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어머니의 주근깨’를 찾아 한국에 왔나 [안녕 진화위㉕]
3기 1호 신청자 마릿 킴, 해외입양인 2세의 알 권리를 말하다

‘안녕’은 작별이자 환영의 인사다.
5년간 과거사 조사기구로 활동해온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또는 진화위)가 지난해 11월26일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2월26일 제3기 진실화해위가 출범했다. 2기를 돌아보고 3기를 바라보며 시작된 ‘안녕 진화위’는 그동안 조명되지 못한 얼굴과 목소리를 찾아 나서는 부정기 연재물이다. 과거사 조사와 규명에 진심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와 함께 3기 여정의 의지와 기대를 담는다. 굿바이 진화위! 헬로 진화위!!
3기 진실화해위 출범 첫날인 지난 2월26일, 네덜란드 국적의 해외입양인 2세 마릿 킴(31, 김여름)씨는 진실화해위가 입주한 서울 중구 남산스퀘어빌딩 앞 인도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해외입양 피해자 311명을 대표해 진실화해위 5층 민원실에서 진실규명 신청서를 접수하고 나온 길이었다. 3기 진화위에 제1호로 제출된 진실규명 신청이었다.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모인 집회에 참석해 발언 기회를 얻은 그는 3살 때 바다를 건너온 어머니의 상처와 슬픔에 관해 말했다. 생일을 기일로 삼은 어머니의 선택에 관해 말했다. 어머니의 입양기록을 둘러싼 부조리에 관해 말했다. 2세인 자신의 알 권리에 대해 말했다. 그의 발언문은 격정적이었고 문학적이었다.(전문 참조)
그로부터 한 달 뒤인 3월30일 오후,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마릿 킴씨를 다시 만났다. 그의 사연을 더 자세히 듣고 싶었다. 2023년 재외동포에게 발급되는 에프(F)4 비자로 한국에 들어와 어머니의 숨겨진 진실을 찾기 위해 4년째 백방으로 뛰었다. 지금은 회고록 집필에 속도를 내고 있다고 했다. ‘주근깨의 흔적’이라는 가제목을 붙인 회고록에는 ‘혼혈인’으로서 느끼는 문화의 차이, 한국에서의 경험, 입양인 2세로서의 정체성 등 폭넓은 이야기가 담긴다고 한다. 그가 썼다는 시 ‘주근깨의 흔적, 어머니의 어머니에게로’의 한 구절을 빌리면, “따스한 갈색 팔레트에서 조심스레 찍어올린 점들처럼, 밝고 투명하게 빛났다”는 주근깨의 뿌리는 바로 어머니 김지미(1970년생)다.

어머니는 1살 때 보육원(고아원)에 맡겨진 뒤 3살 때인 1973년 네덜란드 북부 프리슬라트주의 드라흐텐이라는 시골 마을 가정에 입양됐다. 양부모의 사랑을 받았으나 반복적으로 인종차별을 겪었고 여러 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우울증과 싸웠다. 결국 2008년 2월16일, 생일로 추정된다고 알던 그 날에 두 자매를 남겨두고 세상을 등졌다. 마릿 킴씨는 한국에 온 뒤 그날이 ‘추정일’이 아닌 실제 생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보육원에 기록된 어머니의 정보는 입양기관인 한국사회봉사회(KSS)로 가면서 상당 부분 삭제돼 있었다. 마릿 킴씨는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진실화해위가 꼭 밝혀주길 바란다고 했다.
마릿 킴씨 본업은 생명과학 분야 연구자다. 전공을 살려 대구와 서울의 직장에서 연구원으로 일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프리랜서다. 현재 미국의 보스턴 칼리지와 네덜란드 입양전문센터에서 각각 입양인의 한국문화 전승 연구작업과 입양인 2세를 위한 정보 투명성에 관해 자문하는 일을 맡고 있다.
마릿 킴씨가 인터뷰에서 가장 강조한 말은 ‘정보 투명성’이었다. 자신에게는 인생이 걸린 문제인데, 정보에 접근할 수 없어 답답하다고 했다. 아동권리보장원(NCRC)이 친할머니의 사망 여부를 확인해주지 않고 있으며 본인의 유전자 검사 요구를 ‘2세라는 이유’로 불허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나의 타고난 의료정보를 알고 싶다. 모든 입양인과 입양인 2세의 염원”이라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3기 진실화해위 출범 첫날, 해외입양 피해자를 대표해 ‘1호 접수’를 하셨어요. 그날의 소감은 어땠나요.
