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AI시대, 분산형 전력망이 국가경쟁력이다

재생에너지의 급속한 확산과 인공지능(AI) 산업의 비약적 성장은 우리 전력 시스템의 전제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태양광과 풍력은 빠르게 확대되고, 데이터센터와 첨단 제조업을 중심으로 고품질·고신뢰 전력 수요는 폭증하고 있다.
이렇게 전력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기반 설비가 아니라, 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 까지 우리가 의존해 온 전력망은 대규모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력을 원거리로 송전하는 중앙집중형·일방향 구조를 전제로 설계되어 있다. 전력망 부족 문제에 대한 대응 역시 발전소와 송전선로를 확충하는 방식에 머물러 왔다.
하지만 송전선 확충에는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며, 지역 수용성 문제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무엇보다 재생에너지의 변동성과 AI 산업이 요구하는 초고품질·무정전 수준의 전력 공급을 단순한 설비 증설만으로 해결하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이제는 양적 확대가 아니라 구조적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전기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수동적 인프라에서 벗어나, 수요와 공급을 실시간으로 조정하는 지능형 시스템, 즉 ‘스마트그리드’로 진화해야 한다.
재생에너지, 에너지저장장치(ESS), 수요반응(DR), 전기차 충전 인프라 등 다양한 분산자원을 정보통신기술(ICT)과 결합해 통합·최적 운영하는 체계가 그 핵심이다. 미국과 유럽 등 주요국 역시 배전망 중심의 유연성 확대와 디지털 기반 운영체계로 빠르게 전환하고 있다.
정부가 발표한 ‘차세대 분산형 전력망’ 계획은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 전략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배전망 단계에서 유연성 자원을 확충하고, 배전망운영자(DSO) 기능을 강화하며, AI 기반 가상발전소(VPP)를 통해 지역 단위의 생산·저장·소비를 최적화하겠다는 방향은 매우 시의적절하다.
특히 제주에 도입된 재생에너지 입찰제와 실시간·예비력 시장은 가격 신호를 통해 유연성 자원의 투자를 유도하는 구조로 전환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는 단순한 정책 선언을 넘어 시장 제도 개편을 병행하는 실질적 변화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산업적 기회 또한 분명하다. 전 세계는 전력 인프라 투자가 확대되는 이른바 ‘그리드 슈퍼사이클’ 국면에 진입하고 있다. 우리 전력기기 기업들은 이미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입증해 왔다.
전문가들은 이 사이클이 장기적 흐름이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마이크로그리드, ESS, 직류(DC) 전력망, AI 기반 전력 플랫폼은 향후 유망한 수출 산업으로 성장할 잠재력이 충분하다.
여기에 최근 중동발 에너지 위기와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촉발된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불확실성은 우리의 에너지 안보 전략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보여주고 있다.
국제 에너지 가격의 변동성이 사상 최고 수준에 이르는 상황에서, 특정 지역이나 대규모 중앙집중형 발전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구조는 지정학적 리스크에 직접적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분산형 전력망은 이러한 외부 충격을 분산시키고, 지역별 자급자족 능력을 높여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과거 우리는 스마트그리드 선도국으로 출발했지만, 제도적·시장적 한계로 확산 속도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재생에너지 확대와 AI 산업 성장이라는 구조적 변화 속에서 전력망 혁신이 지연된다면 두 산업 모두 구조적 제약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전력망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전략 자산이다. 차세대 분산형 전력망이 계획에 머무르지 않고 현장에서 실행될 때, 우리는 탄소중립 달성, 산업 경쟁력 제고, 그리고 에너지 안보강화라는 세 가지 과제를 동시에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이 바로 전력망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할 결정적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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