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찾은 터카치-너지 “음악은 영적 치료제…음표 사이 ‘영혼’을 깨워라” [인터뷰]

고승희 2026. 4. 7.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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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카치 콰르텟’ 창단 멤버 터카치-너지
베르비에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첫 내한
“한국어는 이미 음악, 언어가 재능 만들어 ”
베르비에 체임버 오케스트라 예술감독 가보르 터카치-너지(Gábor Takács-Nagy) [예술의전당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악보는 편지가 들어있지 않은 빈 봉투예요. 오선지에 놓인 것은 ‘죽은 음표’죠.”

1992년 부다페스트, 가보르 터카치-너지(Gábor Takács-Nagy)는 아버지의 관 앞에 섰다. 장례 전 아버지를 한 번 더 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는 “아버지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며 “제 아버지 같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이유는 아버지를 아버지답게 만들었던 ‘영혼’이 떠나고 없기 때문이었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터카치-너지는 음악의 본질을 직관했다.

“악보는 빈 봉투라는 것, 우리는 연주할 때 음표의 영혼을 되돌리는 사람들이에요. 음악은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말하느냐가 중요하죠.”

30여년이 지나, ‘봉투에 편지를 넣는 일’을 업으로 삼는 그가 한국에 왔다. 베르비에 체임버 오케스트라(VFCO)를 20년째 이끄는 음악감독 가보르 터카치-너지.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 무대를 밟기 위해 서울에 도착한 그는 “믿기 어렵게도 이번이 생애 첫 한국 방문”이라고 했다.

“이상하죠. 저도 이해가 안 됩니다.” 통영국제음악제를 비롯해 한국에서 여러 차례 초청을 받았지만, 번번이 투어 일정에 가로막혔다. 그러는 사이 한국은 클래식 음악의 세계 지도 위에서 지울 수 없는 하나의 점으로 자리하게 됐다.

첫 한국 방문에 한국 언론과의 첫 인터뷰를 위해 헤럴드경제와 만난 터카치-너지는 “한국에 오는 건 오랜 꿈이었다”며 “음악의 중심지인 한국에 이제야 오다니 늦게라도 오는 게 돼서 다행이다. 한국을 정말 사랑한다”고 말했다.

“한국어는 이미 그 자체로 음악입니다”

‘처음’ 만난 한국은 그의 음악 여정이 그려온 지도에 오랜 시간 ‘공간(空間)’이었다. 하지만 낯선 땅은 아니었다. 이미 음악으로 읽고 연결돼, 무수한 이야기가 만들어진 곳이었다.

한국에 도착한 이튿날 아침, 그는 서울의 거리를 빠르게 걸었다. “지휘자는 반쯤은 운동선수”라고 말하는 그는 매일 걸으며 체력을 단련한다. 서울에서도 묵고 있는 호텔 인근의 봉은사에 운동 삼아 다녀왔다. 그는 “아름다웠다”는 선명한 첫인상을 들려줬다.

“한국인들은 아시아의 이탈리아인 같아요.”

그에겐 모든 소리가 음악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어도 하나의 선율로 듣는다. 터카치-너지는 “한국어는 정말 아름다운 언어다. 이미 언어 자체가 음악”이라며 “단조롭지 않은 선율을 가졌다”고 했다. 그는 “감정적이고 에너지를 실어 말하는 한국어의 특징은 음악성으로 연결된다”고 봤다.

사실 그는 미국 뉴욕, 스위스, 영국에서 마스터클래스를 진행하며 수많은 한국 학생을 만났다. 그는 “재능 있는 젊은 세대의 한국 연주자들이 많다. 그 재능은 한국인의 기질과 성격 때문에 갖게 된 것”이라고 했다.

“한국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열려 있고, 열정적이에요. 무대 위에서 좋은 연주자가 되려면 감정적으로 열려 있어야 합니다. 닫혀 있으면 사람을 감동하게 할 수 없어요. 한국어 특유의 음악적 리듬과 열린 기질이 결합해 한국 연주자들은 음표에 생명을 불어넣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줍니다.”

베르비에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예술감독 가보르 터카치-너지(Gábor Takács-Nagy)는 라파우 블레하츠는 “환상적인 피아니스트”라고 극찬하며 “협연은 솔리스트가 공연에 자신의 색깔을 입히는 것이니 제가 그를 따를 것”이라고 했다. [예술의전당 제공]
왜 모차르트와 베토벤인가...“나의 혈액, 나의 뿌리”

한국에서의 ‘출사표’는 모차르트와 베토벤으로 정했다. 선곡의 이유는 분명했다. 그는 “18살 때부터 두 작곡가와 함께 살아왔다”며 “이 음악은 나의 피와 같다”고 했다. 그에겐 뿌리와 같은 곡이다.

무대에선 모차르트의 교향곡 40번 g단조 K.550과 베토벤 교향곡 7번, 피아니스트 라파우 블레하츠와 함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 c단조, Op.37을 연주한다.

블레하츠와는 첫 만남이나 그는 “환상적인 피아니스트”라며 신뢰를 보냈다. 그러면서 “협연은 솔리스트가 공연에 자신의 색깔을 입히는 것이니 제가 그를 따를 것이다. 저도 제 방식으로 그를 고무시키겠지만, 블레하츠가 주도적인 목소리를 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적인 현악 4중주단 ‘터카치 콰르텟’의 창단 멤버인 그에게 이 곡들을 자아와 다름없다. 그는 “우리가 전문가라고 말하진 않겠다. 하지만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방법은 알고 있다”며 “이 음악은 여섯 살부터 백 살까지, 모두의 영혼을 울릴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이고 영적인 언어“라고 했다. 그는 음악을 깊이 공부할수록 ‘위대한 작곡가’들을 향한 시선이 달라진다고 했다.

