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배 “동양 문화 알리려 ‘숯’ 작업…예술 여전히 잘 몰라”
뮤지엄 산 최초 국내 작가 기획전
이배 최대 규모 작품 등 39점 전시
“‘농부의 아들’ 정체성…기다림은 ‘염원’”
![이배 작가가 6일 강원 원주시 뮤지엄 산에서 개인전 ‘En attendant: 기다리며’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뉴시스]](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07/ned/20260407110156553xfmj.jpg)
[헤럴드경제(원주)=김현경 기자] “제가 예술가라고 그러는데 사실 하면 할수록 잘 모르겠습니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자신이 없을 때마다 작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했는데, 작가는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 가장 순수해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기다림은 그런 시간과 과정, 저의 마음의 상태에서 나온 제목입니다.”
30여년간 ‘숯’이라는 매체에 천착하며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아 온 이배(70) 작가는 6일 강원 원주시 뮤지엄 산(Museum SAN)에서 열린 개인전 ‘En attendant: 기다리며’ 기자간담회에서 여전히 “예술을 잘 모르겠다”며 겸허한 태도를 보였다.
‘숯의 작가’로 알려진 그는 1989년 프랑스 파리로 가면서 숯으로 작품을 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문화권이 공존하는 곳에서 한국 작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는 가운데, 동양 미술에 대한 서양의 인식이 부족함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그는 “현대 미술 사전에도 동양 미술을 표현하는 단어가 거의 없고, 특히 수묵화나 사군자, 서예는 이해하기 대단히 어려운 대상이었다. 동양 문화권을 이해하지 못하는 서양 사람들에게 내가 가이드 역할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해외 인터뷰에서 누굴 좋아하냐고 물으면 겸재 정선, 추사 김정희를 좋아한다고 말한다”고 했다.
그는 이어 “숯을 오래 붙들고 있어서 지루하게 보일까, 동시대 작가가 되지 못할까 두려움이 있지만 좀 더 새로운 것을 하고 싶은 마음은 아직 많다”고 덧붙였다.
![이배 ‘불로부터(issu du feu)’. [뮤지엄 산]](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07/ned/20260407110156872guzc.jpg)
7일부터 12월 6일까지 개최되는 이번 전시는 이배 작가가 역대 최대 규모의 공간에서 하는 전시이자, 뮤지엄 산이 처음으로 선보이는 국내 작가 기획전이다. 숯을 매개로 한 회화, 조각, 설치 미술, 영상 등 39점의 작품을 통해 자연과 인간, 시간과 존재가 교차하는 관계망을 심층적으로 조망한다.
작품들은 안도 다다오가 건축한 뮤지엄의 전체 공간과 유기적으로 조응하며 제작, 배치됐다. 경상북도 청도에서 작업하는 작가는 1년 반 동안 20번가량 뮤지엄 산을 방문하며 전시장,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작품을 구상했다.
전시 제목인 ‘En attendant: 기다리며’는 단순한 시간의 지연이 아니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 속에서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시간, 어떤 변화가 이루어지기 전, 생성의 작용’을 가리킨다. 작가는 “기다림이 저에게는 수동적 태도가 아니라 어떤 염원이나 아쉬움을 갖고 있는 마음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먼저 뮤지엄 본관 입구에선 높이 8m, 폭 5m, 무게 7톤(t)에 달하는 ‘불로부터(Issu du feu)’가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2023년 뉴욕 록펠러센터에서 선보인 작업의 확장된 형태로, 작가가 지금까지 한 작업 중 가장 큰 작품이다. 숯으로 이뤄진 거대한 기둥은 압도감을 준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4년 전 고성에서 큰 산불이 났는데, 며칠 후 작가들과 그곳에 가게 됐다”며 “내게 숯은 동양 문화와 정체성의 의미가 컸는데, 이번엔 그뿐 아니라 자연 재앙이 다시 오지 않고 회복하길 바라는 염원, 토템 같은 의미도 담았다”고 설명했다.
![이배 ‘붓질(Brushstroke)’. [뮤지엄 산]](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07/ned/20260407110157166dudo.jpg)
청조갤러리 로비의 ‘붓질(Brushstroke)’ 16점은 자연의 빛이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공간에 배치돼, 거대한 붓질로 이뤄진 풍경 속을 직접 산책하는 경험을 제공한다.
청조갤러리 1, 2는 각각 ‘화이트(White)’와 ‘블랙(Black)’의 공간으로 구성된다.
흰색 방은 안도 다다오가 만든 공간을 그대로 살리고 싶어 비워낸 공간이다. “아시아에서도 한국만이 바닥과 벽을 도배하는데, 중성화된 공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지 않은 종이가 벽에 걸려 있거나 만들어지지 않은 재료, 완성되지 않은 조각이 바닥에 놓여 있다”고 작가는 설명했다.
벽에는 스테이플러 3만5000개를 직접 박아서 만든 작품이 있다. “종이만 다 바르고 설치했을 때 공간의 물성이 잘 안 보여서 역동성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물성과 비물성이 만나는 공간으로 만들려 했다”고 부연했다.
검은색 방은 ‘숯’의 방이다. 방 한쪽에 숯덩어리가 쌓여 있고, 바닥에는 숯으로 그린 그림이 자리한다. 작가는 “숯은 자연물이고, 사람의 생각 바깥에 있는 카오스 같은 물성”이라며 “그림을 그린다는 일이 내게 바깥의 세계로 나아가는 하나의 몸짓”이라고 말했다.
![이배 ‘붓질(Brushstroke)’. [뮤지엄 산]](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07/ned/20260407110157436yski.jpg)
청조갤러리 3 ‘비커밍(Becoming)’에선 농부의 아들로 성장한 작가의 정체성을 반영한 영상과 설치 작업을 소개한다. 9m 높이의 스크린에서는 논 위에서 직접 붓질하는 영상이 나오고, 바닥에는 청도에서 가져온 흙으로 논이 구현돼 있다. 흙에서 실제로 성장하는 식물과 영상 속 행위의 공존은 땅, 신체, 시간의 순환적 관계를 드러낸다.
작가는 이날 직접 흙을 쓰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빗자루로 흙을 쓰는 일은 그림을 그리는 일과 그렇게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나의 근원으로 돌아가면서 마음을 쓰는 일”이라고 했다.
마지막 야외 공간에는 약 10m 높이의 브론즈 ‘붓질(Brushstroke)’ 6점이 배치돼 있다. 주변의 나무와 산, 건축과 호응하도록 조각이지만 그림처럼 표면을 보도록 만들었다.
고향의 가마에서 숯을 굽는 데만 한 달을 들이고, 그 숯을 깎고 쌓아 올린 이배 작가의 작품은 그 자체로 ‘기다림’의 체현이다. 여전히 성실한 장인의 작업은 관람객들로 하여금 잠시 멈춰 서서 자신과 시간에 대해 사유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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