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굿 by 함던컨 “함지훈이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최창환 2026. 4. 8.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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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최창환 기자] “(방)성윤이 형처럼 세리머니 하는 상상을 해본 적은 있어요. ‘손을 한 번 들어볼까?’ 생각해 봤는데 도저히 못 하겠더라고요. 언젠가는 용기를 내서 해보겠습니다.” 신인 시절 함지훈(42, 198cm)이 남긴 말이었다.

결국 이를 실천으로 옮기진 못했다. 위닝샷을 넣은 날도 덤덤한 표정으로 인터뷰에 임하는 게 기본값이었고, 우승했을 때 비로소 환하게 웃는 정도가 함지훈이 할 수 있는 최상급 표현이었으니까. 현대모비스를 담당했던 시절, 인쇄물 제작을 맡았던 디자인 팀으로부터 “함지훈 사진만 여고괴담 같아요”라는 푸념(?)을 듣는 게 나의 일과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어느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표정처럼, 함지훈은 한결같았다. 여우 같은 곰처럼 능글맞게 골밑을 공략했고, 경기 종료 부저가 울리기 전까진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았다. 플레이 스타일부터 무뚝뚝한 표정까지. 그에게 NBA 스타 팀 던컨을 빗댄 별명 ‘함던컨’ 이상으로 어울리는 별명이 또 있을까 싶다.

은퇴 시즌조차 수훈선수로 선정돼 인터뷰를 진행할 정도였으니, 입버릇처럼 말해왔던 “은퇴하는 순간까지 현대모비스에 필요한 선수로 남고 싶어요”라는 목표는 충분히 이룬 게 아닐까.

이승준의 덩크슛이나 김주성의 블록슛처럼 화려한 장면을 만들진 못했지만, 함지훈은 마흔을 훌쩍 넘은 나이에도 경쟁력을 보여주며 롱런의 표본이 됐다. 은퇴 시즌만 제외한다면, 수많은 승리와 영광을 함께 누렸던 현대모비스 팬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말로 선수 함지훈의 마지막 커버스토리를 시작하려 한다.

“함지훈이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 본 기사는 농구전문 매거진 점프볼 4월호에 게재됐으며, 팀명 혼동을 방지하기 위해 모비스는 현대모비스로 통일했습니다.

CHAPTER. 1 ‘잘하는 거 맞아?’
2003년 그리스. 세계청소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한 대한민국 청소년 농구대표팀에는 흔히 말하는 ‘주전자’가 몇 명 있었다. 이 가운데 1명이 함지훈이었다. “사실 같이 뽑히기 전까진 함지훈이 누군지 몰랐어요. 당시 대회에서 경기를 못 뛴 벤치멤버가 저, (박)구영이 그리고 함지(함지훈의 별명)였죠. 하프타임에 나와서 공 몇 번 던져본 게 전부였으니까요.” ‘주전자 동지’였던 정영삼의 회고다.

슛 연습만 하기엔 지루했는지, 하루는 함지훈이 정영삼에게 1대1 내기를 제안했다. 정영삼은 흔쾌히 응했다. 자신 있었기 때문이다. 웬걸, 결과는 생각지도 못한 완패였다.

“함지가 햄버거를 좋아하거든요. 햄버거 내기를 하자길래 좋다고 했는데 졌어요. ‘잘하는 거 맞아?’ 싶을 정도로 덩치는 크고 느린데 농구를 희한하게 하는 거예요. 얄밉게 하는데 이길 수가 없더라고요. 이후에도 계속 붙었는데 결국 한 번도 못 이겼죠. 매일 맥도날드 가서 햄버거 사줬습니다.”

그렇다. 함지훈은 어릴 때도 운동능력은 변변치 않았지만 농구를 잘했다. 기본에 충실했고, 골밑에서 자리를 잡는 능력도 탁월했다. (실례를 무릅쓰고) 서전트 점프를 물어보자 “재본 적이 없어 모르겠는데 아마 평균 이하가 나오겠죠. 기동력, 탄력 다 일반인이랑 비교해도 떨어질 것 같아요”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그럼에도 농구를 잘했던 원천은 어디에서 나왔던 걸까. 해답을 찾으려면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2020년대 들어 농구를 접한 팬들에겐 생소한 얘기겠지만, 함지훈은 농구인 2세다. 아버지 함영진(전 전매청), 어머니 이정우(전 선경) 씨 모두 농구선수였다. 어릴 때부터 농구를 접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성장했고, 자연스럽게 농구공과 함께 유년기를 보냈다.

