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뮤지엄시대, 뒤로 가는 ‘예향’

광주일보 2026. 4. 8.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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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현 문화·예향담당 국장
역시 명불허전이었다. 지난달 취재차 찾은 국립중앙박물관(이하 국중박)은 밀려드는 관람객들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평일 낮인데도 박물관 입구는 입장을 기다리는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내국인 반, 외국인 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해외 관람객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새삼 지난해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 열풍이후 글로벌 미술관으로 부상한 국중박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국중박은 지난해 전 세계 주요 박물관 관람객 수에서 당당히 3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최근 영국 미술전문매체 ‘아트뉴스페이퍼’가 발표한 ‘2025년 세계박물관 관람객 조사’에서 650만 명이 방문한 국중박은 루브르박물관(904만6000명), 바티칸박물관(693만3822명)의 뒤를 이어 세번째로 높은 수치를 거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박물관이 개장하자 마자 케데헌의 호랑이 캐릭터 뮷즈(뮤지엄과 굿즈의 합성어)를 구입하기 위해 벌어진 ‘오픈런’이 그 방증이다.

글로벌 명소된 ‘국중박’

그렇다고 국중박의 ‘쾌거’를 케데헌의 특수로만 보는 건 조금 억울하다. 물론 세계인들에게 K-컬처와 극중 캐릭터를 널리 알린 공(功)을 빼놓을 수 없을 터. 하지만 박물관의 차별화된 콘텐츠와 볼거리가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폭발적인 시너지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박물관을 둘러 보면 ‘준비된 자가 기회를 얻는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과거의 유물을 전시하는 박제된 공간이 아닌, 시대의 변화를 리드해가는 힙한 ‘뮤지엄’으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먼저 박물관 2층의 ‘사유의 방’이 대표적이다. ‘두루 헤아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라는 글귀가 적힌 입구를 지나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은은한 조명아래 두 개의 불상이 강렬한 존재감을 뽐낸다. 국보 제78호와 제83호인 금동반가사유상을 명상과 성찰의 상징으로 재해석하기 위해 지난 2021년 개설한 곳이다.

특히 방문객들의 N차 관람를 위해 서화관의 상설전 주기를 3개월로 단축시킨 게 통했다. 박물관이 보유하고 있는 소장품들을 브랜딩하기 위해 ‘시즌 하이라이트’(이 계절의 명화)라는 타이틀로 1년에 네 차례 대표작 2~3점을 선정해 전시하는 콘셉트다. 종전에는 상설전의 주기를 1년 단위로 세팅하다 보니 한번만 방문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시즌별로 다른 명작들을 소개하면서 여러번 방문하는 관람객들이 늘어난 것이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트렌디한 공간연출이다. 국중박은 총 7개의 전시관과 39개의 실에서 수천 여점의 컬렉션이 전시돼 있지만 관람객들은 피로감을 느끼기 힘들다. 기존의 시대별로 나열하는 연대기순 전시 방식을 개선하고 박물관 곳곳에 라운지를 조성하는 등 대중 친화적인 분위기로 꾸민 것이다.

지난 2024년 개관한 대구 간송미술관에도 소문난 ‘핫플’이 있다. 지하 1층에 자리한 실감영상실이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회화 작품을 디지털 영상으로 상영하는 공간으로 생생한 미적 체험과 감동을 만끽할 수 있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다. 압도적인 스크린에서 뿜어져 나오는 명작의 아우라와 독특한 디자인의 의자가 주는 쾌적함은 다른 미술관에서 접하기 힘든 경험이기 때문이다.

미술관은 고유한 컬렉션을 매개로 삭막한 일상을 풍요롭게 하고 인간의 영혼을 정화시키는 곳이다. 스펙타클한 블록버스터전이나 화려한 볼거리를 선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람의 퀄리티를 높이는 것이야 말로 본래의 역할이자 미래의 모습이다. 무엇을 보느냐 못지 않게, 어떻게 경험하느냐에 따라 감동의 여운과 깊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관람의 질 높이는 ‘모두의 미술관’

그런 맥락에서 보면 예술관광의 메카를 지향하고 있는 광주·전남은 시대에 뒤쳐져 있는 듯 하다. 수십 여 개의 국공립 미술관과 전시장을 갖추고 있지만 관람객 시점에서 전시의 몰입도를 높이고 오감을 만족시키는 ‘디테일’에는 무관심하다. 아시아문화발전소를 꿈꾸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이나 전국 최초의 지방 공립미술관을 자부하는 광주시립미술관은 N차 관람을 유도하는 전시 라인업과 관람객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남기는 시그니처가 거의 없다. 지난해 개관 10주년을 맞은 ACC가 좋은 예다. 7개의 복합전시관을 거느리고 있지만 1년에 평균 6~7개의 전시가 열리는 데다 ‘전시준비’라는 이유로 수개월째 공사장을 떠올리게 하는 황량한 모습을 방치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처럼 ‘비어있는 날’이 많다 보니 짬을 내 전시장을 방문했다가 헛탕을 치는가 하면 SNS에 올릴 만한 포토존을 찾는 것도 쉽지 않다.

바야흐로 ‘K-뮤지엄’의 시대다. 국내 주요 미술관들은 새로운 패러다임에 맞춰 다양한 방식과 콘텐츠로 관람객들을 불러 들이기 위해 체질 개선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예향을 자부하는 광주·전남은 여전히 미술관 편의주의에 머물러 있는 듯해 씁쓸하기만 하다. 이젠 보는 미술관에서 ‘즐기는’ 복합공간으로 변신해야 할 때다.

/박진현 문화·예향담당 국장 jh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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