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놓고 쉬다 가세요" 따뜻했던 백화암 [낭만야영]

지난겨울, 주작산을 종주하면서 두륜산까지 걷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얼어붙은 주작산 능선에서 체력을 거의 모두 소진해 버렸고, 결국 두륜산을 눈앞에 두고 포기해야 했다. 산은 바로 곁에 있었지만 그날 나는 더 이상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그 후로 마음속에 두륜산이 남아 있었다. 놓쳐버린 약속처럼, 가볍게 세웠던 종주 계획이 실패로 끝나자 그것은 은근한 집착이 되었다.
사람들은 산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그 산에 집착할 필요가 있냐고 말한다. 하지만 20년 동안 산을 오르다 보니 산에 가는 이유는 늘 조금씩 달라졌다. 처음에는 그저 산에 오르는 것이 좋았다. 산우들과 함께 걷는 시간이 좋았고, 정상에서 바라보는 일몰과 별이 보고 싶었다. 어느 날은 꽃이 예뻐서, 또 어떤 날은 눈 덮인 능선이 보고 싶어서 산에 올랐다. 때로는 SNS에 자랑하고 싶었고, 남들이 쉽게 가지 못하는 곳에 서 있는 스스로가 조금은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날에는 그저 궁금했다.
'과연 내가 저 산을 오를 수 있을까?'
그 여러 이유들이 겹겹이 쌓여 결국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세계여행을 떠났다. 지금 돌아보면 그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집착은 꼭 나쁜 감정만은 아니다. 때로는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작은 불씨가 되기도 한다.
백화암에 잠자리 풀고
두륜산은 도립공원이라 야영이 금지된다. 산행 시간이 길지 않아 산행을 마치고 오소재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주작산에서 혼자 사투를 벌이던 날, 수시로 연락하며 생사를 확인하던 김정미가 이번에는 함께 가자고 했다. 김효주 역시 이제는 나이를 생각해야 한다며 핀잔을 주면서도 슬쩍 합류했다. 예전 같으면 도전정신 때문에 산을 올랐겠지만, 이제는 친구와 함께 걷는 시간이 더 즐겁다.
들머리를 고민하다 두륜산 입구에 자리한 백화암에 들렀다. 비구니 스님들이 머무는 아담한 암자였다. 마침 점심 공양 시간이었는지, 스님 한 분이 밝은 미소로 식사를 권했다. 음식은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스님은 함께 식사하며, 백패킹이 신기한 듯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오늘은 어디서 머물 예정이냐'는 질문에 '산행 후 오소재로 갈 예정'이라고 했다.


스님은 "여자들끼리 위험할 수도 있다"며 "사찰 담장 밖 공터에서 야영을 하는 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민폐가 될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말하자, 스님은 "평일이라 방문객도 많지 않으니 괜찮다"며 직접 자리를 안내해 주셨다. 사찰 뒤편 문을 지나자 작은 공터가 나타났다. 낮은 담장 너머로 대웅전 지붕이 보였다. 하룻밤 머물게 해준 데 감사의 마음을 담아 보시함에 작은 시주를 하고 백화암을 나섰다.
만일재 너머 가련봉과 노승봉까지
진불암주차장에서 임도를 잠시 오르자 두륜봉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부드러운 오솔길이었지만 곧 너덜길로 바뀌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바위의 크기도 커졌다. 직립 보행이 쉽지 않을 만큼 바위가 가팔라졌다. 절벽 위에 자리한 두륜봉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거대한 암릉 사이를 교묘하게 피해 놓여 있었다. 두륜봉 정상에 올라서자 시야가 열렸다. 저 멀리 바다로 흘러내리던 능선이 다시 우뚝 솟아 가련봉과 노승봉을 이루고 있었다. 바위 끝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정미와 효주의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멀리 흩어졌다.

두륜봉 정상 바로 아래에는 천연 돌다리인 구름다리가 놓여 있었다. 운해가 끼는 날이면 하얀 구름이 바위 틈 사이로 흘러 들어와 다리를 넘나든다 해서 백운대로 불리기도 한다. 호기심이 발동한 정미와 효주는 구름다리 위로 올라갔다. 사진을 찍겠다며 자연스럽게 손을 잡아 끌어주는 장면을 연출했지만, 아마추어들의 엉거주춤한 포즈에 웃음만 터져 나올 뿐이었다. 사진을 수십 장 찍은 끝에 겨우 마음에 드는 두어 장을 건졌다. 그날의 풍경과 웃음이 함께 담긴 귀한 사진이었다.

구름다리를 뒤로하고 만일재로 내려섰다. 바람은 능선을 따라 길게 흘렀고 햇빛은 바위 위에 얇은 비단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두륜봉과 가련봉 사이에 있는 만일재는 거창한 풍경을 드러내기보다는, 잠시 숨을 고르며 산의 호흡을 느끼게 하는 자리였다. 우리는 잠시 멈췄다. 그 고요 속에서 서로의 호흡이 같은 박자로 맞춰지는 것 같았다.
만일재에서 가련봉으로 오르는 능선은 부드럽게 이어졌고, 그 사이로 낮게 자란 조릿대들이 바람에 몸을 기울이며 길을 안내했다. 멀리서 보면 험준한 암봉이지만, 막상 가까이 다가서면 두륜산은 다정한 얼굴을 보여 준다. 오르는 길에서 뒤돌아보니 조금 전 올랐던 두륜봉이 거대한 군함처럼 장엄하게 서있었다. 계단이 나타났다. 난간 기둥에 155계단이라고 적혀 있었다.
"허벅지에 힘 좀 들어가겠는데요?"
효주가 앞장서며 호탕하게 말했다.
"민미정이 꼭 가고 싶다는데 가야지?"
정미는 고집쟁이 들으라는 듯 나를 슬쩍 보고 말했다.
"고맙다 친구야!"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먼저 올라가라며 손짓했다.

