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정통성 저격…개국공신의 후예는 벼슬을 가질 수 없었다[장지연의 역사 상상력]

조선 정치의 DNA
1485년(성종 16) 가을, 서른을 갓 넘긴 남효온(1454~1492)은 개성 시내의 한 집터 앞에 멈춰 섰다. 한때 세상을 호령하던 남재의 저택. 이제 농부가 경작하는 밭으로 변해 있었으나, 그가 말을 오르내릴 때 딛던 바위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곳에서 남효온은 쓸쓸하게 다음과 같은 시를 읊조렸다.
“오백 년이 끝나고 성군을 만나니/ 구정공(남재)은 그날 풍운의 만남처럼 성군과 만났구나/ 처량한 옛집이 송악산 아래에 있어/ 오세 손이 베옷 입고 찾아왔다오”
구정 남재가 누구인가? 동생 남은과 함께 조선 개국을 주도해 개국공신 1등에 녹훈된 인물이다. 비록 동생은 정도전과 함께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죽임을 당했지만, 남재는 태종의 편에 서며 승승장구해 영의정까지 오르고 세종의 즉위도 보았다. 남효온은 바로 이 남재의 5세손이었다. 개국공신인 5대조 할아버지의 사적을 찾은 길, 그러나 그의 마음은 자랑스러움이 아니라 씁쓸함과 쓸쓸함으로 채워져 있었다.
‘베옷을 입고 찾아왔다’는 시구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그는 벼슬이 없는 포의의 신세였다. 벼슬길이 열릴 가망도 없었다. 개국공신의 후예 남효온은 어쩌다 베옷을 입고 조상의 옛집을 찾아 분루를 삼켜야 했을까?
‘이대남’ 남효온의 치기 어린 상소
1478년(성종 9) 4월, 스물넷의 유학 남효온은 임금에게 상소를 올린다. 그달 초에 흙비가 내리자, 성종이 현재 정치에 문제는 없는지 간언을 듣겠다며 내린 구언교서(간언을 구하는 명령)에 응한 것이었다. 이 상소가 영영 그의 앞날을 막게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 남효온은 여러 문제를 언급한 끝에 마지막으로 소릉을 복위하자고 주장했다.
소릉은 단종의 어머니이자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 권씨의 능이다. 다시 말해 남효온의 주장은 현덕왕후 권씨의 신분을 회복시키자는 것이었다. 1456년(세조 2) 성삼문, 박팽년 등 훗날 사육신이라 일컬어질 이들이 벌인 단종 복위 모의 사건에 현덕왕후의 집안도 연좌됐다. 현덕왕후의 어머니, 동생 권자신 등이 모두 모반 혐의를 받게 된 것이다. 이 사건 때문에 아들이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되자, 현덕왕후 역시 폐서인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결국 종묘에서는 위패가 치워지고 능도 서인(庶人)의 급으로 개장된다. 남효온은 바로 이 문제를 타격했다. 종묘에 문종의 위패가 홀로 있으니, 흙비와 같은 재이를 그치게 하려면 현덕왕후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남효온의 주장은 내용상으로도 위험했을 뿐만 아니라 시기적으로도 적절치 않았다. 단종 복위라는 ‘역모’를 옹호하는 것으로도, 까딱 잘못하면 세조의 정통성을 비난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었다. “신하 된 자로 감히 할 수 없는 말”이라는 평을 받은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더구나 계유정난의 주동자 한명회와 단종 복위 모의를 고변한 정창손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살아 있던 시절, 저런 주장이 먹힐 턱이 없었다.
비록 언로를 막을 수는 없다 하여 죄를 묻진 않았으나, 이 상소로 남효온의 관직 길은 영영 끊기고 만다. 5대조가 세운 왕조에서 그 후손이 권력의 정당성을 묻다 버려진 셈이다.

개국공신 남재의 5세손 남효온
“흙비 멈추려면 현덕왕후를 복위”
스물넷 나이로 성종에게 상소
권력의 정당성을 묻다 버려진다
“단종이 오르면 벼농사가 무성”
무고로 판명된 당대 난언에서도
세조의 왕위 찬탈에 관한 비판
이미 당대 인식이었음을 보여줘
“권력엔 절차적 정당성 응당 필요”
고려 말 위화도 회군부터 이어져
조선 정치문화 핵심이 된 ‘명분’
한국 정치의 역사적 DNA이기도
절차적 정당성에 대해 압박하는 정치문화
남효온의 사례는 그 혼자만의 돌출적 치기가 아니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비판은 이미 그 당대에도 나왔다.
