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현 칼럼]‘전쟁’과 ‘추경’, 어느 쪽이 먼저인지 헷갈리는 전쟁 추경

박중현 논설위원 2026. 4. 7.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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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선거 겹칠 때 ‘경제 계엄령’ 거론
수십조 원 추경, 돈 풀기 제안으로 이어져
올해도 연초부터 차근차근 ‘추경 빌드업’
추경 국회 통과 안됐는데 ‘2차 추경’ 시사
박중현 논설위원
“우리 헌법에 ‘긴급재정경제명령’이 있지 않나. 입법도 대체할 수 있는 제도가 헌법에 있다. 조금 더 과감하게 해 달라.” 지난달 31일 이재명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긴급재정경제명령을 거론하자 놀란 이들이 적지 않다. 어떤 정책이든 일단 입에 올리면 ‘무’라도 썰고야 마는 이 대통령 스타일을 고려할 때, 이 말을 꺼낸 데도 숨은 의도가 있을 거란 해석이 분분했다. “관료들이 관행에 얽매이지 않고 해결을 위해 적극적, 자율적 대안을 내놓으라는 취지”라고 청와대가 설명한 뒤에야 상황이 진정됐다.

긴급재정경제명령권은 내우외환, 천재지변, 중대한 재정·경제상 위기 등으로 긴급조치가 필요할 때, 국회를 안 거치고 대통령이 법률 효력을 갖는 명령을 발동할 수 있도록 헌법이 규정한 권한이다. 계엄선포권에 맞먹는 경제 분야의 긴급권이다 보니 흔히 ‘경제 계엄령’으로 불린다. 1993년 8월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금융실명제를 실시할 때 쓴 게 마지막이다.

과거 이 대통령이 어떤 상황에서 긴급재정경제명령을 언급했는지 짚어보면 이번에 왜 이 말이 나왔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코로나19 발생 초기인 2020년 4월 당시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총선 전 의회 소집은 사실상 불가능한데, 신속 조치가 필요하므로 법률의 효력을 가진 긴급명령권을 발동해야 한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팬데믹 극복을 위해 전 국민에게 1인당 100만 원씩, 총 51조 원을 나눠 주자는 제안이었다.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시절인 2022년 1월에는 “대선이 끝난 후 50조 원 정도는 긴급재정명령 또는 추경을 통해 반드시 확보하겠다”고 했다. 대통령이 되면 팬데믹 피해를 본 자영업자·소상공인 지원 등에 과감히 돈을 풀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2020년, 2022년은 팬데믹의 첫머리와 막바지에 닥친 경제난, 지금은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으로 인한 경제위기란 게 공통점이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각각 총선과 대선, 그리고 지방선거가 목전인 상황이라는 거다. 신속한 정책 대응과 적극 재정을 선호하고,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는 데 거침이 없는 이 대통령에게 ‘경제위기+선거’ 조합은 긴급재정경제명령권을 떠올리게 만드는 트리거인 것 같다.

긴급재정경제명령을 언급한 그날 이 대통령은 26조2000억 원 규모의 ‘전쟁 추경’을 의결했다. 2월 28일 미국·이스라엘이 이란을 폭격하며 시작된 전쟁이 한 달 넘게 이어지면서 발생한 경제 충격에 대응하고, 취약계층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필요하다는 거다. 하지만 전쟁이 터지지 않았다 해도, 이맘때쯤이면 정부가 추경 편성을 밀어붙였을 거라고 생각하는 국민이 많다. 새해가 시작된 직후부터 정부의 ‘추경 빌드업’이 차근차근 진행됐기 때문이다.

1월 15일 이 대통령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추경을 해서라도 문화예술 토대를 건강하게 되살려야 한다”며 첫 운을 뗐다. 당일 “추경 편성을 검토한 바 없다”고 청와대가 공지했지만 5일 뒤에는 다시 “앞으로 추경할 기회가 있을 수 있다. 그때는 문화예술 분야 예산을 잘 검토해 보라”는 이 대통령의 발언이 나왔다. 같은 달 21일 신년 기자회견에선 “추경한다고 소문이 나서 ‘엄청나게 몇 조, 몇 십조 원씩 혹시 적자국채를 발행해서 추경하는 거 아니냐’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그런 건 안 한다”고 했다. 그로부터 6일 뒤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올해 내내 추경을 안 할 건 아니다”라고 했다. 2월 초 구윤철 경제부총리가 “현재로선 정부 내에서 추경 논의는 전혀 없다”고 부인했는데, 그달 말 중동에서 전쟁이 시작됐다.

전후 사정을 곰곰이 따져보면 전쟁이 터져서 전쟁 추경을 하게 된 건지, 정부가 추경할 기회를 보던 차에 때마침 전쟁이 터진 것인지 헷갈린다. 게다가 추경안에는 이 대통령이 전쟁 이전에 관심을 보인 문화예술 진흥, 농지 전수조사 등 전쟁과 무관한 예산이 다수 포함됐다. ‘반도체 메가 사이클’에 올라탄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낼 막대한 법인세 등에 힘입어 ‘추가로’ 빚을 내지 않고도 추경을 할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긴 하다. 7년 전 반드시 ‘전 국민’에게 돈을 똑같이 나눠 줘야 한다고 고집했던 이 대통령이 이번엔 소득 하위 70% 국민에게 소득·지역별 차등을 둬 지급하자고 한 것도 진일보한 점이다.

나랏빚이 매년 100조 원 넘게 불어나고, 올해 말이면 국가채무가 1400조 원을 넘을 전망인데도 선거가 있는 해만 되면 수십조 원 ‘답정너 추경’을 편성하는 일이 일종의 관행처럼 굳어져 가고 있다. 1차 추경안이 국회를 통과하지 않았는데도 기획예산처 장관은 벌써 ‘2차 추경’ 가능성까지 내비친다. 과반 여당이 장악한 국회에는 추경에 제동을 걸 세력도 없다. 앞으로 상당 기간 이 대통령이 굳이 긴급재정경제명령권을 써야 할지 고민할 일은 없을 것 같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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