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올레 창시자 서명숙 별세…‘걷기 문화’ 전국에 남긴 길

곽성일 기자 2026. 4. 8.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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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 경험이 만든 제주 437㎞ 도보길
1000만 발걸음 이끈 ‘길의 철학’ 지역과 사람 잇다
▲ 서명숙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연합

한 사람이 걸어 만든 길은 결국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았다.

제주올레를 창립해 국내에 도보 여행 문화를 확산시킨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7일 별세했다. 향년 69세.

서 이사장은 제주 서귀포 출신으로, 언론인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시사저널 편집장을 지내며 정치부 기자로 활동한 그는 오랜 시간 현장을 기록해온 1세대 여성 기자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된다.

그의 삶이 전환점을 맞은 것은 2006년이었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과정에서 그는 '걷는 시간'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체험했다. 장거리 도보 여정 속에서 단순한 여행을 넘어 자신을 돌아보는 경험을 했고, 이러한 체험은 이후 삶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특히 순례길에서 만난 인연을 통해 '각자의 삶의 터전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받으면서, 길을 만드는 일에 대한 구상이 구체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귀국 후 그는 곧바로 고향 제주로 내려갔다.

2007년 사단법인 제주올레를 설립하고 서귀포 시흥리에서 첫 코스를 열었다. 이후 꾸준히 길을 발굴하고 연결하면서 제주 전역을 아우르는 도보 네트워크를 구축해 나갔다.

그 결과 2022년에는 제주를 한 바퀴 도는 27개 코스, 총 437㎞의 길이 완성됐다.

이 길은 단순한 관광 인프라를 넘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제주올레를 찾은 도보 여행객은 누적 1000만명을 넘어섰고, 길이 지나가는 마을에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외지인과 청년들이 유입되며 지역에 활력이 생겼고, '길'은 사람과 지역을 잇는 매개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제주올레는 이후 전국으로 확산됐다.

지방자치단체들은 올레길을 모델로 한 도보 여행 코스를 조성했고, 걷기 중심의 여행 문화가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2012년에는 일본 규슈 지역으로까지 모델이 확장되며 국제적인 교류로 이어졌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서 이사장은 2017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했다.

그의 삶은 마지막까지 길과 함께 이어졌다.

최근에는 과거 순례길에서 인연을 맺었던 해외 지인을 제주로 초청해 함께 올레길을 걷는 시간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자신이 만든 길이 사람들을 다시 이어주는 공간이 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주변에서는 그가 남긴 가장 큰 유산으로 '길의 의미'를 꼽는다.

빠르게 이동하는 것이 효율로 여겨지는 시대 속에서, 그는 천천히 걷는 시간의 가치를 제시했다. 길은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자신과 마주하고 타인과 연결되는 공간이라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제주올레 관계자는 "고인은 길을 만든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길 위로 이끈 인물"이라며 "그가 남긴 길은 앞으로도 많은 이들의 삶 속에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빈소는 서귀포의료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영결식은 오는 10일 오전 제주올레 6코스 서복공원에서 열릴 예정이다.

그가 만든 길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는 여전히 누군가가 걷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