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갈아 엎는 달”… ‘저항시’ 주창한 시인 신동엽

이한수 기자 2026. 4. 7.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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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1969년 4월 7일 39세
시인 신동엽.

시인 신동엽(1930~1969)은 29세 때인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뽑히며 등단했다. 당선작 없는 가작이었다. 석림(石林)이란 필명을 썼다.

“당신의 입술에선 쓰디쓴 풀맛이 샘솟더군요. 잊지 못하겠어요. 몸냥은 단 먹뱀처럼 애절하구 참 즐거웠어요. 여름날이었죠. 꽃이 핀 고원을 난 지나고 있었어요. 무성한 풀섶에서 소와 노닐다가, 당신은 꽃으로 날 불렀죠.(…)”(1959년 1월 3일 자 석간 3면)

신동엽 1959년 신춘문예 시 가작. 1959년 1월 3일자 6면.

두 달 후 본명 신동엽으로 시 ‘진달래 산천’을 조선일보에 실었다. 신춘문예 작품과 마찬가지로 역사성과 서사적 요소가 강한 시였다.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꽃 펴 있고/바위 모서리엔/이름 모를 나비 하나/머물고 있었어요//잔디밭엔 장총을 버려 던진 채/당신은/잠이 들었죠//햇빛 맑은 그 옛날/후 고구렷적 장수들이/의형제를 묻던/거기가 바로/그 바위라 하더군요.(…)”(1959년 3월 24일 자 석간 4면)

1959년 3월 24일자 4면.

신동엽은 이후 조선일보에 시 ‘그 가을’(1960년 10월 17일)에 이어 자신의 시론(詩論)을 2회에 걸쳐 연재했다. ‘60년대의 시단 분포도’라는 제목의 시론은 ‘‘신(新) 항저시(抗抵詩)’ 운동의 가능성을 전망하며’라는 부제를 달았다. 신동엽은 ‘저항(抵抗)’이 아니라 ‘항저(抗抵)’라는 표현을 썼다. 저항에도 저항한다는 느낌을 준다.

신동엽은 이 시론에서 1960년대 시단을 5개 유파로 분류했다. ① 향토시의 촌락 ② 현대 감각파 ③ 언어 세공파 ④ 시민 시인 ⑤ 항저파(抗抵派) 다섯이다. 신동엽은 항저파를 시의 본령인 것처럼 주장하면서 당대 시단을 비판하며 글을 맺었다.

1961년 3월 30일자 4면.

“오늘의 시인들은 정치는 정치전문기능자에게, 종교는 종교 전문인 목사에게, 사상은 직업교수에게 위임해 버리고 자기들은 단어 상자나 쏟아놓고 원고지 앞에 앉아 안이한 삼류 서정쯤 노닥거리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민중 속에서 흙탕물을 마시고 민중 속에서 서러움을 숨쉬고 민중 속에서 민중의 정열과 지성을 직조 구제할 수 있는 민족의 예언자 백성의 시인이 정치뿌로커 경제농간자 부패문화배타자들에 대신하여 조국 심성의 본질적 전열에 나서 차근차근한 발언을 해야할 시기가 이미 오래전에 우리 앞에 익어 있었던 것이다.”(1961년 3월 31일 자 석간 4면)

1966년 4월 3일자 3면.

4·19 후 6년 지난 1966년 ‘4월은 갈아엎는 달’이라는 시를 조선일보에 실었다.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라고 외친 대표작 ‘껍데기는 가라’ 발표 1년 전이었다.

“(…) 미치고 싶었다/사월이 오면/ 산천은 껍질을 찢고/ 속잎은 돋아나는데,/ 사월이 오면/ 내 가슴에도 속잎은 돋아나고 있는데,// 우리네 조국에도 어느 머언 심저(心底), 분명/ 새로운 속잎은 돋아오고 있는데,// 미치고 싶었다./ 사월이 오면 /곰나루서 피 터진 동학의 함성,/ 광화문서 목 터진 사월의 승리여.//(…)”(1966년 4월 3일자 3면)

신동엽은 시를 바탕으로 한 연극 ‘시극(詩劇)’을 개척하며 활동 영역을 넓혔다.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1966), 창작 오페라타 ‘석가탑’(1968) 대본을 썼다. 시집 ‘아사녀’(1963), 장시 ‘금강’(1967)과 유작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1969) 등을 남겼다.

1970년 4월 21일자 5면.

별세 이듬해인 1970년 4월 18일 조선일보 후원으로 금강 기슭에 신동엽 시비를 세웠다.

“18일 오후3시부터 부여 나성지에서 ‘신동엽 시비 제막식’(본사 후원)이 있었다. 백제대교가 있는 백마강 기슭의 수십년들이 소나무가 우거진 숲사이에 총고(総高) 2m40㎝, 너비2m30㎝의 시비(설계 정건모, 글씨박병규, 조각 최종구)가 세워지고 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약4백명의 서울과 지방 문인, 부여의 유지, 학생들이 참석해 고인을 추모하며 시비를 제막했다.”(1970년 4월 21일 자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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