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왕별희(霸王別姬), 우(虞)미인과 헤어지다

기호일보 2026. 4. 7.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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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승용 한국외국어대 중국연구소 초빙연구원
홍문연 유적지에는 해하의 전투에서 애첩 우희가 자결하자 항우가 우희를 안고 비통해하는 장면이 연출돼 있다.
문승용 한국외국어대 중국연구소 초빙연구원
항우(項羽)가 역사 무대에 나오기 전에 일찍이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민란을 일으켜 진나라를 망하는 지경까지 몰아갔지만 결국 진나라를 실제로 망하게 한 이는 항우였다.

항우의 할아버지 항연(項燕)은 초(楚)나라에서 대장군을 지냈다. 항우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삼촌인 항량(項梁) 밑에서 자랐다. 항우는 사내대장부란 자신의 이름 정도만 쓸 줄 알면 된다며 학문을 닦는 데에 게을리했지만 병법만은 열심히 닦았다.

항량이 사람을 죽이고 회계(會稽) 땅으로 달아나 살고 있을 때 마침 그곳으로 행차한 시황제의 성대한 행렬을 본 항우는 "내가 저 녀석을 물리치고 황제 자리에 오를 것이다"라고 큰소리를 쳤다고 할 만큼 항우의 배포는 대단했다.

흔히 항우를 서초패왕(西楚霸王)이라 부른다. 패왕(霸王)은 천하를 제패한 왕이라는 뜻이고 서초(西楚)는 초나라의 서쪽 지방이라는 뜻이다. 유방의 고향인 패(沛) 땅 역시 초나라 지방이라 항우와 구분하기 위해 항우는 '서초'라 하고 유방은 '동초'라 불렀다. 나중에 유방이 사천성(四川省)의 촉한(蜀漢) 땅을 본거지로 항우와 대결을 펼치다 보니 마치 한(漢) 지방이 유방의 출신지인 것처럼 여겨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유방의 고향인 패(沛) 땅은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서주시(徐州市) 풍현(豊縣)이고 항우의 고향인 임해군(臨淮郡) 하상현(下相縣)은 오늘날 강소성 숙천시(宿遷市)로 항우의 고향이 유방의 고향보다 약 100㎞ 정도 더 동쪽에 있는데 어째서 항우를 서초패왕이라고 부르게 됐는지가 논란거리이다.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부하들의 공과에 따라 각각 관직을 내렸으나 유방이 항우에게 반감을 품은 장수들을 모아 반기를 들어 다시 한번 온 나라가 내전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처음에는 항우가 연전연승을 이어갔으면서도 결정적인 승리를 얻어내지 못하다 결국 마지막 해하(垓下)의 결전에서 유방에게 패배함으로써 형세가 완전히 역전돼 항우는 죽고 유방이 한나라를 세워 역사의 주인공으로 나서게 됐다.

처음에는 유방의 군대가 거듭 패하면서도 어렵사리 버티다가 마침내 해하의 마지막 전투에서 항우의 부대를 완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극적으로 유방이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항우에게 거짓으로 화의를 요청했다가 이를 받아들였던 항우를 급습하면서부터였다. 

해하 전투에서 장량의 계략으로 항우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사방[四面]에서 초나라 노래[楚歌]를 불러댔다. 초나라 지방 출신이었던 항우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져 도망가는 병사들이 줄줄이 나오고 순식간에 전세가 유방 쪽으로 기울어졌다.

이때 항우는 최후의 전투를 준비하면서 자신이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었을 만한데 시국이 불리하니 애마 추(騅)가 내닫지 못하네(力拔山兮氣蓋世. 時不利兮騅不逝)"라는 시를 마지막으로 읊조렸다. 이때 우희는 자결하고 항우는 애마를 타고 기병 800명과 함께 포위망을 뚫고 오강(烏江)까지 도망쳤다. 이때 마침 강가에 있던 마을 노인이 항우를 알아보고 빨리 배를 타고 고향 땅으로 피해 갔다가 다음에 기회를 봐 다시 재기하면 될 것이라고 했다.

애초에 항우가 고향에서 8천 명의 무리와 함께 양자강을 건너와 진나라를 물리치고 새 나라를 세우려는 큰 뜻을 펼치려던 참이었다. 이제 와서 유방에게 패해 고향 친구들을 다 잃고 자기 혼자만 살아 고향에 돌아간다면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면서 애마 추를 뱃사공에게 건네주고 쫓아온 유방의 병사들과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죽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실제로 황제에 오르지 못한 항우를 황제들의 기록인 본기(本紀)에서 유방보다도 앞에 실어 황제급으로 대우했다. 이것을 두고 황실을 모욕했다는 죄명으로 궁형을 당했던 사마천이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풀어낸 것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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