“부모님이 외국에서 찍은 사진을 본 후 비행기 타고 외국 나가는 게 꿈이었어요. 할머니께서 농구선수가 되면 외국에 나갈 수 있다고 하셨죠. 그러면서 초등학교 3학년부터 농구선수를 꿈꾸게 됐어요. (부모님이 농구선수였다는 걸) 몇 살 때 처음 알게 됐는지는 기억 안 나지만, 아무래도 농구를 접하는 데에 있어선 영향을 받았겠죠. 선생님들께 들어보니 어머니가 저와 비슷한 스타일의 농구를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아버지는 빠르고 탄력이 좋으셨대요. 왜 있잖아요. 탄력 좋아서 방방 뛰어다니기만 하는 포워드요. 아버지의 DNA는 저에게 1도 안 온 거죠(웃음). 부모님은 힘든 길이라는 걸 아시니까 2년 동안 반대하셨어요. 그래서 5학년이 되어서야 정식으로 시작하게 됐죠.”

구슬치기, 게임 등 잡기에 능한 어린이였던 함지훈에게도 농구는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과 같았다. 단순히 좋아서 시작한 것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심지어 어릴 때는 키도 작아서 농구부 감독이 포기를 권하기도 했다고.

“어릴 때 별명이 돼지였어요. 그냥 돼지. 선수로서 경쟁력이 없었죠. 초등학교 6학년 때 양동근 감독님 (함지훈은 이후 감독님, 동근이 형이라는 호칭을 섞어서 말했다)이 연계 중학교 3학년이었어요. 연계된 학교끼리는 같은 체육관에서 운동하니까 서로의 존재를 알았지만, 그땐 둘 다 농구 못했어요. 저는 작고 뚱뚱했고, 감독님은 작고 말랐었죠. 둘 다 연습경기도 못 뛰고 기록지 적는 선수들이었어요. 얼마 전 동근이 형이 ‘너 그때 살 빼려고 운동하는 줄 알았다’라고 하시더라고요. 저도 ‘저 형은 놀러 왔구나’ 싶었죠(웃음).”

함지훈 농구 인생의 첫 번째 터닝포인트는 경복고로 진학할 즈음 찾아왔다. “살이 다 키로 가더라고요”라는 표현대로 단번에 15cm가 자랐고, 이후에도 학년을 거듭할수록 키가 쑥쑥 크면서 잡기에 능했던 가드 출신 함지훈은 ‘BQ 좋은 빅맨’으로 성장세를 이어갔다. 이를 토대로 중앙대에 입학했고, 이때부터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연세대, 고려대에 밀려 침체기를 걷던 중앙대도 박상오, 함지훈, 윤호영, 강병현 등을 축으로 명문의 위상을 되찾았다.

BQ 겸비한 빅맨 하면 손에 꼽히는 오세근도 농구 가르쳐달라고 할 정도였으면 말 다 한 거 아닐까. “고등학생 시절부터 연습경기를 많이 해서 알던 사이이긴 했어요. 한마디로 여우죠. 덩치에 비하면 순발력이 뛰어나고 빅맨이 가지지 못할 센스도 있었고요. 제가 입학 예정일 때 졸업하셔서 같이 뛰진 못했지만, 잔기술 알려달라고 조르기도 했어요. ‘네가 나보다 더 잘하는데 뭘 가르쳐달라는 거야?’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오세근의 회고다.

중앙대 선배이자 프로 데뷔 동기였던 박상오 역시 “어우, (함)지훈이 농구 잘했죠. 일단 머리가 좋잖아요. 요새 선수로 치면 요키치라고 보면 됩니다. 물렁물렁해 보여도 부딪히면 엄청 단단해요. 돌이에요. 돌”이라고 회상했다.

CHAPTER. 2 10순위의 신화
MBC배 우승에 MVP까지. 4학년이 된 함지훈은 3학년 시절 부상으로 인한 부침을 딛고 충분히 가치를 증명했다. 그럼에도 2007 신인 드래프트에서 함지훈의 이름은 이상할 만큼 불리지 않았다. 10순위. 1라운드 지명이었고, ‘황금 드래프트’라 불렸다는 것까지 고려해도 현재 함지훈의 위상을 봤을 땐 선뜻 이해되지 않는 지명 순위였다. 물론 현대모비스로선 땡잡은 격이었지만.