“네덜란드로 입양된 제 친구들이 2기 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해 피해자로 인정받는 것을 보며 ‘나도 어머니 사례를 제출해야 할까' 고민하게 됐어요.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어머니가 직접 인정을 받거나 상처를 치유할 수도 없으니까요. 그래도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저와 가족의 치유를 위해 이 일을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어요.
2월26일 신청서를 접수하던 날, 감정이 벅차올랐어요. 그날 모인 많은 분처럼 저도 전날 밤 거의 잠을 못 이뤘어요. 해외입양 피해자분들이 저를 믿고 신청서 제출을 맡겨주셔서 깊은 영광을 느꼈습니다. 서류를 전달하는 순간 매우 숙연해졌어요. 그것은 단순히 종이 상자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상자 하나를 들어 올릴 때 어떤 기자분이 ‘무거울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하셨어요. 저는 그분께 미소를 지으며 ‘저는 강해서 괜찮다’고 말했어요. 입양인들이 겪은 일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무거워지지만, 함께 짊어질 수 있기에 우리는 강합니다.”

― 어머니는 생전에 어떤 분이셨나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저희는 너무 어렸습니다. 그래서 한 인격체로서 어머니를 깊이 알 기회는 없었고, 저에게는 그저 '우리 엄마'일 뿐이었습니다. 아이로서 제가 경험한 어머니는 그 어떤 아이라도 바랄 법한 가장 다정하고, 따뜻하며, 재미있는 분이셨습니다. 저희 남매는 어머니 삶의 전부였고, 어머니는 저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셨을 분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통해 어머니의 성격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모두에게 매우 친절했고,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자신의 일처럼 발 벗고 나섰으며, 창의적인 분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불의를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내는 성격이었는데, 저의 그런 면은 아마 어머니를 닮은 것 같습니다.”
― 어머니의 우울증은 해외입양으로 비롯됐을까요?
“자신이 존재하게 된 시작점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는 것은 삶의 뿌리를 약하게 만듭니다. 생애 첫 4년 동안 ‘조건 없는 사랑’ 없이 자라는 것은 삶의 기반에 구멍을 내는 일입니다. 어머니도, 저도 ‘나는 충분히 좋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강한 자기 불신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는 인간관계(애착 형성), 직장 생활, 일상 전반에 영향을 끼칩니다. 저는 이것을 인지하고 극복하려 노력 중이지만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게다가 어머니는 수많은 인종차별을 겪었고, 그것 역시 심각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 어머니가 한국말을 쓴 적이 있나요?
“어머니는 1991년 한국을 처음 방문했는데, 그게 마지막이기도 했어요. 와이엠시에이(YMCA)에서 주최한 해외입양인 고국 방문행사였습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이었죠. 어머니는 ‘고몹습니다’(고맙습니다) 정도의 간단한 한국말만 알고 계셨어요.”
― 어머니는 자신이 먼 나라에서 길러지게 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 주었나요?
“당신의 양어머니(저의 외할머니)가 설명해 준 방식 그대로 말씀했어요. 한국의 할머니가 형편이 어려워 사랑하는 딸에게 더 나은 기회를 주고자 눈물을 머금고 거리로 보냈고, 경찰에 의해 발견됐다는 거였습니다. 이것이 입양 부모님이 들었고, 어머니가 믿었으며, 제가 아는 유일한 이야기였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친어머니에 대해 애정을 담아 말씀했고, 그분이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어머니는 양부모님과 한국에 대해 언제든 대화할 수 있었어요. 양부모님은 어머니가 원하면 친가족을 찾아도 괜찮다고 늘 말씀하셨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저와 제 동생도 한동안 양조부모님과 함께 살았는데, 두 분은 저희를 큰 사랑으로 돌봤습니다. 제가 한국의 친조부모님을 찾는 과정도 적극적으로 지지해 줬습니다.”

― 한국에서 어머니의 부모님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요?
