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와 정화’ … 거대한 숯기둥의 거룩한 울림
뮤지엄산, 첫 한국작가 기획전
8m 숯더미·회화·조각 선보여
“불탄 뒤 새 물질로 재탄생 염원”
작가 30년 걸친 화업도 돌아봐

원주=박동미 기자
“전시장에 작가의 생각이 들어갈 틈이 있을까, 하는 고민이 컸어요. 워낙 자연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 건축물이잖아요. 안도 다다오가 늘 대표작으로 꼽을 만큼 자부심과 애정을 가진 곳이고요.”
‘숯의 작가’로 불리는 이배(70) 작가가 2024년 베니스비엔날레 이후 국내서 가장 큰 규모의 개인전을 연다. 7일 강원 원주 뮤지엄산에서 개막한 ‘앙 아탕당(En attendant): 기다리며’로, 뮤지엄산 개관 이래 처음 열리는 한국 작가 기획전이다. 전날 전시 현장에서 만난 이배 작가는 뮤지엄산의 강한 존재감 앞에서 자신을 한껏 낮췄으나, 공개된 작품들은 안도 다다오의 세계와 팽팽하게 맞설 만큼 압도적이었다. 그러면서도 오랫동안 함께 존재한 듯 자연스러웠고, 때론 뮤지엄산을 둘러싼 경관을 선명하게 드러내 주는 조력자처럼 보였다.
본관 입구에서 시작해 3개의 갤러리를 지나 야외 조각 정원에 다다르면, “올 때마다 수도원에 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했다” “농부가 기도하며 땅을 일구는 심정으로 임했다”는 작가의 고백들은 우리의 것이 된다. 예컨대, 미술관 입구를 지키고 서 있는 높이 8m, 무게 7t에 달하는 거대한 숯더미 ‘불로부터’ 앞에 서면, 성소로 들어가는 것처럼 거룩한 마음이 인다. 2023년 뉴욕 록펠러센터에서 선보인 작업으로, 숯이 지닌 치유와 정화의 의미를 극대화했다. “여기서 산을 몇 개 넘으면 몇 년 전 큰 산불이 났던 지역이 나오지요. 숯을 쌓고 세우며 ‘산불이 나지 않았으면’하고 기도했어요. 지극히 인간적인 염원과 바람이지요.”
시원하게 산을 조망할 수 있는 청조갤러리 로비엔 ‘붓질’로 명명된 16점의 그림이 지그재그로 전시됐다. 숯가루로 만든 안료를 먹처럼 찍어 그은 대형 회화다. 규격화된 전시장 벽을 벗어난 작품들은 시시각각 다른 빛과 그림자를 만나 새로워진다. 사람이 만든 것과 자연이 선사한 것이 이질감 없이 어우러져, 세상 어디에도 없는 신비한 산책로를 걷는 기분이다. 전시 준비로 뮤지엄산을 스무 번 넘게 오가며 “무엇을 보려 하기보다, 무엇을 느낄지에 집중했다”고 한 작가. 그의 전시는 그 귀한 예술적 체험을 관람객의 것으로 만들어주는 선물이 아닐까. 예측이 확신이 된 건 야외 조각 정원에서 숯 형태 조각 ‘붓질’ 6점과 조우했을 때다. 10m 규모의 브론즈 조각은 언뜻 숯처럼 보인다. 산세와 호응하는 높이로 제작돼 산을 우러러보기도 하고, 산에서 떨어져 나온 듯 누워 있기도 한다. 작가는 이 공간이 특히 좋았다고 했다. “깊숙이 들어가 있지만, 산을 향해 열린 공간이다. 우리의 산에만 존재하는 아주 독특한 정기 같은 걸 느꼈다”고 전했다. “아름다운 미술관을 흉측하게 하는 건 아닐까 염려도 됐어요. 그러나 예술은 처음 보는 것, 생소한 것, 어색한 것이니 받아들여지지 않을까요. 제 조각들이 산을 감상하는 데에 조금 도움을 주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

1989년 프랑스로 건너간 이배 작가는 1990년대 중반부터 ‘숯’을 매개체로 작업해왔다. 물질에 내재된 생성과 소멸, 그리고 순환의 원리를 일관되게 탐구해 왔다. 온전히 태워짐으로써, 새로운 쓰임을 얻는, 그래서 사라짐이 결국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품은 세계관이다. 2000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13년 한국미술비평가협회 작가상을 수상했다. 2015년 프랑스 국립 기메 동양박물관에서 한국 작가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고, 2024년 베니스비엔날레 전시로 또 한 번 국제 무대에서 주목을 받았다. 최근 독일 대형 화랑 에스더 시퍼 전속작가로 선정되며, 그 위상을 더욱 공고히 다지는 중이다.
총 39점을 소개하는 이번 전시는 30여 년에 걸친 화업에 대한 회고적 성격도 띤다. 40여 년을 해외에서 주로 생활한 그는 “고향에 온 듯한 기분으로 작업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논에서 놀던 기억들이 되살아났고, 나 자신을 재확인했다”고 했다. 작가의 정체성에 대한 사유는 9m 높이의 스크린에서 ‘비커밍(Becoming)’이라는 영상으로 펼쳐진다. 논 위에서 붓질을 하는 ‘농부의 아들’이자 ‘숯의 작가’의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볼 수 있도록 했으며, 그 앞엔 고향인 청도에서 옮겨온 흙이 펼쳐져 있어 의미를 더했다. 또, ‘화이트’와 ‘블랙’으로 나뉜 전시관은 순백의 천과 검은 숯 조각들이 대조를 이루며, 동시에 절제된 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최근 글로벌 미술신에서 “가장 기세 좋은 한국작가”로 꼽히는 이배 작가는 여전히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그는 “여전히 예술을 잘 모르겠다. 할수록 모르겠다. 다만, 이것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스스로 하는 일에 순수해지려고 한다”라고 했다. 전시명 ‘기다리며’에 대한 작가의 말이다. “나무는 가마 속에서 불에 타며 형태를 잃은 후 오랜 시간 식으며 새로운 물질이 됩니다. 저도 완결돼 있지 않으나 염원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이지요. 그것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에너지를 응축하는 능동적인 시간입니다.”
박동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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