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속 ‘무주(無注)’와 달을 닮은 마을 ‘월정’

심규호 2026. 4. 8.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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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호의 제주 마을 이야기] ⑨ 달을 닮은 바닷가, 월정 上
제주의 진가는 멋진 관광지에만 있지 않다. 중산간부터 바닷가까지 긴 세월에 걸쳐 주민들이 뿌리 내리며 살고 있는 곳, 바로 마을에서 더욱 멋진 제주를 만날 수 있다. 심규호 중국학회회장이 신발 끈을 질끈 묶고 제주 마을로 향한다. 심규호 회장이 들려주는 흥미로운 마을 이야기를 [제주의소리]를 통해 만나보자. [편집자 주] 
아기자기한 월정리 바닷가 풍경.

월정月汀 - 달을 닮은 바닷가

월정月汀,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달빛 물가라는 뜻이다. 처음 가보았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다. 알고 보니 바다에서 바라 본 마을이 반달처럼 생겼기 때문에 월정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예전 한자 이름은 무주리無注里(또는 無住里, 武州里)였다. 이형상 목사가 탐라 곳곳을 순력한 내용과 행사 장면을 그린 그림 41면 가운데 첫 번째 나오는 고지도 「한라장촉漢拏壯囑」에는 '무주無注'라고 쓰여 있다. 물 댈 곳이 없다는 뜻인지 그리하여 거주할 만한 곳이 아니라는 뜻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청음 김상헌의 『남사록』에는 무주포無注浦, 이증의 『남사일록』(1681년)에는 송포松浦(소낭개) 등으로 적혀 있다가 1760년대 『탐라방영총람』에 무주포리無住浦里라고 쓴 후로 대동여지도(1861년)나 『해동여지도』에서도 무주포無住浦로 쓰였으며, 1899년 『제주군읍지』의 제주지도에는 무주리武州里라고 썼다. 이렇듯 無注, 無住, 武州 등이 혼용된 것을 보면 원래 제주어를 한자로 음차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간 무주에서 월정으로 개칭된 이유가 있을 듯하다. 

여담餘談

살펴보기에 앞서 「한라장촉」이란 말이 나왔으니 잠시 '장촉'의 뜻을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제주국립박물관에서 「한라장촉」에 대해 설명하면서 "한라산 주변의 장대한 경관을 바라본다는 뜻이다."라고 적힌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장촉'은 전고가 따로 없으니 이형상 목사가 만든 조어인 듯하다. '장'은 장대하다는 뜻으로 사용되나 격려, 찬동, 지지의 뜻도 있다. '촉'은 부탁, 당부의 뜻 외에 다른 의미는 없다. 따라서 한라, 즉 탐라의 전역을 돌아보기에 앞서 그 장대한 여정을 당부한다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 적절한 듯하다. 한 장의 지도이자 격려와 당부를 담은 일종의 서언인 셈이다. 

밝은 달밤에 테우를 타고

대략 1910년쯤 무주리에 살고 있던 원봉元峯 선생(1846쯤~1914년)이란 분이 달이 휘영청 밝고 멸치어장이 형성된 어느 날 밤 테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문득 마을을 바라보았더니 그 풍광이 너무 아름답고, 바다에서 바라보니 자신이 살고 있던 무주리가 반달처럼 생겼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생각하길, 자칫 오해하기 쉬운 무주無住 또는 無注라는 이름보다 반달을 닮은 마을, 달빛 환한 물가, 즉 월정이라고 하면 어떨까싶었다. 그리하여 마을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는 것인데, 『구좌읍 역사문화지』 297쪽 월정리 이명里名 유래에 나오는 말이니 나름 신빙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원봉 선생은 누구인가?    