“한국사회봉사회에서 어머니의 숨겨진 기록을 공유해줬어요. 그곳에는 친할아버지의 이름과 주소 두 곳이 적혀 있었지만,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저에게 직접 정보를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머니가 있었던 광주의 보육원을 찾아갔고, 그곳 아카이브를 관리하시는 분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분이 직접 수소문해 준 결과, 친할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대신 친할아버지의 사촌을 찾아 10분 정도 만났지요. 그분은 어머니가 태어나 보육원에 가기 전 1년 정도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을 보여주었습니다. 친할머니는 가족을 떠났고, 친할아버지는 큰할아버지의 압박으로 어머니를 보육원에 맡기게 됐다고 합니다. 친할머니에 대해서는 아무 정보가 없습니다. 어머니에게 배다른 형제들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들을 찾을 수 없었고요. 아마 그들도 제 어머니 존재를 모를 겁니다.”

― 진실화해위 조사를 통해 가장 풀고 싶은 의문은 무엇일까요?
“진실규명 요청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는 어머니의 입양입니다. 이전에는 어머니가 1살 무렵 버려진 채 발견되었고, 부모는 알 수 없으며, 이름은 보육원에서 지어주었고 생일은 추정된 날짜로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2월16일인 본인 생일이 김정일과 같다는 것을 알고, 김정일을 좋아했던 누군가가 이 생일을 주었거나 자신이 북한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입양인들이 대개 그렇듯 출생지가 서울로 기재돼 있었기에 광주 출신이라는 사실도 몰랐어요. 그래서 북한 관련 가설도 어머니에겐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광주 보육원에서 나온 서류에는 어머니가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정보들이 담겨 있었어요. 이름은 친부모님이 지어주신 것이고, 생일도 정확했으며, 광주의 집 주소 두 곳과 친아버지의 이름, 직업, 그리고 어머니를 보육원에 맡긴 이유까지 적혀 있었습니다. 이 모든 정보는 당연히 어머니의 것이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해외 입양에 더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이 정보들은 새 입양 서류로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고아'가 되었고, 그 덕분에 해외로 보내는 데 친부모 동의를 구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왜 어머니의 정보가 박탈되어야 했는지, 왜 이전 기록이 말소되었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고 싶습니다. 이 정보를 알지 못했다는 사실은 어머니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어요. 왜 생일조차 ‘추정'이라고 기재했는지, 왜 있는 그대로 ‘확인됨'으로 표시할 수 없었는지 의문입니다. 한 줄이라도 제대로 된 정보를 기재하는 수고가 그렇게 어려웠을까요? 그러니까 저의 가장 큰 의문은 이겁니다. 왜 어머니의 기록은 삭제돼야 했는가.
두번째 의문은 한국사회봉사회와 아동권리보장원의 입양 사후 서비스, 그리고 이 기관들이 입양인 및 친생가족(DoKAD)과 소통하는 방식에 대해서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진실화해위의 조사가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이들은 사후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매우 일관성 없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마땅히 입양인과 친생가족의 소유여야 할 정보들을 이들이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입양인을 위한 사후 서비스의 문제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면….
“어머니의 입양을 중개한 한국사회봉사회와 아동정책을 수행하는 아동권리보장원은 해외 입양인 자녀들에게 사후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있어 매우 일관성 없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저는 다행히도 양할머니를 통해 어머니의 입양사실확인서 등 자료를 받았어요. 저와 같은 상황에 놓인 또 다른 해외 입양인 2세도 양할머니를 통해 사후 서비스를 요청했는데,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요청을 거부했어요. 저와 조건이 동일했는데도요. 가족에 대한 정보를 요청하는 일이 운에 좌우되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아동권리보장원에 유전자 검사를 요청했지만, 그들은 제가 아동권리법상 ‘실종 아동'이나 그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머니들이 가족을 찾도록 돕기 위해 존재하는 곳 아닌가요? 저 또한 그들의 가족 아닌가요?
이후 저는 엠비시(MBC) 인터뷰를 통해 제 사연을 전했는데, 아동권리보장원은 제가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는 공식 발표를 했습니다. 도움을 거절한 게 아니라 제가 자격이 안 됐을 뿐이라는 논리였습니다. 그들은 저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하지도 않았습니다. 왜 저에게 직접 연락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제야 이메일 주소를 다시 요구했습니다. 이는 저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가족을 찾으면 언제든 저에게 연락해야 할 기관이, 제 이메일 주소조차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이미 이메일 주소는 제출한 상태였는데도요. 친가족의 이름은 알려줄 수 없다면서, 정작 제 이름은 자기들 플랫폼에 마음대로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이 모순적입니다.”