“외부 평가가 그리 높진 않았지만, 전 대학 경기를 봤거든요. 볼도 잘 다루고, 스텝도 좋고, 빠르진 않지만 영리했죠. 그래도 10순위까진 안 떨어질 줄 알았어요. 한 팀씩 지훈이를 호명하지 않을 때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라면서 기다렸습니다.” 유재학 당시 현대모비스 감독(현 KBL 경기본부장)의 회고다.

후술할 내용이지만, 기록이나 숫자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성격이었던 함지훈도 10순위라는 순위에 자존심 상해하진 않았다. 전혀.

“1라운드에 선발되는 게 목표였기 때문에 지명 순위에 연연하진 않았어요. 당시에는 외국선수 2명이 40분을 모두 뛸 때라 대학의 빅맨은 인기가 없었거든요. 여러 상황이 겹쳐서 그렇게 순위가 내려갔던 것 같아요. 물론 더 빨리 뽑힐 거라 기대했던 시기도 있긴 했지만 자만이었던 것 같아요(웃음). 그래도 덕분에 이 팀에 왔고, 이렇게 인터뷰도 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만족합니다.”

이어 또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만약, 현대모비스 이전에 다른 팀의 선택을 받았다면 함지훈의 커리어는 어떻게 됐을까.

“여러 번 생각해 봤는데요. 항상 답은 같았어요. 현대모비스에서 좋은 선배들, 유재학 감독님을 만났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다른 팀이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어요.”

함지훈이라는 이름이 관계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프시즌부터 “화려하게 뭔가를 하는 건 아닌데 끝나고 기록지 보면 20점 가까이 했더라고요”라는 호평이 입소문을 탔고,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며 현대모비스에 기대감을 심어줬다.

“(이)창수가 휵슛을 잘 쐈잖아요. 창수에게 훅슛을 전수해 주라고 맡겼는데 금방 배우더라고요. 원래 할 줄 알았던 건지, 습득하는 능력이 좋은 건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센스가 있었다는 거죠. 그래서 첫 시즌부터 선발로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유재학 감독의 회고다.

2007-2008시즌이 개막하자 함지훈은 기대대로 진가를 발휘했다. 2007년 10월 18일. 현대모비스의 고졸 신인 김건하가 태어난 지 만 6개월도 안 됐을 신생아 시절, 함지훈이 KBL에 데뷔했다. 대구 오리온스를 상대로 18점 8리바운드. 2점슛 성공률은 80%에 달했다.

드래프트 후 바로 시즌을 맞이하는 현시대와 달리 오프시즌을 소화한 후 맞은 루키 시즌이라 해도 2007-2008시즌 신인 중 첫 경기 최다득점의 주인공이 바로 함지훈이었다. 실력은 지명 순이 아니라는 걸 단번에 보여준 셈이었다.

함지훈은 이틀 뒤 치른 서울 SK전에서는 8점에 그쳤지만, 이후 20경기 연속 두 자리 득점 행진을 이어가는 등 기대에 걸맞은 루키 시즌을 치렀다. 38경기 16.1점 5.8리바운드 3.2어시스트 1.3스틸. 현대모비스가 플레이오프에 못 오른 데다 무릎 부상 여파까지 겹쳐 신인상은 수상하지 못했지만, 함지훈과 현대모비스의 미래가 밝다는 걸 확인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는 활약상이었다. ‘10순위의 신화’라 불린 것도 이즈음이었다.

“농구 시작한 후 그렇게 주목을 받아본 적은 처음이었어요. 오죽하면 부모님도 이렇게 기사가 많이 나가도 되냐고, 무섭다고 말씀하실 정도였죠. 그래도 오프시즌에 잘 준비했기 때문에 자신은 있었어요. 준비한 대로 첫 경기도, 시즌도 잘 치를 수 있었죠. 신인상에 대한 아쉬움은 전혀 없어요. (김)태술이의 개인 기록이 워낙 좋았고, 당시 SK도 플레이오프에 올라갔잖아요. 인정할 건 인정해야죠.”

양동근의 입대로 약체라 평가받았던 현대모비스도 세간의 평가를 뒤집었다. 비록 함지훈의 루키 시즌에는 9위에 머물렀지만, 2008-2009시즌 KBL 역사에 남을 반전 스토리를 썼다. 샐러리캡 하한선조차 채우지 못해 트레이드 제한 조치를 받았던 현대모비스가 정규시즌 우승이라는 이변을 일으킨 것. 6라운드를 시작할 때 1위 원주 DB(당시 동부)와의 승차가 4경기였다는 것까지 고려하면 KBL 역사상 최고의 반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역전 우승이었다.

