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등록 이주민이란 이유로 병원비 폭탄 청구···“병보다 차별이 더 무서웠다”[미등록 이주민 의료공백①]

김태희 기자 2026. 4. 7. 06:0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24일 경기 수원역 인근의 한 카페에서 로키(왼쪽)가 이날 통역을 담당한 섹알마문 이주노조 부위원장(오른쪽)에게 지난 3월 있었던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공감직업환경의학센터 제공

“병원비가 5100만 원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지난달 24일 경기 수원역 인근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방글라데시 국적 이주노동자 로키(가명·40대)는 “병에 걸렸다는 사실보다 감당할 수 없는 병원비가 더 무서웠다”고 말했다.

그는 2016년 당시 방글라데시 독재정권 밑에서 더는 생계를 꾸리기 어려워지자 한국으로 홀로 도망쳐 온 뒤 난민신청을 했다. 난민신청자(G-1비자)는 원칙적으로 취업을 할 수 없다. 신분은 늘 불안했다. 먹고 살기위해 지난 10년간 전국의 일용직과 단기 일자리를 찾아 떠돌았다.

그래도 고국에 남은 가족들은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최소한의 먹고살 돈을 제외하고, 번 돈의 대부분을 본국에 송금했다. “불규칙한 생활에 당뇨병까지 얻었지만, 병원에 가서 제대로 된 검진 한 번 받아본 적 없다”고 했다.

로키는 지난달 난민 신청이 최종적으로 거부당해 결국 ‘미등록 이주민’이 됐다. 불행이 겹쳐 비슷한 시기 그는 극심한 통증과 함께 쓰러졌고, 급성심근경색 판정을 받았다. 로키는 “의사의 말로는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죽을 수 있다고 했다. 지인들의 도움으로 급하게 수술을 했다”고 말했다.

수술 이후 그는 다시 한번 청천벽력을 마주했다. 그에게 청구된 병원비는 총 5100여만 원에 달했다. 비용을 내지 못해 퇴원도 못하는 처지가 됐다. 로키의 딱한 사정을 들은 방글라데시 이주민들이 십시일반 모은 1400여만 원을 병원비로 냈다. 다른 지인들이 보증을 선 다음에야 퇴원할 수 있었다. 퇴원 이후에도 매일같이 독촉전화에 시달렸다.

로키는 미등록 이주민 병원비 지원 사업을 하는 ‘공감직업환경의학센터’를 통해 남은 병원비를 내고서야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에게 5000만원이 넘는 병원비가 청구된 이유는 병원 측이 ‘국제수가’를 적용했기 때문이다. 국제수가는 의료관광을 목적으로 입국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병원이 영리목적을 위해 부과하는 일종의 특별수가다. 비용이 일반 국민에게 적용되는 ‘건강보험수가(건보수가)’ 대비 3~4배에 이른다.

국제수가 적용 대상에서 ‘출입국 관리법에 따라 등록한 외국인’, ‘국내 거소 신고를 한 외국 국적 동포’는 제외된다. 하지만, 미등록 이주민은 별다른 규정이 없어 이들에게 국제수가를 적용해도 현행법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 로키는 “이런 일을 겪고 나니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대한민국이 최소한의 건강권이라도 보장되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인권단체 등은 미등록 이주민들에게도 기본권에 해당하는 최소한의 의료권은 보장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공감직업환경의학센터 관계자는 “건보수가 적용이 어렵다면 미등록 이주민에게 국제수가 대신 일반수가(1.5~2배)를 적용해도 된다”며 “그럼에도 병원들이 법적인 문제가 없다는 이유에서 국제수가를 적용하는 사례가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가장 취약한 미등록 이주민들이 병원 수익을 내기 위해 착취당하는 구조적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 관계자는 “국제수가 문제 외에도 병원비를 내지 못한다면 여권이나 휴대전화를 빼앗는다든지, 감금시킨다든지 하는 인권 침해 사례들도 벌어지고 있다”라며 “가장 기본적인 권리라고 할 수 있는 의료에 관해서는 안전하게 진료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라고 했다.

미등록 이주민들의 의료권을 보장하는 문제가 단지 인도적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다. 법무부가 집계한 2024년 기준 국내 미등록 이주민 수는 39만7522명. 실제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 농가, 건설현장 등은 미등록 이주민들이 없으면 운영이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노동력을 이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2021년 <농업 고용환경 변화에 따른 외국인근로자 활용 정책 방안> 보고서에서 외국인 인력을 고용하는 채소·과수 등 작물재배 농가에서 미등록 이주민이 차지하는 비중이 91.9%, 축산농가는 44.2%에 이른다고 밝혔다. 미등록 이주민들의 ‘건강’이 곧 우리 농촌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는 의미다. 농번기에 미등록 이주민을 서로 고용하기 위해 농촌에서는 ‘쟁탈전’마저 벌어진다. 농민들은 “농번기만이라도 미등록 이주민 단속을 멈춰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은 지난해 12월 <건설현장 의 외국인 근로자 활용실태 및 개선방향> 보고서에서 국내 건설현장 내 미등록 이주민(밀입국 포함)이 11만~16만여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합법적으로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산업연수생은 1003명 뿐이었다. 이들이 없다면 건설현장이 멈춰서는건 시간문제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 등으로 노동력 부족 문제를 겪고 있는 스페인의 경우 올해 초 50만명에 달하는 미등록 이주민에게 아예 ‘합법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주민들이 신청해서 승인되면 최초 1년짜리 거주 허가를 받고, 이후 갱신을 통해 체류를 연장할 수 있는 방식이다.

스페인 역시 농업·관광·서비스·돌봄산업 등에서 이주 노동자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미등록 이주민이라고 할지라도 ‘경제에 필수적인 존재’로 인식됐고,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자 합법화에 나선 것이다.

정부가 미등록 이주민의 건강권 보장에 완전히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보건복지부는 ‘외국인 근로자 등 의료비 지원사업’을 통해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해서도 의료비를 지원할 수 있는 길을 열어뒀다.

하지만 정작 미등록 이주민들은 “제도를 제대로 이용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지원을 받기 위해 ‘근로사실확인서 제출’을 요구하는 것부터가 큰 장애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일부 대안 경로가 있긴해도 실제 의료 현장에선 이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안내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업 참여 의료기관도 전국 111곳에 그쳐 접근성이 낮다는 지적도 있다.

복지부 관계자는 “규정상 의료비 지원사업에 해당하지 않는 외국인의 경우 의료기관에서 자체적으로 비용을 설정하도록 할 수 밖에 없다”며 “근로사실확인과 관련해선 확인서가 없어도 계좌이체 이력, 카톡 내용 등을 폭넓게 인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태희 기자 kth08@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