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m 숯기둥에…회복·치유의 염원 새기다
'숯의 작가' 30년 작업 총망라
강릉 산불로 스러진 숲의 기억
숯 7톤 차곡차곡 쌓아 형상화
고향 청도 흙 전시장에 옮겨
빗자루로 흙 쓰는 퍼포먼스
"비질, 붓질과 다르지 않아"

8m 높이의 거대한 숯 기둥이 관람객의 동선을 가로막는다. 뮤지엄산 입구에 세워진 이 설치 작품은 2022년 강릉 산불 이후 작가가 마주한 공포, 그리고 재해를 극복하려는 염원을 형상화한 결과다. '숯의 작가' 이배(70)가 30년 넘게 천착해온 숯은 자연의 순환을 넘어 재앙과 치유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된다.
강원도 원주 뮤지엄산은 7일부터 이배의 대규모 개인전 'En attendant: 기다리며'를 시작했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미술관 전관을 하나의 유기적인 동선으로 엮은 이번 전시는 회화, 조각, 설치, 영상 등 이배의 30년 예술 세계를 총망라한다. 전시는 뮤지엄산에서 열리는 첫 한국 작가 개인전이다.
미술관 입구에 세운 8m 높이의 설치작 '불로부터'에 대해서 작가는 "재앙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염원뿐"이라며 "치유와 회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숯 7t을 쌓아 올렸다"고 말했다.
그는 "4년 전 강원도에 산불이 나 직접 가봤다. 이후 스페인, 캐나다 등에서 산불이 이어졌다"며 "나에게 숯은 먹을 만드는 재료이자, 동양의 문화권을 상징하는 정체성이었는데, 이번 작품에는 염원와 바람을 가진 토템의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전시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기다림이다. 작가는 "기다림은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염원하는 것"이라며 "전시를 준비하며 상상력의 한계를 느끼고 절망으로 캄캄했던 순간이 많았다. 전시명인 '기다림'은 결과물이 아니라, 부족함과 아쉬움을 안고 끝까지 버텨낸 마음의 상태"라고 밝혔다.

전시는 작가의 근원으로 향한다. 경북 청도 출신인 그는 "나는 농부의 아들"이라며 "이번 전시는 나의 근원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라고 했다. 작가는 "아버지는 내가 농부가 되기를 원하셨다. 화가가 된다고 하자 평생 일구고 가꾼 땅을 누구에게 물려줄 것인가에 대한 허탈함이 크셨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작가는 고향의 흙을 전시장에 옮겼다. 그 앞에는 작가가 붓질을 하듯 고향 땅에서 빗자루질을 반복하는 퍼포먼스 영상이 상영된다. 지난 6일 열린 간담회에서 그는 "빗자루로 흙을 쓰는 일과 그림 그리는 일은 다르지 않다"며 직접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번 전시는 '보는 전시'에서 '걷는 전시'로의 전환을 시도한다. '화이트'와 '블랙' 공간에서는 관람객이 신발을 벗고 들어가 작품을 마주해야 한다. 화이트 공간에는 흰색 조형물과 비어 있는 종이가 걸렸다. 작가는 "안도 선생님의 공간을 고스란히 잘 살리고 싶었다"며 "그림을 걸기보다는 비워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멀리서 보면 먹의 농담이 번진 회색빛 회화 같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날카로운 금속 파편들이 흰 벽을 촘촘히 메운 작품도 있다. 작가가 3만5000개의 호치키스 알을 하나하나 박아 완성한 드로잉이다.
블랙 공간에는 숯덩어리를 쌓아 올린 조형물과 바닥 드로잉이 이어진다. 그는 "숯 덩어리는 고향 산의 숲과 같다"고 설명했다. 숯을 캔버스에 빼곡히 붙인 '불로부터' 연작 중 가로 길이가 2m60㎝에 달하는 작품도 함께 전시된다. 작가의 회화 연작 '붓질' 16점은 전시장 대신 로비 공간에 걸렸다. 관람객은 '붓질'로 이뤄진 풍경을 산책하듯 걸으며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야외 '무의 공간'에는 10m 높이의 브론즈 조각 6점이 들어섰다. 산세와 건축 높이에 맞춘 배치된 작품은 개별 조형물이 아니라 풍경의 일부처럼 작동한다. 작가는 "보통 조각은 볼륨감을 보지만, 이 작업은 표면을 봐주면 좋겠다"고 밝혔다.
숯 작업의 출발은 1990년 프랑스 파리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난한 무명 화가였던 그는 값싼 숯을 재료로 선택했다. 작가는 "열악한 환경에서 경제적 부담이 컸다. 대학교 입시 때 목탄 데생을 하던 기억이 나 동네 슈퍼마켓에서 바비큐용 숯 한 봉지를 샀다"고 회상했다. 재료비 부담을 덜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숯은 이후 30년 넘게 작업의 핵심 매체가 됐다.
이배는 2018년 프랑스 문화예술 훈장을 받고, 2024년 베네치아비엔날레 공식 병행전을 선보인 바 있다. 국제 적으로 주목받는 작가지만, 그는 자신을 낮췄다. "하면 할수록 예술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부터 내 작업이 안도 선생님의 건축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해 걱정됐다. 농부가 기도하며 땅을 파는 심정으로 이번 전시에 임했다." 전시는 12월 6일까지.
[원주 정유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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