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이 있는 지리산 둘레길] 제20구간 산동 ~ 주천
산 서쪽 끝 위치 산동마을 산수유 집산지
꽃 피는 봄마다 환상적 색감 상춘객 북적
여순 사건 민간인 무고한 희생 있었던 곳
슬픈 사연 담은 노래 ‘산동애가’ 남겨져

구례 산동 현천 저수지. 산동은 지리산 서쪽 끝, 만복대의 깊은 산자락에 자리한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곳으로 산수유 집산지다. 산동골의 3월은 마치 물 번짐 효과의 노란 물감으로 퍼져 있는 한 폭의 수채화 그림으로 이루어진다. 산도 물도 마을도 사람도 온통 노란색으로 채워진 환상적인 풍광이다./사진작가 각로 박혜란/
◇산동 산수유
지리산 둘레길 제19구간 구리재에서 제20구간 밤재까지는 산동을 거치는 구간이다. 밤재를 넘으면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으로, 지리산 둘레길의 출발지로 회귀한다. 따라서 산동은 지리산 둘레길의 마지막 여정이 된다.

산동 전경.

계척마을 편백림.

산수유 시목.
한편 산동의 가을은 산수유 열매를 수확하려는 손길로 정신이 없다. 그런데 산수유 열매를 수확하는 것보다 씨앗을 발라내는 일이 더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입에 산수유 열매를 넣고 앞니로 씨와 과육을 분리하는 이 작업은 오롯이 여인들의 몫이었고, 이곳 산동 처녀들은 어릴 때부터 이 작업을 반복해서인지 앞니가 많이 닳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도 산동 처녀는 쉽게 알아보았다 하여 몸에 좋은 산수유를 평생 입으로 씨를 분리해 온 산동 처녀와 입 맞추는 것은 보약을 먹는 것보다 이롭다고 알려졌다. 그래서 인근 고을에서 산동 처녀를 서로 며느리로 들이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산동 모스크바

백인기 추모비.
1948년 10월 19일 시작된 여수·순천 사건. 정부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반군은 구례의 지리산으로 후퇴했다. 이들은 이곳을 거점으로 군경 토벌군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10월 말경에는 산동지서에서 지서원 3명이 살해되고 3명이 납치당하는 등 반군의 경찰관서 등 습격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제12연대장 백인기 중령의 자결 사건은 산동의 산하를 피바다, 불바다로 만든 단초가 됐다.
11월 초, 백인기 연대장은 남원 사령부의 긴급 대책회의 참석을 위해 구례를 출발해 남원으로 향했다. 트럭에 헌병 1개 분대가 동승한 상태였다. 반군은 밤재의 길목인 산동지서 인근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백 연대장의 차량이 나타나자 집중 사격했다. 동승한 헌병 분대원 6명이 사망했고 백 연대장 혼자 남게 됐다. 반군의 추격으로 인근 농가로 후퇴했으나 더 이상 탈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그는 부근 대밭에서 권총으로 자결한다. 사건 다음 날, 연대장을 찾기 위해 수색 중이던 1개 중대가 반군의 기습을 받아 40여 명이 죽고 50여 명이 부상당했다. 또 일부는 포로로 잡혔다. 지휘관이 사망하고 같은 부대원들이 살상당한 토벌군의 입장에서, 산동은 더 이상 우리 국토가 아니었다. 적화의 땅, 산동 모스크바였다. 이후 반군 토벌에 나선 군경은 산동 주민들에 대한 통비분자 색출과 의심 마을의 소각 등 무자비한 작전을 실행하기에 이른다. 마을은 불타고 무차별 연행과 즉결 처분의 아수라장이 됐다. 생일날은 다르지만, 제삿날이 같은 과부촌이 생기게 됐고, 악에 받친 사람은 오히려 산으로 올라가서 빨치산이 되기도 했다.

산동애가 노래비.
◇산동애가(山洞哀歌)
당시 토벌군이 처형 대상자로 분류한 산동 주민은 반군 협조 혐의자와 남로당 등 좌익단체 가입 경력자, 그리고 이들의 가족 또는 동료였다. 당시 산동에 살던 주민 대부분은 반군의 강요로 부역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식량 제공, 노무 동원 등이었다. 그런데도 그 가족들까지 빨갱이로 몰아 즉결로 처형했다.
산동면 좌사리 상관마을에는 백 씨 집안의 막내딸 백순례 이야기가 애절한 노래로 전한다. 3남 2녀의 가족 중 큰오빠는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가 사망했고, 북으로 갔던 언니는 해방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했으며, 둘째 오빠는 좌익 명부에 기재됐다는 이유로 토벌군에 총살됐다. 막내 오빠마저 좌익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체포돼 끌려갔다. 백순례는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며 자신이 대신 죽어도 좋으니 막내 오빠만은 살려 달라고 토벌군에게 애원했다. 그녀의 애원이 통했는지 막내 오빠는 살아서 가문의 대를 잇게 됐지만, 대살(代殺)을 자청한 그녀는 외산리 참새미골에서 총살됐다. 그녀의 나이 19세, 오빠를 대신해 죽기 전에 스스로 지어서 불렀다는 노래가 구전으로 전해져 ‘산동애가’가 되었다.

잘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오리 피어 보지 못한 채로
까마귀 우는 골에 병든 다리 절며절며/ 달비머리 풀어 얹고 원한의 넋이 되어
노고단 골짜기에 이름 없이 쓰러졌네. (중략)
잘있거라 산동아, 산을 안고 나는 간다./ 산수유 꽃잎마다 설운 정 맺어 놓고
회오리 찬바람에 부모 효성 다 못하고/ 발길마다 눈물지며 꽃처럼 떨어져서
나 혼자 총소리에 이름없이 쓰러졌네.

황부호 작가
글·사진= 황부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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