외국선수 출전 제한 쿼터가 두 쿼터로 늘어난 점을 슬기롭게 활용한 게 큰 원동력이 됐다. 루키 시즌 38경기 가운데 31경기에 선발로 나섰던 함지훈은 2년 차 시즌에 54경기 모두 교체 출전하며 2, 3쿼터를 지배했다. 평균 출전시간이 10분 가까이 줄어들어 개인 기록은 전반적으로 줄어들었지만, 야투율(53.9%→60.8%)은 큰 폭으로 증가하는 등 함지훈의 효율은 더 높아졌다.

식스맨상의 영예도 안았다. 비록 현대모비스는 4강에서 맞붙은 서울 삼성에 챔피언결정전 티켓을 넘겨줬지만, 2008-2009시즌이 함지훈의 커리어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시즌이었던 건 분명했다.

“일단 데뷔 시즌 준비할 때보다 힘들었어요. 2008년이면 유재학 감독님이 한창일 때라…(웃음).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2, 3쿼터만 뛰었는데 공격을 30번 하고 나오자는 마음이었어요. 넘어오면 무조건 포스트업, 포스트업이었죠. 프로에 온 후 영광스러운 순간이 정말 많았는데, 2008-2009시즌 정규시즌 우승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는다면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아요. 6라운드 시작할 때 ‘4강 직행이라도 하자’라는 마음이었는데 DB가 무너지며 생각지도 못한 우승까지 했죠. MVP로 선정됐을 때 이상의 의미가 있는 시즌이었어요.”

CHAPTER. 3 왕조 건설
KBL은 2009-2010시즌을 맞아 큰 변화의 바람을 맞았다. 3점슛 거리가 국제 규격에 맞춰 6.25m에서 6.75m로 늘어났고, 외국선수는 매 쿼터 1명만 출전할 수 있도록 바뀌었다. 토종 빅맨들이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것이다. 이 제도에서 가장 빛났던 이가 바로 함지훈이었다. 2, 3쿼터만 빛났던 이전 시즌과 달리 경기 내내 골밑을 지배했다.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양동근, 경험치가 쌓인 김효범과 브라이언 던스톤 등 조력자들도 내공이 대단했던 터라 상대 팀으로선 함지훈에게 쉽사리 협력수비를 펼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외곽에 걸쳐 더욱 짜임새 있는 전력을 구축한 현대모비스는 시즌 내내 선두권을 질주, 정규시즌 우승에 이어 챔피언결정전에서도 KCC를 4승 2패로 꺾으며 통산 3번째 통합우승을 달성했다.

함지훈도 MVP 트로피를 싹쓸이했다. 정규시즌 MVP에 이어 생애 처음으로 밟은 챔피언결정전 무대에서 평균 37분 51초 동안 16점 6.3리바운드 5.8어시스트 1스틸을 기록하는 등 물오른 기량을 뽐냈다. 발을 어떻게 빼야 할지, 언제 페이크를 해야 할지 귀신처럼 알고 상대의 골밑을 농락하며 KBL을 지배했다.

언젠가 적장 문경은 감독은 “골밑에서 침 한 번 삼키는 게 고급 기술이에요. 그런 여유가 있고 없고에 따라 A급 이상이 되느냐, B급에 머무느냐가 갈리는 거죠. 함지훈 연봉에서는 침 삼키는 지분이 5000만 원 정도 될걸요?”라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제일 기억에 남는 시즌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2009-2010시즌이 가장 먼저 떠올라요. 제일 큰 상을 받았으니까요. 저뿐만 아니라 모든 선수가 오프시즌부터 우승할 수 있겠다는 자신이 있었어요. 동근이 형이 돌아오면서 완전히 다른 팀이 됐거든요. 동근이 형이 있으면 코트 안팎에서 선수들이 갖는 안정감 자체가 달라요. 워낙 성실한 선수였잖아요. 쓴소리할 때도 있었지만, 굳이 안 해도 후배들이 보고 따라 하기만 해도 될 정도로 솔선수범하는 선배였어요. 이런 과정이 쌓이면서 선수들도 자신감을 갖고 시즌을 치르지 않았을까 싶어요.”

