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낸 사람, 길로 남다”…‘제주올레’ 개척한 서명숙 이사장 별세

김익태 2026. 4. 7.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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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 제공: 사단법인 제주올레>


제주 길 위의 철학자, 한국의 '걷기 문화'를 바꾼 한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암 투병 끝에 오늘(7일) 오전 향년 68세로 별세했습니다.

■ 길을 낸 사람, 길로 남다
고 서명숙 이사장은 길을 만든 사람이 아니라, 길을 통해 삶의 방식을 바꾼 사람이었습니다. 제주 해안과 오름, 마을 골목을 잇는 ‘제주올레’는 단순한 도보 코스를 넘어 한국 사회에 ‘걷기’라는 새로운 문화와 사유를 심어놓았습니다. 빠름과 경쟁이 모두였던 시대에, 그는 느림과 성찰을 제안했습니다. 그 길 위에서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속도를 되찾았습니다. 그는 제주 서귀포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교육학과를 다니며 <고대신문> 학생기자로 언론인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월간 <마당>, <한국인> 등을 거쳐 1989년 <시사저널> 창간에 참여했고, 여성 최초로 시사 주간지 편집장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어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을 역임하며 22년간 한국 언론의 현장을 누볐습니다. 그는 어느 순간 '기록하는 삶'에서 '살아내는 삶'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심신을 소진한 끝에 고향 제주로 내려온 그는 2006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그 전환의 결과가 바로 제주올레였습니다.

■ ‘걷기’라는 질문을 던지다…437킬로미터의 탄생
2007년 9월 8일 제1코스(시흥리~광치기 해변)를 시작으로 제주올레는 한 걸음씩 길을 넓혀갔습니다. 2012년 11월 24일 제21코스(제주해녀박물관~종달바당)의 개장으로 제주도를 한 바퀴 연결하는 코스를 만들었고, 2022년 6월 4일 추자도에 18-2코스를 개장하면서 총연장 437㎞, 27개의 코스를 갖춘 걷기 브랜드로 완성했습니다. 제주올레는 단순한 관광 상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삶과 여행의 방식을 바꾸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자동차 대신 발로 이동하는 방식, 목적보다 과정에 의미를 두는 태도, 지역과 공존하는 여행. 제주올레는 개발 중심의 관광 패러다임에 균열을 냈고, ‘지속 가능한 여행’이라는 개념을 대중화했습니다. 특히 마을을 통과하는 길 설계는 공동체를 중심에 둔 철학의 표현이었습니다. 여행객은 소비자가 아니라 방문자였고, 길은 통과하는 곳이 아니라 관계의 통로였습니다. 그는 늘 물었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바쁘게 살아야 하는가." 그 질문은 길 위에서 구체화됐습니다.

<제주올레-규슈관광추진기구 업무협약식. 2011년 8월 23일>


■ 제주에서 시작해, 세계로 이어진 길
그의 시선은 제주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2011년 8월 일본 규슈 관광 추진 기구와 업무 제휴 협약을 맺고
제주올레 브랜드를 수출했고, 이를 계기로 규슈올레 4개 코스가 2012년 2월 개장했습니다. 이후 올레길은 미야기와 몽골로 이어지며 길을 매개로 한 국제 교류의 상징으로 확장했습니다. 과거 출륙금지령 속에 '푸른 감옥'의 시기를 겪기도 했던 제주라는 섬은 그를 통해 '닫힌 공간'이 아니라 '연결된 길'로 재해석됐습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2013년 한국인 최초로 사회적 기업가의 최고 영예인 아쇼카 펠로에 선정되기도 했고, 2017년 '국민훈장 동백상'도 받았습니다.

■ 남겨진 길, 그리고 질문
그는 여러 차례 인터뷰에서 "길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삶 또한 그랬습니다. 화려한 수식보다 조용한 실천으로 자신의 철학을 증명했습니다. 오늘도 제주 곳곳의 올레길에는 제주 바다를 상징하는 파란색과 감귤을 상징하는 주황색 리본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 길을 따라 걷고, 누군가는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릅니다. 그 길 위에는 그의 시간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서명숙 이사장은 떠났지만, 그가 낸 길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더 많은 발걸음 속에서 다시 만들어질 겁니다. 그가 남긴 것은 ‘길’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빠르게 소비하고 잊는 시대에, 그는 끝까지 ‘천천히 걷는 삶’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아를 만났고, 서로를 이해했습니다. 그의 부재는 크겠지만, 그가 남긴 길은 우리를 더욱 성찰하게 만들 겁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묻게 됩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길 위에 있습니다.

<시진 제공: 사단법인 제주올레>

고인의 빈소는 서귀포의료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습니다.
영결식은 4월 10일 금요일 오전 9시 제주올레 6코스 서복공원 잔디광장에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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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태 기자 (kit@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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