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시계 만들듯…스위스 산학연, 오차 없는 ‘우주 공급망’

정밀 시계 부품을 깎던 스위스의 오랜 장인 정신은 오늘날 수만개의 로켓 부품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유럽우주국(ESA) 창립국인 스위스는 갈릴레오 위성용 원자시계와 아리안 로켓 페어링(덮개) 등 ‘작지만 대체 불가능한’ 기술로 글로벌 우주 공급망의 핵심을 맡고 있다. 1960년대 아폴로 미션 당시 달에 첫 태양풍 성분 분석 깃발을 설치하는 등 존재감을 드러낸 기술의 뿌리는 대학 연구실에서 시작돼 산업으로 흘러들고 있다.

우주 부품 만드는 18살, 스위스 도제 교육 현장
지난달 25일 베른대학교 우주연구소에서 만난 18살 견습생 루카 가우치는 말하는 내내 미소를 띄며 작업실을 소개했다. 그는 스위스 도제교육 과정에 따라 2년째 연구소에서 광학 장비 부품과 고정 장치 등을 직접 제작하며 기술을 배우고 있다. 스위스에서는 약 9년의 의무교육(16살) 이후 대학 진학을 위해 일반계 고등학교로 진학하거나 연구소·기업에서 일과 교육을 병행하는 도제(견습) 과정을 선택할 수 있다.
가우치는 “원래 공부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이 일을 보고 나서 열정을 느꼈다”며 “일과 공부를 함께할 수 있어 좋다. 이건 제 삶에서 너무 큰 부분”이라고 말했다. 4년 과정이 끝나면 대학에 진학해 로켓과 위성을 더 깊이 공부할 계획이다.
연구소에서 제작된 부품은 소량이지만 여러 우주 산업계로 공급된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과 유럽우주국 등에서 베른대학의 부품을 찾는 이유에 대해 베른대 관계자는 “50년간 축적된 전문성과 설계부터 제작까지 가능한 인하우스 시스템, 그리고 산업체와의 협력을 통한 빠른 실험이 강점”이라고 설명했다.

학생 프로젝트에서 우주 기업까지
이곳 학생들은 학교와 기업의 지원 속에서 고가 장비를 다루며, 실패를 배움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큐브샛(소형 위성)을 만드는 스페이스크래프트 팀장 아나 슈바베달(23)은 “우리는 누구에게도 성과를 빚지고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하려는지”라며 내부 동기를 강조했다. 엑스플로어(Xplore)의 지오반니 라니에리(24) 부팀장도 “학점 압박이 있지만, 이런 실습 경험은 기업에서도 높게 평가된다”고 말했다.
슈바베달 팀은 2027년 큐브샛으로 기술을 검증한 뒤, 상층 대기 관측 위성으로 확대해 위성군 기반의 지구 대기 지속 관측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는 “목표는 실무 경험을 최대한 쌓는 것”이라며 “지속가능성 관련 역량에 대한 기업 수요도 높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스테판 헬미히 로잔연방공대 우주센터(eSpace) 연구원은 “우주센터는 각 교수 단위 연구실을 연결해 다학제 프로젝트를 조정하고, 학생 팀(연구)도 이 구조 안에서 연구실·기업과 함께 진행된다”며 “산업 파트너와 협력해 실제 구현 단계까지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교육은 실제 창업으로 이어진다. 학교는 우주 환경을 유지하는 ‘우주 지속가능성’에 주목하며 관련 프로젝트를 장려하고 있는데, 스핀오프 ‘클리어 스페이스(ClearSpace)’ 탄생이 성과 중 하나다. 창업 당시 학교의 지원을 받은 이 회사는 현재 에어버스·탈레스 등 거대 기업을 제치고 유럽우주국과 세계 최초로 우주 쓰레기 제거 상업화 프로젝트 계약을 맺었다. 최근 로켓 발사·위성 제작 비용이 크게 낮아지면서, 대학·스타트업 등이 우주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는 문턱이 빠르게 낮아지고 있다.

스위스혁신센터, 스위스 우주 협력 거점
지난달 23일 이곳에서 만난 학생들은 학생 주도 조직인 아이리스(ARIS) 산하 10여개 팀에서 고가 장비를 직접 다루는 우주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다. 수중 로보틱스 기술을 연구하는 폴라리스 팀 소속 취리히연방공대 3학년 리하르트 뤼딘(22)은 “이 프로젝트는 대학 커리큘럼의 일부로 학점을 받기 위해 참여하고 있다”며 “엔지니어는 반드시 실무 경험이 필요해 고가 장비를 직접 다뤄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폴라리스 팀은 약 15만스위스프랑(약 2억8천만원) 규모의 장비 지원을 받아 실험 중이며, 수중 전용 소나 센서 4개(약 8천만원 상당) 등을 활용한다.
로켓 발사 연구를 하는 다른 학생도 “학점과 지도, 산업계 후원이 더해져 이런 프로젝트가 가능하다”며 “직접 설계하고 문제를 확인한 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기업과 협력한다”고 말했다.
이곳에는 스위스·리히텐슈타인 우주항공센터(CSA)도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11개 대학·기관을 연결한 비영리 플랫폼으로, 각 기관이 독립적으로 운영되면서 필요할 때 협력한다. 장소적 이점 등을 활용해 향후 유럽 우주 산업과 물류를 잇는 허브가 되는 게 목표다. 코라 틸 부소장은 “각 기관이 독립적으로 움직이되 필요할 때 협력하는 구조”라며 “모든 기관이 동일한 의결권을 갖는 민주적 방식이고, 프로젝트도 정부가 아닌 현장에서 시작되는 바텀업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연구·산업 잇는 우주 생태계

스위스는 이런 산학 협력 기반 상향식 구조로 경쟁력을 키워왔고, 약 250개 기업이 이를 뒷받침한다. 스위스연방 교육·연구혁신청(SERI) 산하 스위스 우주청(SSO) 과학자문관 요나스 하비히는 “스위스의 우주는 국제 협력 그 자체라고 보셔도 무방하다”며 “정부가 방향을 정하기보다 산업계와 학계의 제안을 바탕으로 유망 분야에 투자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한국과의 협력도 본격화되고 있다. 지난해 10월 유럽우주국과 한국이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우주 기상 관측과 통신 인프라 공유를 중심으로 한 실무 협력이 진행 중이다. 특히 스위스의 우주 장비 개발 지원 프로그램(ProDEX)을 통한 양국 연구기관 협력도 유력한 경로로 거론된다.
취리히·베른·로잔·뒤벤도르프·엠멘/ 윤연정 기자
yj2gaz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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