통합우승 직후 함지훈이 입대, 잠시 인고의 세월을 보냈던 현대모비스는 2012-2013시즌에 다시 우승 후보로 부상했다. 함지훈이 2011-2012시즌 막판 돌아와 예열을 마친 데다 2012 신인 드래프트 1순위로 김시래를 선발했고, FA 문태영도 영입했다. 변함없는 주장 양동근을 축으로 ‘판타스틱4’는 그렇게 구축됐다.

물론 농구는 비디오게임이 아니었다. 현대모비스는 탄탄한 국내선수 전력을 구성했으나 김시래가 성장통을 겪었고, 외국선수 전력도 안정감이 떨어졌다. 라건아(귀화 전이었던 당시 등록명은 리카르도 라틀리프였다)는 훗날 KBL 외국선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선수가 됐으나 2012-2013시즌 초반만 해도 퇴출 위기까지 몰렸던 신입 외국선수였고, 나머지 한자리는 교체 카드를 모두 소진한 가운데에도 뚜렷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함지훈, 양동근, 문태영의 활약만으로 대권에 도전하는 데에는 한계가 따랐다.

이때 현대모비스가 찾은 돌파구가 외국선수 트레이드였다. SK가 김효범을 트레이드 카드로 써서 1라운드 외국선수 2명(당시 외국선수는 드래프트를 통해 선발했다)으로 전력을 구성하자, 현대모비스 역시 창원 LG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라건아-로드 벤슨 조합을 꾸리며 안정감을 더했다.

SK가 역대 최다인 44승을 따내며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했지만, 현대모비스 역시 시즌 막판 기세만큼은 SK 못지않았다. 김시래까지 서서히 실력 발휘에 나서며 완전체 전력을 구성, 13연승을 내달리며 정규시즌을 마쳤다.

이 기세는 플레이오프까지 이어졌고, 현대모비스는 챔피언결정전에서 SK에 스윕을 따내며 또 하나의 우승 트로피를 품었다. 유재학 감독이 챔피언결정전 미디어데이에서 말한 “제가 선수였다면 드롭존은 10초면 깰 수 있습니다”를 실천으로 옮긴 셈이었다.

“생생하게 기억나요. 정규시즌에는 SK에 많이 졌지만(2승 4패), 일방적으로 밀리면서 진 건 아니었어요. 승부처 1점 싸움이었고, 그래서 유재학 감독님도 챔피언결정전에서는 무조건 이길 거란 자신감을 가지셨던 것 같아요. 실제로 예상보다 쉽게 시리즈를 끝낼 수 있었죠.”

왕조의 서막이었다. 현대모비스는 2012-2013시즌을 시작으로 2014-2015시즌에 이르기까지 쓰리핏을 달성했다. KBL 최초의 역사였다. 위기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결국 최후의 웃는 자는 현대모비스였다. 2013-2014시즌에는 벤치 전력까지 호화롭게 구축한 LG에 정규시즌 우승을 넘겨줬지만, 챔피언결정전에서 혈투 끝에 4승 2패를 거두며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다. 유재학 감독이 가장 어려운 챔피언결정전으로 꼽았던 시리즈다.

2014-2015시즌 개막에 앞서서는 벤슨이 팀의 기강을 무시하는 언행을 일삼아 퇴출됐지만, 라건아가 외국선수상을 수상할 정도의 레벨로 올라서며 골밑을 지배했다. 함지훈, 양동근, 문태영으로 이어지는 삼각편대가 흔들리지 않은 것은 물론이었다.

현대모비스는 DB와 맞붙은 2014-2015시즌 챔피언결정전을 스윕으로 장식하며 왕조를 완성했다. 쓰리핏을 이루는 동안 2차례 스윕을 따낼 정도로 함지훈, 양동근, 문태영이 주축을 이룬 현대모비스의 전력은 완벽했다.