원봉선생

『구좌읍 역사문화지』, 43쪽에 월정리의 역사적 인물이 소개되고 있는데, 월정리 효부 한씨 다음에 월정리 원봉선생을 소개하고 있으며, 월정리에 업적을 기리는 유적단비遺蹟壇碑가 세워져 있기도 하다. 이에 따르면 원봉 선생은 원래 제주시 화북(일설에는 소흘포所訖浦, 지금의 삼양1동) 출신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학문도 가르치고, 관혼상제법도 알려주며, 마을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 구조 개선에 열정을 쏟았다고 한다. 비문을 보니, 성은 장張, 휘諱(고인의 이름)는 봉수鳳秀, 자는 경빈景賓이다. 내용 가운데 송사松沙 선생의 문하라는 구절이 나온다.
원봉 선생 유적단비.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집안이 가난하였으나 힘써 배워서 일찍 훌륭한 명성을 드러냈고 송사 기우만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함에 이르러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핵심을 터득하였다(孤貧力學夙著令聞 及遊松沙奇先生之門 得聞大道之要."

송사 기우만

송사는 조선조 성리학의 중요 학파 가운데 하나인 노사학파의 창시자인 노사 기정진 선생(1798~1879)의 손자인 기우만奇宇萬 선생(1846~1916)의 호이다. 
송사 기우만.

조선 성리학은 여러 학파를 통해 크게 발전하였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이황은 영남학파, 이이는 기호(畿湖)학파의 시작이다. 기호학파는 경기도와 충청도, 호남지역에서 크게 부흥했는데, 특히 19세기에 들어와 호남지역에서 기호학파의 학맥을 이은 이들로 전주 출신의 간재艮齋 전우田愚가 있고, 장흥의 노사 기정진 선생이 있다. 노사는 많은 제자를 두었는데, 그 중에는 손자인 송사 기우만도 있다. 송사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시행에 항거해 모인 13개 고을 의병들의 추대로 의병장이 되었으니, 호남 최초의 의병장이었다. 고종 강제 퇴위 이후 의병활동을 접고 고향 장성에 삼산재三山齋를 짓고 은둔하면서 학문에 몰두하여 전체 54권 26책에 달하는 시문집 『송사집』을 남겼다. 사후 고산서원에 배향되었다. 

노사와 송사는 제주의 학자들과 관련이 있다. 특히 제주 출신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부해 안병택安秉宅(1861-1936)이 바로 제주 노사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17세 쯤 부친인 안달삼安達三(추사의 제자인 매계 이한진에게 배웠다)을 따라 전라도 장성으로 가서 노사의 문하생이 되었다. 33세(1893) 때 부친이 유명을 달리하자 당시 제주목 좌면 조천리였던 고향을 완전히 떠났다. 이후 장성과 광주 등지에서 서당을 개설하여 제자들을 가르치는 한편 1925년에는 목포로 이주하여 '유해'라는 한약방을 경영하기도 했다. 고향을 떠났지만 제주의 적지 않은 제자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움을 청하였으며, 교우 관계도 지속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해은 김희정, 수은 김희돈, 초광 고사훈(의병대장), 만취 김시우, 심재 김석익, 혁암 김형식, 근재 김균배, 한재 박봉술 등이 있다.    

궁금한 점

비문에 "송사 기우만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했다"고 적혀 있으나 아쉽게도 그 경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이 없다. 그가 재세했던 시기는 송사 기우만 선생하고 비슷하다. 만약 그의 문하에서 수학했다면 장성으로 직접 찾아가서 배웠을 터인데, 언제 어떻게 갔는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또한 부해 안병택과 관련된 제주 문인이나 제자들의 명단에도 그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국립제주박물관, 『부해 안병택』) 

월정리의 원봉 선생비는 그의 후학들이 단을 만들어 그 위에 세운 것이기 때문에 단비壇碑라고 부른다. 병자년 겨울에 세웠다고 하니 1936년이다. 분명 그 분의 제자들이 한 말이니 나름 신빙성이 있을 듯한데, 지금은 그저 송사 선생에게 배운 내력이 어떠한지 알아보고 싶을 따름이다.  

심규호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 졸업, 동대학원 중문학 박사. 제주국제대 교수, 중국학연구회, 중국문학이론학회 회장 역임. 현 제주중국학회 회장, 별꼴학교 이사장. 

저서로 '육조삼가 창작론 연구', '도표와 사진으로 보는 중국사', '한자로 세상읽기', '부운재'(수필집) 등이 있으며, 역서로 '중국사상사', '중국문학비평소사', '마오쩌둥 평전', '덩샤오핑과 그의 시대', '개구리', '중국사강요', '완적집', '낙타샹즈' 등 70여 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