“어렸을 땐 천재들을 경외의 눈으로 봤지만, 이제는 그들의 인간적 감정이 우리와 같다는 것을 압니다. 음표 뒤에 있는 것은 두려움, 열정, 행복, 슬픔 등 내가 겪는 문제와 내 삶의 이야기죠. 모든 음악가는 배우예요. 우리는 말 대신 음표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의 음악 철학은 올해 교향악축제의 주제인 ‘음의 연결(Connecting the Notes)’과 맞닿는다. 그는 “모든 음표는 형제이고 자매다. 하나하나가 살아있어야 하고, 연결돼야 한다”며 “죽어있는 음표에 숨결을 불어 넣어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영혼을 되살리는 것”이라고 했다.

음악은 오선지 위에 적힌 수많은 음표를 이어 이야기를 만들고, 축제는 음표를 통해 국경을 넘어 음악을 잇는다.

“중요한 것은 음표 하나가 아니라 음표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에요. 음표와 음표를 연결하는 것은 문화와 문화,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 하는 거죠. 정말 아름다워요.”

콰르텟의 전설에서 포디움의 거장으로…나를 살린 지휘

1975년, 전설은 시작됐다. 고작 19세에 콰르텟 창단을 주도한 터카치-너지는 젊고 재능 있고 빛나는 바이올리니스트였다. 하지만, 절정의 순간 시련은 찾아왔다. 손의 문제로 더 이상 활을 잡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연주를 그만두어야 했을 때, 지휘가 저를 살렸어요. 전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아직 무대에 서고 있으니까요.“

베르비에 체임버 오케스트라 [예술의전당 제공]

17년간 제1바이올린으로 지켰던 콰르텟을 뒤로하고, 그는 2002년부터 지휘자로 제2의 음악 인생을 시작했다. 장장 10년간 씨름했지만, 손의 문제는 여전해 지휘봉을 잡진 않는다. 대신 왼손으로 단원들과 선호한다. 터카치 콰르텟은 지금도 새로운 멤버들과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도 그중 한 명이다.

지휘는 그에게 ‘직업적 전환’을 넘어 음악을 향한 열망을 분출할 ‘새로운 통로’였다. 그는 민주적 악단을 선도한다. 그는 “내가 지휘하고 있지만, 단원 누구도 나의 노예가 아니다”며 “ 모두가 자유로운 존재”라고 강조한다.

“전 항상 ‘듣는(Hearing) 것이 아니라 경청(Listening)하라’고 배웠어요. 방향을 제시하되 연주자들이 서로를 들으며 팀 정신으로 하나가 되는 것, 그러면서도 각자의 개성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실내악의 방식이고 제가 만드는 음악입니다.”

화려한 축제 그 이상의 가치…임윤찬, 손민수가 서게 된 이유

그가 이끄는 VFCO는 스위스 베르비에 페스티벌의 자부심이다. 그는 베르비에 페스티벌의 강점을 ‘교육’에서 찾았다. 주니어(14~18세)에서 유스 오케스트라인 베르비에 페스티벌 오케스트라(18~25세), 프로 그룹인 체임버 오케스트라로 이어지는 ‘세대 성장’ 시스템은 이 축제의 본질이다. 화려한 공연을 나열하는 축제가 아니라, 음악적 유산을 다음 세대에게 전수하는 초대형 아카데미인 것이다.

체임버 오케스트라는 매년 지원자만 해도 60~70명이나 된다. 터카치-너지는 “그야말로 최고 중의 최고만 선발한다”고 했다. 특히 체임버 오케스트라는 반드시 베르비에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거쳐야 들어올 수 있다. 물론 예외는 있지만, 99%가 베르비에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출신으로 현재 미국, 유럽의 악단에서 활동하는 프로 연주자들이다. 터카치-너지는 “그들이 모여 드림팀을 이룬 곳이 바로 체임버 오케스트라”라며 “베르비에 페스티벌의 강점은 위대한 음악가들의 공연뿐 아니라 젊은 세대를 교육해 미래와 연결하는 것”이라고 했다.

올해엔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그의 스승 손민수가 한 무대에 선다. ‘교육의 가치’를 품은 베르비에 페스티벌의 가장 상징적 무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스승과 제자가 세계적인 축제 무대에 나란히 서서 음악적 유대감을 나누는 것, 그것이 바로 터카치-너지가 강조하는 ‘연결’의 실체다.

그는 “임윤찬과 같은 한국의 연주자들은 기술이 탁월한 것은 물론, 악보의 음표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라며 “음악이 영혼의 언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성공하는 것”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음악은 때로 백 마디의 말보다 강력한 치유의 힘을 발휘한다. 음표와 음표 사이, 그 보이지 않는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그에게 음악은 인류의 영혼을 돌보는 수단이다.

“목표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거예요. 음악은 영적인 치유제예요. 더 많은 사람이 클래식을 들으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 나아질 거예요. 모두가 문제를 안고 있지만, 공연하는 동안만큼은 삶이 나아지도록 하는 것이 저의 철학이에요. 그러니 음악가들은 영혼의 의사여야만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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