“쓰리핏 과정을 돌아보면 2013-2014시즌이 제일 큰 위기였어요. 우리 팀 못지않게 LG도 전력이 좋았거든요. 정규시즌 6라운드 맞대결에서 4점 차 이내로만 졌어도 우승이었는데…. 그 경기 져서 정규시즌 우승 못 한 건 아직도 아쉽긴 해요. 그래서 이전까지 치렀던 챔피언결정전에 비하면 불안감도 있었지만, 결국 경험이 적었던 LG에 비하면 우리에게 운이 더 따랐던 것 같아요. 2014-2015시즌 챔피언결정전은 DB가 지친 상태라 비교적 쉽게 치를 수 있었죠. DB가 4강에서 체력을 다 빼고 올라왔거든요. (김)주성이 형, (윤)호영이 등 베테랑이 주축인 팀의 체력이 떨어진 상태였으니 쉽게 우승할 수 있었죠. 우승한 순간은 모두 생생히 기억나지만, 그중에서도 원주에서 쓰리핏을 완성한 순간이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어요. 아무리 전력이 좋아도 쓰리핏은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운이 따라야 하고, KBL의 특성상 군 문제도 해결해야 하죠. 부상 등 복합적인 상황도 극복해야 하고요. 우리는 그걸 해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요. 프로에서 많은 걸 이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시간이 지나도 쓰리핏을 가장 먼저 말할 것 같아요.”

CHAPTER. 4 “아, 동근이 형 얘기를 해야겠네요”
쓰리핏 달성 직후, 문태영과 라건아가 나란히 삼성으로 이적했지만 현대모비스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2015-2016시즌에도 정규시즌 2위에 오르는 등 함지훈과 함께하는 동안 꾸준히 상위 시드로 플레이오프 무대를 밟았다.

데뷔 시즌과 은퇴 시즌, 그리고 코로나19 여파로 플레이오프가 열리지 않은 2019-2020시즌. 함지훈이 프로 데뷔 후 플레이오프 무대를 밟지 못한 시즌은 앞서 언급한 3시즌이 전부다. 함지훈은 말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다진 문화 덕분에 자신도 팀도 단단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팀의 문화라고 해야 할까…. 양동근 감독님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부분인데 팀의 색깔, 문화를 어떻게 만들어 나가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기 위해선 감독님을 비롯한 코칭스태프, 고참들이 솔선수범해야 하는데 우리 팀은 오래전부터 그런 부분이 아주 잘 잡혀있었죠. 누구라도 현대모비스 하면 ‘끈끈한 팀, 쉽게 지지 않는 팀’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잖아요.”

양동근, 함지훈이라는 기본 골격이 유지됐던 덕분에 현대모비스는 쓰리핏 이후에도 우승 트로피를 추가할 수 있었다. 2018-2019시즌은 현대모비스가 모처럼 우승 후보 0순위로 불리며 맞은 시즌이었다. 양동근, 함지훈, 이대성, 이종현에 FA 문태종이 가세했고, 특별귀화한 라건아도 현대모비스로 돌아왔다.

‘몹벤져스’라 불린 현대모비스는 시즌 개막일부터 종료일까지 1위를 놓치지 않으며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인천 전자랜드(현 대구 한국가스공사)와의 챔피언결정전도 4승 1패로 마무리, 와이어 투 와이어를 달성했다. 양동근, 함지훈이 선수로 일군 마지막 우승이었다.

“우승했던 시즌은 전부 오프시즌 훈련할 때부터 감이 와요. 호흡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문)태종이 형이 왔을 때는 훈련 첫날부터 느낌이 왔죠. ‘우리 우승하겠다.’ 실제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우승했고, ‘200살 라인업’이라 불리기도 했잖아요(웃음). 나이가 많긴 했지만 어려울 건 없었어요. 다들 농구에 도가 텄던 사람들이라 오히려 편하게 농구할 수 있었죠.”

현대모비스는 2019-2020시즌 이후 큰 변화를 맞았다. KBL 출범 후 리그에서 가장 큰 획을 그은 선수라 해도 과언이 아닌 양동근이 은퇴를 선언한 것. 이는 곧 ‘주장 함지훈 시대’의 출발을 의미했다. 현대모비스는 현대모비스였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후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팀컬러를 이어갔다. 양동근 은퇴 후 첫 시즌이었던 2020-2021시즌 정규시즌 2위에 올랐고, 2024-2025시즌까지 빠짐없이 플레이오프 무대에 섰다.

우승만 못 했을 뿐, 함지훈 역시 건재를 과시하긴 마찬가지였다. 2022년 4월 5일 KCC를 상대로는 개인 첫 트리플더블(13점 10리바운드 10어시스트)을 달성하기도 했다. 부산 기아 시절까지 포함하면 팀 역사상 국내선수로는 강동희 이후 처음, 역대 국내선수만 놓고 본다면 최고령 트리플더블(만 37세 3개월)이었다.

