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단상(斷想) [유상조의 마루치 아라치 인문학]

지난 겨울, 중학교 벗들과 용산에서 망년회를 했다. 자리가 없어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던 중, 5층쯤 되는 건물의 술집을 겨우 찾아 들어갔다. 술도 깰 겸 나간 베란다에서 본 풍경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경사진 산에 자리 잡은 집들이 철거된 상태로 바로 눈 앞에서 돌무지 무덤처럼 널브러져 있었고, 맨 위에 교회 건물만이 홀로 흐린 달빛에 빛나고 있었다. 교회를 그저 무덤덤하게 바라보며 종교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아온 나조차 묘한 신비로움에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후 술자리로 돌아와 40년 전 철부지 시절의 추억을 안주 삼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러다 최근 대학원 은사님과 저녁 식사를 하면서 그때 본 곳이 한남 3구역임을 알게 되었다. 그때의 전율이 되살아나면서 몇 가지 이야기가 떠올랐다.
미국 대학원 재산권법(Property Law) 수업에서 토지 수용과 관련한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민간 업자가 토지를 수용하는 사례였는데, 수용 대상이 된 마을 사람들은 할아버지 때부터 살아온 집이라며, 할아버지가 앉아 계셨던 의자가 바로 여기 있다며 총을 들고 민병대를 결성하면서까지 결사 반대한다. 이에 대해 회사 대표는 마을 사람들에게 집값을 시세보다 더 쳐준다는데 왜 반대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쓴웃음을 짓는다. 결국 자본이 승리하여 마을 교회의 십자가를 조심스레 빼낸 후, 마을을 사정없이 철거하는 내용이었다.
정기호 교수의 저서 『경관, 공간에 남긴 삶의 흔적』을 보면, 독일 은사님에게 대한민국의 곳곳을 소개하는 장면이 나온다. 1980년대 우리 도시의 솔직한 단면을 보여드리기 위해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청암동 산동네였다고 한다. 열악한 환경의 산동네가 펼쳐지고 집집마다 내놓은 연탄재를 비롯해 온갖 일상 쓰레기가 유독 눈에 들어와,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깨끗하고 청결한 독일의 동네와 자꾸 겹쳐 보였다고 한다. 너무 누추하고 낡은 곳으로 모시고 왔구나 싶어 후회하고 있는데, 은사님이 그러셨단다. “한국 사람들은 나무를 참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모양” 이라고.
비디오 속 그 대표에게 집은 그저 가격(Price)을 매기면 그만인 것이었지만, 그 집에 거주하는 분들에게 집은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가치(Value)였던 것이다. 양자의 차이를 구분할 줄 모르니 마을 사람들이 총을 드는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한남 3구역에서 철퇴를 맞은 집들도 그 시절 청암동 산동네처럼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담과 담이 단절의 벽이 아니라 소통의 벽으로 이어진 집에서 앞집이 뒷집의 경관을 가로막지 않도록 소박하게 자리 잡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은 주택 공급에 혈안이 되어 있다. 주택만 공급하면 주택 문제가 한 번에, 근본적으로 해결될 것으로 믿는다. 그분들의 머릿속에는 수요-공급의 법칙이 진리로 각인되어 있다. 공급을 늘려 집값을 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그런데 마땅한 땅을 찾을 수 없으니 미칠 지경이다. 우여곡절 끝에 공급 계획을 발표하면 지자체와 주민들이 반대하고 나선다. 어차피 협의했어도 반대했을 터이지만, 한마디 협의도 없었다며 ‘절차의 부재’를 이유로 드니 21세기 대한의 민주주의하에서 속수무책이다.
며칠 전 용산의 그곳에 다시 가보았다. 허접한 가림막 사이로 보이는 광경에서 더 이상 교회는 보이지 않았다. 저 산의 이름은 잊힌 지 오래고 그저 숫자로 불린다. 조만간 저 산은 덩치 큰 아파트로 뒤덮일 것이다. 서울에서 가장 비싼 단지 중 하나로 한강을 내려다보며 위용을 떨칠 것이다. 그 아파트는 수십 년간 쌓아온 모든 것을 파괴하고 들어섰음에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당당할 것이다. 그 시절은 잊힐 것이고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주택을 지적 반려자로 함께 해온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교회의 십자가라도 편안히 영면하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서경IN sk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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