― 회고록을 집필 중이라고 하셨는데, 꼭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입양은 동화가 아닙니다. 입양인에게 깊은 영향을 끼치며, 다음 세대에게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가 많은 것을 극복해낼 수 있다는 살아있는 증거로서 제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어요. 회복 탄력성을 갖고, 공포와 분노보다는 언제나 사랑과 친절을 선택하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습니다.
책의 가제목은 ‘주근깨의 흔적’입니다. 어머니는 눈 주위에 선명한 주근깨가 있었어요. 저의 주근깨는 희미한 편입니다. 한국에서는 주근깨를 안 좋게 생각해서 레이저 시술로 지우기도 하고 화장품으로 가리기도 한다고 들었어요. 저도 한국 화장품을 썼더니 지워지는 느낌이라 서운해요. 네덜란드에서 저는 주근깨를 특별한 흔적으로 많이 자랑했어요. 주근깨가 제 뿌리처럼 느껴지거든요. 어머니의 어머니에게도 주근깨가 있었는지 궁금해요. 회고록은 네덜란드어로 쓰는데, 영어와 한국어로도 번역할 계획입니다.”
― 지금 어머니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으세요?
“어머니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나의 뿌리를 찾기 위해 열심히 하고 있다고 말하겠어요.”

― 해외입양과 관련해 어떤 구조적 문제가 있었다고 보시는지요.
“해외 입양은 주로 전쟁고아 때문이라는 서사로 이야기되지만, 그렇다면 왜 해외입양의 정점이 한국이 경제 성장을 이루던 1980년대였는지 질문을 던져봐야 합니다. 그 아기들은 고아라는 이유로 보내졌지만, 상당수가 고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과연 아이들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한국은 70년 동안 해외 입양을 보내온 끝에 지난해 10월에야 비로소 헤이그 국제아동입양협약의 공식 당사국이 됐습니다. 얼마 전 뉴스에서 울산의 한 한부모 아버지가 네 자녀를 죽이고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한국 정부는 한부모들에게 더 많은 지원을 해야 합니다. 한국 사회에는 순혈주의에 대한 강한 집착이 있고, 미혼모와 미혼부에 대해 낙인을 찍습니다. 오늘날에도 아이를 유기한 어머니들을 비난하고 수치스럽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 어떤 어머니도 엄청난 고통과 절망 속에서 다른 해결책이 없는 상황이 아니고서야 아이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마릿 킴씨의 2월26일 집회 발언 전문(국가폭력 피해자 단체 공동 신청 및 입장 발표 기자회견)
오늘 저는 1973년에 네덜란드로 입양된 어머니 김지미 대신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생전에 말할 기회를 얻지 못했던 그 말을 대신 전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3기 진실화해위(TRC3)에 어머니의 사건을 제출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삶의 기록이 대한민국 정부의 관리·감독하에 지워졌기 때문입니다. 우연히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아이를 위한 배려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지워진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평생 자신이 길에서 버려졌다고 믿으며 살아왔습니다. 이름도 없고, 정확한 생년월일도 없으며, 친부모도 모른 채 말입니다. 역사도 없고, 자신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조차 없다고 믿었습니다.
세 살쯤 되었을 것이라 추정되는 나이에 어머니는 네덜란드로 보내졌고, 사랑이 가득한 따뜻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이 점은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머니는 양가족으로부터 깊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사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입양은 사랑으로 시작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입양은 상실로 시작됩니다. 가족의 상실, 문화의 상실, 정체성의 상실. 그리고 제 어머니의 경우에는, 진실의 상실이었습니다.