이에 대해 전하자, 함지훈다운 답변이 돌아왔다. “글쎄요…. 기록이나 이런 건 솔직히 관심이 없어서요. 질문이 뭐였죠?(웃음) 아, 그게 최고령 트리플더블이었어요?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냥 농구를 오래 하다 보니 따라온 기록 정도죠.”

2017년, 나는 여전한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던 함지훈과의 인터뷰에서 목표를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은퇴하는 순간까지 현대모비스에 필요한 선수로 남고 싶어요.”

그 후 약 9년이 흘렀다. 양동근이 은퇴하고, 유재학 감독이 지휘봉을 내려놓는 등 현대모비스가 변화의 물결을 맞이한 가운데에도 함지훈은 변함 없이 코트를 누볐다. 전성기에 비하면 출전시간은 큰 폭으로 줄어들었지만, 팀이 필요로 할 때면 언제든 소방수 역할을 자처하며 코트로 나섰다.

그리고 2026년 1월, 지금이 떠나야 할 시기라고 판단했다. 은퇴 선언. 하루아침에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이미 2025-2026시즌 개막에 앞서 은퇴를 결정했지만, 발표만 미뤘을 뿐이다.

“최근 몇 년은 고민하지 않았는데 올 시즌 계약을 하는 과정에서는 구단과 여러 차례 얘기를 나눴어요. 그러면서 결정하게 됐죠.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막상 기사로 나오니 싱숭생숭하더라고요. (감정의 변화가 워낙 적어서…. 은퇴식 할 때 안 우는 거 아닐까요?) 글쎄요. 눈물이 많은 편은 아니긴 한데…. 그래도 눈물 나오지 않을까요? 부모님, 가족들이 다 와 있을 테니까요. 보면 울컥할 것 같아요. 그때 감정에 솔직히 반응하겠습니다(웃음).”

선수로서 이룰 수 있는 건 모두 이뤘다. 함지훈은 플레이오프 우승을 5차례 경험했고, 주희정에 이어 통산 최다 출전 2위에도 이름을 올렸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미련 없으세요?”라고 묻자, 손사래를 치며 “어우…. 미련은 없어요. 충분히 많은 성과를 이뤘고, 좋은 선수들과 재밌게 농구를 한 것에 만족합니다. 아직 싱숭생숭하지만, 그래도 후련하고 개운한 마음이 더 커요”라며 커리어를 돌아봤다.

비록 현역 생활을 마무리하지만, 함지훈은 ‘영원한 현대모비스맨’이다. 등번호 12번이 영구결번되며, 이변이 없는 한 지도자로서 첫걸음도 현대모비스에서 뗄 가능성이 높다.

“구체적으로는 시즌 끝난 후 감독님, 구단과 다시 얘기를 나눠보기로 했어요. 유재학 감독님께 많은 걸 배웠고, 양동근 감독님 밑에서 배우고 있는 부분도 있죠. 만약 지도자가 된다면, 이런 부분들을 잘 정리해서 유재학 감독님처럼 훌륭한 지도자가 되고 싶습니다.”

함지훈은 사석에서 엉뚱하고 유쾌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과 달리, 공식 인터뷰에서는 달변가가 아니었다. 결국 선수로서의 마지막 인터뷰에서도 함지훈의 숨겨진 면모를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혹시 못다 한 얘기가 있다면?”이라고 묻자 망설임 없이 품어왔던 얘기를 꺼냈다. 팬들, 그리고 영원한 동반자 양동근 감독을 향한 메시지였다.

“가장 감사한 존재는 역시 팬들이죠. 이렇게 은퇴하는 순간까지도 주목받을 수 있었던 건 다 팬들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성적이 좋든 안 좋든 변함없이 응원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아, 동근이 형 얘기를 해야겠네요. 뒤를 이어 주장이 됐을 때 최대한 따라 해봤는데 쉬운 게 아니더라고요.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동근이 형에 비하면 많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올 시즌 시작할 때 KBL 행사에 저를 다 보내주셨어요. 은퇴할 거니까 원하는 거 다 하라는 의미 아니었을까요?(웃음) 덕분에 미디어데이, 올스타게임에 다녀왔고 팝업스토어에서도 가족들이랑 놀다 올 수 있었죠. 동근이 형은 은퇴 시즌에 코로나19가 터져서 그런 것들을 못했잖아요. 그래서 더 챙겨준 게 아닐까 싶어요. 결코 사소하거나 작은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은퇴할 때까지 신경 써주셔서 감사드린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어요.”

