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뜨르 속 감춰진 일본군 격납고… 제주의 아픈 역사 품다 [스페이스도슨트 방승환의 건축진담]
둔덕으로 위장한 콘크리트 군사시설
강제노동 제주도민 피와 땀 서려있어
日 패망 이후 제주 4·3 촉발 단초 돼
빨갱이로 몰린 민간인들 학살의 현장
4·3 79주기, 고요한 풍경 속 비극 성찰
제주의 말에는 바다를 건너야만 느낄 수 있는 이국스러움이 있다. 제주의 말이 이런 특성을 갖게 된 이유로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과 몽골의 직접적인 지배를 꼽을 수 있다. 구체적으로 지리적 고립은 제주의 언어에 중세 국어의 원형이 남아있게 했고 몽골의 지배는 그들의 언어와 제주의 말이 섞이게 했다. 하지만 풍토에 관심이 있는 내게는 제주의 거친 바람으로 인해 문장이 짧아지고 억양이 강해졌으며, 표준어에는 없는 독특한 성조가 남았다는 설명이 오히려 끌린다. 제주의 방언에서도 ‘오름(기생 화산)’, ‘코지(곶)’처럼 지형이나 ‘설릅(한쪽으로 기우뚱하게 기울어진 모양)’, ‘솔솔(성글고 듬성듬성한 모양)’처럼 형태를 묘사하는 단어에 관심이 더 간다. 그중에는 ‘뜨르’와 ‘옴팡’이라는 단어도 있다.

알뜨르비행장의 격납고는 멀리서 봤을 때는 그 존재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완만한 둔덕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내부는 당시 일본군의 주력 전투기였던 제로센(A6M) 한 대가 들어갈 수 있도록 폭 20m, 깊이 15m, 높이 4m의 반원형 공간으로 비워져 있다. 또한,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탄에도 무너지지 않도록 위에서 누르는 하중을 양쪽 벽으로 분산시키는 아치(Arch)와 이를 앞뒤로 길게 연결한 배럴 볼트(Barrel Vault) 구조가 쓰였다. 동시에 폭탄의 충격파를 흡수하고 멀리서 잘 식별되지 않도록 철근을 촘촘하게 넣은 고강도 콘크리트 구조물 위에 두꺼운 흙을 덮고 풀까지 심었다.
무엇보다 일본군은 숙련된 기술자를 구할 수 없는 당시 상황을 고려해 거푸집을 사용하지 않는 공법으로 격납고를 만들었다. 구체적으로 격납고가 들어설 자리에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든 뒤 그 흙 위에 철근을 배근하고 콘크리트를 타설했다. 그다음 콘크리트가 완전히 굳으면 그 아래에 있던 흙을 파내어 비행기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제주 도민들이 강제 동원되었다. 격납고 내부의 비워진 공간의 부피만큼, 제주 도민들의 고통이 겹겹이 채워진 셈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주에서 ‘예비검속’이 실시됐다. ‘예비검속(豫備檢束)’은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는 짐작만으로 사람을 사전에 구금하는 조치인데, 그 전신은 일제강점기 일본이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만든 ‘조선예방구금령’이다. 예비검속의 대상은 제주 4·3 사건에 연루되었던 사람, 보도연맹 가입자, 정부에 비협조적인 민간인들이었다. 제주에서 예비검속이 시행되면서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 촉발된 제주 4·3 사건이 재확산되기 시작했다.
전황이 한국군에게 불리해질수록 예비검속자 수는 늘어갔고, 결국 한림어업조합창고와 무릉지서(支署)에 수용되어 있던 250여명이 섯알오름의 옴팡진 웅덩이에서 사살됐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한국군의 일방적인 패배가 남한에서 북한군을 돕는 빨갱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무능을 가리기 위한 희생양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제주는 고유한 풍토에 바다를 건너야 갈 수 있다는 특성이 더해져, 뭍과는 다른 세상처럼 인식된다. 차안(此岸)과 피안(彼岸), 현실세계와 이상세계 사이, 그 어디쯤의 장소로 제주를 읽는 이들은 대안적인 삶을 꿈꾸며 이곳을 찾는다. 하지만 ‘한국인데 한국 같지 않은’ 이국적인 이미지만을 소비하기에는 제주가 지닌 역사의 층위가 너무 두껍다. 올해 78주기가 되는 제주 4·3 사건은 그 층위 중에서도 가장 슬프고 아린 상처다. 알뜨르비행장의 격납고와 섯알오름의 학살터를 단순히 비극을 관람하는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으로 분류하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비극의 역사를 품은 채 침묵하는 제주의 대지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하는 자세는 풍경 안을 읽어내려는 ‘되돌아봄’이다. 이런 노력 앞에서 제주의 봄은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은, 성찰의 풍경이 된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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