 끝의 美학]

김승익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2026. 4. 8.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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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서화 걸작
③ 조영석 ‘설중방우도’
조영석의 ‘말 징 박기’(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겸재 정선 벗이자 예술적 동반자
문인 자의식 강해 어진 제작 거절
중 고사 기반 오래된 화제 다루며
황소 끄는 머슴 등 조선 현실 가미

동서양을 막론하고 끈끈한 우정으로 유명한 예술가들이 있다. 우리 미술사에서 이러한 사례를 꼽는다면 정선(鄭敾·1676~1759)과 이병연(李秉淵·1671~1751)의 우정이 대표적일 것이다. 한동네에서 태어나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와 시인으로 성장한 이들은 우리 산천을 함께 거닐고, 그림과 시를 주고받으며 평생을 벗으로 지냈다. 이러한 정선에게 또 한 명의 중요한 예술적 동반자가 있었으니, 바로 우리나라 풍속화의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한 문인화가 조영석(趙榮祏·1686~1761)이다.

서울 순화방(順化坊·현재 종로구) 사대부 명문가에서 태어난 조영석은 정선, 이병연과 더불어 한동네 지기였다. 정선의 스승인 김창흡(金昌翕·1653~1722)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시문과 서화를 익혔다. 지방 수령을 전전하며 출세와는 거리가 있었으나, 오히려 그림 실력으로 높은 명성을 얻었다. 특히 인물화에 뛰어나 두 차례 어진 제작 요청을 받았으나 이를 모두 거절할 만큼 문인으로서의 자의식이 강했다. 이는 화가로서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았던 정선과는 다른 면모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조영석은 정선의 그림에 다수의 제발을 남겼고, 정선 역시 그에게 여러 작품을 그려주며 깊은 신뢰와 존중의 관계를 이어갔다. 그는 “조선 산수화는 겸재에 이르러 비로소 새롭게 열렸다”고 평가할 정도로 정선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동시에 때로는 미흡한 점을 지적하는 비판도 서슴지 않았던 진정한 예술적 동반자였다.

조영석의 ‘설중방우도’(18세기 중엽). 개인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서화실에는 정선의 작품과 함께 그의 대표작인 ‘설중방우도(雪中訪友圖·왼쪽 사진)’가 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눈 내리는 겨울날 벗을 찾아가 정담을 나누는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거대한 산수 속에 작은 인물을 배치하는 일반적인 산수화와는 다른 인상을 준다. 눈 내리는 날 벗을 찾아가는 장면은 중국 고사에 기반을 두고 오랫동안 그려진 주제였지만 조영석은 조선의 모습을 담은 풍경으로 이를 그려냈다.

화면 아래 울타리를 따라 황소를 끌고 들어오는 머슴과 볏짚을 얹은 솟을대문 앞에서 이를 맞이하는 모습은 소박한 조선의 일상이 느껴진다. 사랑채의 서재 안에서 단정히 옷을 갖춰 입은 선비가 방한모를 쓴 채 막 도착한 벗과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는 장면도 조선 선비의 모습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여기에 늙은 소나무 줄기와 붉게 핀 매화, 그리고 푸른 잎이 무성한 나무들이 조화를 이루며 화면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조영석의 ‘설중방우도’가 지닌 중요한 의미는 바로 이러한 관념적 서사를 이상적 공간에 머물게 하지 않고, 현실의 모습으로 구체화했다는 점에 있다. 전체적인 구성은 전통적인 도상의 영향이 보이지만 그가 관찰하고 경험했던 일상의 풍경이 가미되어 조선적인 산수인물화로 재탄생했다.

조영석은 인물과 풍속을 그리는 데 있어 사실적 표현을 중시했다. “사물을 직접 마주하고 그 참모습을 그려야 비로소 살아 있는 그림이 된다(卽物寫眞 乃爲活畵)”는 그의 말은 이러한 태도를 잘 보여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말 징 박기(오른쪽)’는 그의 사실주의적 화풍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말을 눕혀 징을 박는 장면을 포착한 이 그림은 망치를 내리치는 인부의 동작, 고통에 몸을 비트는 말과 이를 제지하는 마부의 모습까지 세부를 집요하게 묘사해 강한 현장감과 생동감을 전달한다. 그림 오른쪽에 “물체를 잘 그리려면 남이 그린 것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살아 있는 것을 그려야 한다”는 글을 남겼는데 조영석의 회화 인식을 보여준다.

정선이 관념적 산수를 넘어 진경산수를 개척함으로써 조선적 산수화를 완성했다면, 조영석은 인물과 생활 장면을 통해 조선의 현실을 시각화했다. 정조 때의 문인 이규상(李奎象·1727~1799)은 “우리나라 그림은 조영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크게 독립된 모습을 갖추게 된 것 같다”고 평가했다. 그의 풍속화는 이후 김홍도(金弘道·1745~1806년 이후)를 비롯한 여러 화가들에게 자극을 주었으며, 일상의 삶을 담은 풍속화가 발전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김승익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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