“너희 함지훈 알아? 레전드야!”
함지훈은 2012년 4월 김민경 씨와 결혼했다. 중앙대 1학년 때 소개를 받았지만, 서로 바빴던 탓에 4학년에 진학할 즈음 연인이 됐다. 김민경 씨는 여자친구로, 아내로 함지훈이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는 과정을 모두 함께했다. 만점짜리 선수였던 함지훈은 남편, 아버지로 어떤 사람일까.

은퇴 관련해서는 가족과도 충분히 상의했다고 들었습니다.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어요. MVP, 우승, 올스타까지 선수로서 이룰 건 다 이뤘기 때문에 아쉬움은 없어요. 계약할 때마다 구단과 논의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결정도 아니었죠. 주위에서 아쉬워하시는 만큼 영광스러운 은퇴라고 생각해요. 가족들, 팬들 사이에서의 딜레마도 있었어요. 많이 뛰면서 이기는 건 좋은데 힘든 게 같이 따라온다는 걸 잘 알고 있었거든요. 후배들도 성장해야 하는 만큼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야 아름다운 거잖아요.

두 아들이 농구선수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할 수 있을 때까지 뛴 것도 의미가 클 것 같아요.
맞아요. 아이들이 우승 순간을 함께했다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중계 내내 집중해서 보진 않는데 아빠가 나오는 순간만큼은 집중해서 보더라고요. 둘째는 친구들에게 “너희 함지훈 알아? 레전드야!”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예요. 최근 이사를 왔거든요. 새로운 동네에서는 아빠 농구선수라는 거 얘기하고 다니지 말라고 했어요(웃음).

혼자 아이들을 키우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체력적으로 힘들었지만 부모님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남편은 체력적으로 더 힘든 일을 하잖아요. 농구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줘야죠. 저희는 남편의 컨디션에 따라 움직였어요. 쉬는 날이라도 아빠가 집에서 쉬어야 하면 같이 쉬었고, 시즌 끝난 후 2개월 쉴 때 정도만 놀러 나갔죠.

5차례 우승을 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우승은?
2013-2014시즌이요. 마지막 경기 도중 다쳐서 세리머니를 코트에서 못했거든요. 남편은 라커룸에 있었어요. 감동보단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죠. 기쁜 일이었는데 마음껏 기뻐할 수 없는 우승이었어요. 2018-2019시즌도 기억에 남아요. 둘째가 기어다닐 때였는데 네 가족이 우승 기념 사진을 남겼거든요. 바람이 그때 이뤄졌어요. 너무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죠. 둘째가 “나는 왜 첫 우승 할 때 사진에 없어?”라고 하면 보여줄 사진이 있어서 너무 기뻐요. 그래서 은퇴에 대한 아쉬움도 없는 것 같아요.

아빠 함지훈은 어떤 사람인가요?
둘째랑 지적 수준이 비슷해요(웃음). 그 정도로 권위적이지 않고, 친구 사이처럼 장난도 많이 쳐요. 장난기가 많아요. 아시죠? 남편이 말수 없는 사람 아니라는 거.

그렇다면 남편 함지훈은?
항상 제 의견에 귀 기울여 줬고, 꾸짖은 적도 없었어요. 접촉 사고가 나도 뭐라고 안 할 정도예요. 화가 없는 사람이잖아요. 운전할 때도 화 한 번 안 내고 빵빵도 안 해요. 껴들기를 해도 “사정이 있겠지” 하면서 넘기는 스타일이에요.

함지훈의 농구선수 인생이 마무리됩니다. 한마디를 남긴다면?
이렇게 돌아보니 진짜 얼마 안 남았네요. 많은 영광을 누릴 수 있게 해줘서 고마울 따름이죠. 제가 아쉬워하지 않는 게 안 서운하냐고 물어보니 힘들었던 부분을 얘기하더라고요. 무던해 보여도 패배에 대한 스트레스가 컸던 사람이거든요. 많이 뛰었는데도 진 경기는 특히 힘들어했죠. 집에서는 농구 얘기를 거의 안 하는데 너무 아쉽게 진 경기는 몇 번 돌아보기도 했어요. 더 이상의 아쉬움 없이 마무리하는 것에 대해 정말 고생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사진_박상혁 기자, KBL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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