입양은 어머니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와 동시에 어머니는 네덜란드에서 성장하며 반복적인 인종차별을 겪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외모가 다르다는 이유로 거리에서 욕설을 들었습니다. 저는 학교 운동장에서 다른 아이의 어머니에게 어머니가 맞았던 장면을 기억합니다. 의사들이 어머니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의 좌절도 기억합니다. 그리고 나중에야 저는, 어머니가 아는 사람부터 칼로 위협하던 낯선 사람에 이르기까지 여러 남성에게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이러한 트라우마를 안고 평생 우울증과 싸워왔습니다. 그리고 38번째 생일에, 어머니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때 저는 열세 살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생일을 죽음의 날로 선택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어머니가 이미 상실의 고통에 너무 익숙해져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족은 의료 과실로 인해 어린 나이에 남동생을 잃었습니다. 그 이후 우리는 매년 동생의 부재를 되새기게 하는 두 개의 고통스러운 날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의 생일과 그가 세상을 떠난 날입니다. 어머니는 자녀들이 그런 고통을 두 번씩 겪게 하고 싶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지막 날을 자신의 생일과 겹치게 하여, 우리에게 남겨질 슬픔의 날을 단 하루로 남기기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유서에서 어머니는, 추정된 자신의 생년월일이 이제는 확정된 사망일이 되었다고 썼습니다. 저는 그 의미를 아주 최근에서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날이 생일이라는 사실은 어머니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 날짜는 언제나 ‘추정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입양이 어머니의 자아 정체성을 얼마나 깊이 지워버렸는지를 보여줍니다. 태어난 날조차도 어머니의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 어머니는 혼자가 아닙니다. 연구에 따르면 입양인은 자살로 사망할 가능성이 네 배 더 높습니다. 이는 제 어머니의 고통이 개인적인 비극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년 전, 저는 어머니의 숨겨진 입양 기록을 받았습니다. 그 안에는 모든 정보가 있었습니다. 친부모가 지어준 이름, 친부의 이름, 광주에 있던 두 개의 주소. 그리고 어머니의 생일은 ‘추정’이 아닌, 확인된 날짜였습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어머니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 권리가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평생 알 수 없다고 믿었던 모든 것은 이미 기록되어 있었고, 다만 어머니에게 숨겨져 있었을 뿐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특권이 아닙니다. 그것은 권리입니다. 어머니는 그 권리를 가졌지만, 그 권리는 박탈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머니의 사건을 제출했습니다. 단순히 그녀가 겪은 일 때문이 아닙니다. 그 일이 그녀만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저는 여러 위탁가정을 전전했고,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우울증과 싸워야 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삶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살아가고 있지 않았고, 그저 버티고 있었으며, 제 삶을 끝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음 세대로 전달됩니다. 부모의 고통은 자녀에게 전해질 수 있습니다.
20만명 가까운 한국 아이들이 해외로 입양되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부모가 되었고, 그로 인해 저와 같은 수만 명의 해외입양인 2세가 태어났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이 부모의 입양 경험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입양인이 사망한 경우에도 한국 입양인의 자녀들은 부모의 입양 기록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이는 가족의 역사가 그들과 함께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입양인이 진실을 박탈당하면, 그 침묵은 자녀에게 상속됩니다.
저는 이 침묵을 깨고 싶습니다. 그리고 변화를 요구합니다. 한국 입양인의 후손들 역시 진실에 접근할 권리가 있습니다. 입양은 어머니가 네덜란드에 도착했을 때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제 삶으로 이어졌습니다. 저는 입양의 결과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이 자리에 서서 분노하지 않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분노가 증오를 낳는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증오는 어머니를 위해 정의만을 쫓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진실은 이것입니다. 어머니를 위한 정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고통은 되돌릴 수 없고, 저는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정의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분노가 아니라, 사랑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어머니를 향한 사랑으로. 어머니에게 가해진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어머니에게서 빼앗긴 것에 대한 인정과 책임을 요구하기 위해. 그리고 입양이 한 사람의 삶만이 아니라, 그 주변의 사람들, 그리고 다음 세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남겨진 사람들, 즉 저와 제 가족이 치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입양으로 인한 고통은 입양인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겁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중 일부, 다음 세대가 그 고통을 함께 나누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빼앗기고 침묵 속에 묻힌 것을 회복하고, 피해자들의 인권을 회복하기 위한 정의를 요구하며, 다시는 어떤 가족의 역사도 지워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함께 치유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김지미를 위해
김지미의 딸 마릿 킴 반 더 스타이(Marrit Kim van der Staai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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