우리가 지나온 길은 마치 오래된 지도 위에 그어진 연필 선처럼 만일재 위에 조용히 남아 있었다. 가련봉을 오르는 구간은 바위 능선이 이어지며 산의 골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저 멀리 대흥사 큰절이 보였다. 대흥사에서 보는 두륜산도 궁금했다. 가련봉 정상에 올라서자 시야가 갑자기 넓어졌다. 두륜산의 능선이 사방으로 흘러내리며 남쪽 바다로 이어지고 있었다. 해남의 들판은 겨울빛을 머금은 채 잔잔하게 펼쳐져 있었고, 그 너머로 남해의 수평선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바위틈에 남아 있던 겨울의 냉기가 얼굴을 스쳤다.
"막상 오르니까 두륜산이 진짜 웅장하네요."
효주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로 이어지는 능선이 거대한 파도처럼 출렁이며 이어져 있었다. 아직 봄이 닿지 않은 듯 앙상한 나무 사이 길을 쉬엄쉬엄 올랐다. 노승봉 정상은 널찍한 바위로 되어 있었다. 이름 때문일까. 늙은 스님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세월에 닳고 바람에 깎인 바위 표면에는 오랜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바람은 오래된 산의 이야기를 전하듯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조금 전 지나온 두륜봉과 가련봉이 능선 위에서 차례로 이어졌다.

북미륵암 지나 진불암으로 원점회귀
멀리 주작산 능선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문득 지난겨울이 떠올랐다. 얼어붙은 주작산에서 체력을 모두 소진하고 두륜산을 포기했던 그날. 그때는 두륜산이 까마득히 멀리 있는 산처럼 느껴졌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 산의 한가운데 서 있다. 산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노승봉에서 북미륵암으로 내려가는 길은 살벌했다. 거대한 암릉 위에 놓인 계단이 낙석으로 반파되어 있었다. 봄에는 바위 사이에 얼어붙었던 얼음이 녹아 이격이 생기면서 낙석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바위산을 오를 때는 항상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 암벽 부분을 재빠르게 지나 전망대에 다다랐다. 정미와 효주가 능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햇살이 길 위에 흩어져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감성 풍부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북미륵암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륜산 7부에 조용히 자리한 작은 암자였다. 바위와 숲 사이에 숨듯이 놓여 있어, 마치 산이 품고 있는 비밀스러운 공간처럼 느껴졌다. 암자 앞에 서니 바람이 잦아들고, 산 전체가 한층 고요해진 듯했다. 정미는 암자를 돌며 마애여래좌상을 찾았다. 마애여래좌상이 보존되어 있는 용화전은 굳게 닫혀 있어 볼 수는 없었다. 다음을 기약하며 우리는 잠시 숨을 골랐다.
"이런 데서 하루 자면 좋겠다."
정미가 말했다.
"언니 박배낭 메고 산 타는 거 싫어하잖아요!"
효주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웃으며 동조했다.
북미륵암에서 진불암으로 내려오는 길은 수월했다. 오후의 햇살이 능선 위로 기울고 있었다. 숲은 점점 긴 그림자를 드리웠고, 산의 색깔도 조금씩 깊어지고 있었다. 진불암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하루의 빛이 부드럽게 내려앉고 있었다.
"두륜산, 결국 왔네."
정미가 웃으며 말했다.
집착처럼 마음속에 남아 있던 산이었다. 하지만 막상 와보니, 두륜산은 나를 시험하거나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었을 뿐이었다. 어쩌면 산은 늘 그런 존재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포기하든, 돌아오든, 다시 찾든 상관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다시 찾아온 사람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맞아 준다.

우리는 다시 백화암으로 돌아왔다. 담장 밖은 가로등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여자들끼리 무서울 테니 가로등을 환하게 밝혀준 듯했다. 낮에 만났던 스님의 미소가 떠올랐다. 덕분에 밤하늘의 별이 빛나는 텐트 풍경은 남길 수 없었지만, 방랑자들을 받아 주는 스님의 배려에 마음이 훈훈해졌다.
민미정 깨알 팁 <아무도 묻지 않아도 알려주고 싶은 정보>


두륜산은 바위 능선이 발달한 산으로, 두륜봉·가련봉·노승봉 일대는 암릉 구간과 계단이 많아 비나 눈이 내린 뒤에는 미끄럼에 특히 주의해야 한다. 낙석이 발생하기도 하므로 암릉 구간에서는 간격을 두고 이동하는 것이 안전하다. 두륜산은 도립공원으로 지정돼 공원 내에서 야영이 금지되어 있다.
두륜산 대흥사
두륜산 자락에 자리한 대흥사는 남도의 깊은 산사 문화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봄이 길게 머무는 장춘계곡을 비롯해 두륜산 곳곳에 여러 전각과 암자가 흩어져 있어 산행과 함께 둘러보기 좋다. 대흥사는 조선 후기 불교 중흥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사찰 곳곳에 문화재가 남아 있다.

경내에는 보물로 지정된 대웅보전 응진전 등이 단정한 조선 후기 사찰 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 그중에서도 바위 절벽 아래에 자리한 북미륵암에는 자연 암벽에 새긴 4m 높이의 거대한 마애여래좌상이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밖에도 진불암과 여러 작은 암자들이 산중 곳곳에 흩어져 있어, 두륜산을 걷다 보면 숲과 바위 사이에서 문득 산사의 고요한 풍경을 만나게 된다. 울창한 숲과 계곡, 그리고 천년 사찰 문화가 어우러진 두륜산은 남도 산행의 또 다른 깊이를 보여 주는 곳이다.
월간산 4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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