“가뭄이 너무 심한데, 상왕(단종)이 왕위에 오르면 벼농사가 무성하게 되리라” 같은 난언이 대표적이다. 비록 무고로 판명 나기는 했으나, 이 난언의 구조는 당대인들이 세조의 부당한 집권 때문에 가뭄과 같은 재변이 온다고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권력의 절차적 정당성에 대한 민감성은 고려 말까지도 거슬러 올라간다. 이성계 일파는 위화도 회군이라는 쿠데타를 통해 일거에 정국을 뒤집었다. 하지만 그 이후 모든 과정은 형식상으로나마 최대한 명분을 만들고 대간의 탄핵 같은 과정을 거쳐 절차적 정당성을 준수하는 방식으로 행해졌다. 강압적인 물리력보다는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함으로써 지지의 논리와 세력을 구축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수세를 극복하기 위해 태종 이방원이 정몽주를 대낮 길거리에서 살해하자, 이는 왕조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태종이 훗날 정몽주를 복권하고, 왕자의 난 과정에서도 ‘장자 상속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며 정종을 즉위시키고, 이복동생들과 수많은 사람을 죽이면서도 ‘자신은 죽일 뜻이 없었다’며 명분을 쌓으려 노력했던 이유는 정치적 정당성 없이는 관리들을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문화를 지닌 사회에서 세조가 저지른 쿠데타는 재앙에 가까웠다. 이는 문종에서 단종으로 이어지는, 최초로 실현된 장자 계승의 원칙을 무너뜨렸다. 거듭된 공신 책봉은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비대한 공신집단을 낳았고, 정실에 근거한 인사 문란을 초래했다. 정당성에서 비롯하는 자연스러운 지지를 얻지 못한 권력은 자꾸 헛헛한 상징 조작을 통해 권위를 창출하고자 했다. 관세음보살이 현신하고 진신사리가 분신한다며 임금이 ‘생불’이라는 이미지까지 끌어낸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는 건국의 기치였던 국가적 기조를 뒤틀어버리고 화려한 스펙터클에 기대는 사업들을 빚어낸다.
세조 정권의 문제점을 지적한다고 해서 조선의 다른 시대 권력이 매 순간 완벽하게 정당했거나 그 운영이 늘 성공적이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이미 조선은 탄생 때부터 그 권력 획득의 과정이 정당했는지를 묻고 의심하고 비판하는 사회였다는 점이다. 즉위한 후 특유의 과단성으로 많은 업적을 이뤄냈다 하더라도 즉위 과정의 부당함은 원죄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후대가 떠안게 된 부담
세조의 정변은 후대에 많은 부담을 안긴다. 연산군 대 벌어진 무오사화는 사초에서 비롯했다. 김일손이 넣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바로 단종을 애도하고 세조를 비판하는 내용이라고 지목된 것이다. 새롭게 성장한 세대는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근원적 비판의식을 지니고 있었고, 임금은 그것이 왕실에 대한 업신여김, 즉 ‘능상(凌上)’이라고 의심했다. 연산군 폐정의 단초는 세조 대에 있었던 셈이다.
중종 대 소릉 복위부터 시작한 역사 바로잡기의 흐름은 지난한 세월을 지나 숙종 대 단종 추숭으로 마무리된다. 단종의 무덤이 ‘장릉’이라는 호칭을 얻고 ‘노산군일기’가 ‘단종실록’이 되며, 드디어 잘못 끼워진 첫 단추가 정리된 듯했다. 그러나 작용반작용의 법칙처럼,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과정에서 또 다른 잘못이나 왜곡이 발생하곤 한다. 정몽주의 위상이나 이미지가 실제 모습과 달라진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후대 역사 바로잡기를 시도한 많은 이들이 ‘태종이 정몽주를 복권한 것이 도리어 우리 왕실의 덕을 드러내는 것처럼 당신도 세조 대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논리를 펼치며 임금을 설득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정몽주는 노회한 정치가라는 원모습이 아니라 ‘백골이 모두 먼지가 되더라도’ 충성을 바치는 절개의 상징으로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는다.
조선 왕조에서는 왕위의 정당성을 장자라는 태생적 조건과 군주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덕성에서 찾았다. 왕조 사회도 아닌 현재, 장자 계승의 원칙을 들먹이며 단종의 정통성이 어쩌고 세조가 어쩌고 하는 논쟁을 할 필요는 없다. 단종의 덕성은 더구나 확인된 바가 없으니 따질 근거도 되지 않는다. 다만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정치문화가 권력의 절차적 정당성에 상당히 민감하며, 그 연원이 적어도 500년이 넘는다는 점이다. 아무리 좋은 목적을 제시한다고 하더라도 바른 수단과 절차를 중시해야 한다는 압박이 강한 사회. 좀 과감하게 표현하면 이것이 한국 정치의 역사적 DNA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훗날 세조 대의 문제를 바로잡는 데 남효온의 글은 많은 역할을 한다. ‘사육신’이라는 명칭은 그가 지은 <육신전>에서 비롯한다. 단종 복위 모의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이들이 단지 여섯에 그치지 않는데도 그중 6명을 추출해 서사를 구축한 것이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해 과거를 포기하고 유랑에 나섰다는 생육신 김시습의 이미지를 만든 것 역시 남효온이다. 그는 생전 소릉의 복위를 보지 못하고 정계에서 소외된 채 살아갔으나 글을 통해 충분히 조선에 이바지했다. 기억과 기록은 역사의 DNA를 만든다.
장지연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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