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그리고 갑자기…미국의 패권은 저무는가 [홍길용의 화식열전]

1880년 남아프리카.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영국군은 보어 농민 민병대와 맞붙은 마주바 언덕 전투(Battle of Majuba Hill)에서 패했다. 당시 남아프리카에서는 금과 다이아몬드가 대규모로 발견됐다. 이를 포기할 수 없었던 영국은 18년을 벼른 끝에 1899년 다시 보어인을 공격했다. 제2차 보어전쟁이다. 7만여명의 보어군을 꺾기 위해 영국은 무려 45만명의 대군을 쏟아부었다.
당시 영국은 자국의 이익만 추구할 뿐 다른 나라들 사이의 관계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영광스러운 고립(Splendid Isolation)’ 정책을 펴고 있었다. 이기적인 영국의 행보를 곱게 보지 않던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미국, 아일랜드에서는 자발적인 의용군이 결성돼 보어 편에 가세했다. 그럼에도 결국 막대한 전력을 쏟아부은 영국이 1902년 승리했다.
하지만 그 승리는 대영제국의 마지막 영광이 됐다. 오늘날 보어전쟁은 영국 패권 몰락의 시작점으로 꼽힌다. 영국은 이 전쟁 이후 동맹 없이는 이권을 지킬 수 없을 만큼 약해졌다. 결국 러시아 견제를 위해 영일동맹을 체결하며 ‘영광스러운 고립’ 정책도 포기했다.
보어전쟁과 이란전쟁…영·미 반복되는 ‘과잉확장’
예일대 역사학과 폴 케네디(Paul Kennedy) 교수는 1987년 출간한 『강대국의 흥망(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에서 이를 ‘제국적 과잉확장(Imperial Overstretch)’이라고 설명했다. 강대국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사력을 키우고, 패권을 잡은 뒤에는 이를 유지하기 위해 무력을 과도하게 확장하다 스스로 몰락을 자초한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무리하다 스스로 무너진다는 얘기다.
한 달을 훌쩍 넘긴 미국과 이란의 전쟁도 여전히 안개 속이다. 전력은 미군이 우세하지만, 미국은 가성비를 앞세운 이란을 꺾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 에너지의 숨통인 호르무즈 해협도 막혔다. 미국이 협상을 제안했지만 이란은 거부했다. 대개는 불리한 쪽이 먼저 협상을 제안한다. 미국은 왜 이렇게 고전하는 걸까.
먼저 명분이 없다. 개전 전 이란은 상당한 수준의 협상안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협상하는 척하다가 기습적으로 이란을 공격했다. 이번 전쟁으로 얻을 수 있는 성과가 당시 이란의 협상안보다 못할 가능성이 크다. 명분 없는 전쟁이 된 데다, 과감하게 지상군을 투입하기도 어렵다.
둘째, 동맹도 없다. 서방에서 이란의 핵 무장을 막아야 한다는 데에는 큰 이견이 없다. 미국으로서는 이란을 압박하기 전 동맹국들과 함께 외교적·경제적 압박 수위를 높였어야 했다. 동맹과 함께 움직여야, 설령 전쟁으로 가더라도 연합군 결성이 가능하다. 하지만 트럼프는 관세전쟁과 그린란드 사태로 이미 동맹을 적으로 돌렸다.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한 것은 이란이지만, 정작 해협을 열지 못하는 트럼프를 원망하는 나라들이 더 많다.
셋째, 대책이 없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란 지도부를 대거 제거했다. 그러나 전쟁 전 이란은 이미 대행체제를 촘촘하게 갖춰 놓은 상태였다. 이란은 1인 독재국가가 아니다. 종교세력과 혁명수비대가 촘촘한 시스템으로 국가를 지배하고 있다. 이란 정도 되는 나라는 미사일과 폭격만으로 꺾기 어렵다. 정권을 바꾸고자 했다면 대안이 있어야 했다. 트럼프는 현재 이란 정권을 대체할 새로운 정치세력을 발견하거나 육성하지 못했다. 게다가 끝장을 보자는 전쟁이 아니었다면 결국 협상으로 가야 하는데, 이스라엘은 이란 내 온건파까지 공격하며 대화 채널까지 스스로 막아버렸다.
호르무즈의 덫에 걸린 미국…패권의 시험대
호르무즈 해협이 막힌 상태에서 시간은 이란 편이다. 미국과 중동 국가들의 방공무기 재고는 빠르게 줄고 있다. 방공망이 약해지면 이란의 원격 공격 효율은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미국이 이란을 ‘석기시대’로 돌려보내려 한다면, 이란도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카타르, UAE 등 산유국의 핵심 인프라를 타격할 게 뻔하다. 인프라는 한번 파괴되면 복구하는 데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든다. 중동 국가들이 재건 자금을 마련하려면 결국 에너지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다. 이는 곧 글로벌 경제의 부담이다. 만에 하나 이란이 이번 전쟁 뒤에도 핵과 미사일 능력을 유지하고 호르무즈 해협 통제권까지 지켜낸다면, 중동은 다시 세계의 화약고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통제를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란은 오랜 경제제재에 이어 이번 전쟁으로도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배상금이든 호르무즈 해협 통행료든, 재건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배상금보다 통행료가 훨씬 현실적인 방법이다. 국제연합(UN) 질서 아래에서는 상선의 영해 통과를 제한할 수 없다. 만약 이란이 이번에 이 원칙을 깨뜨린다면 기존 질서는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다. 중국이 대만해협을 통제하고, 러시아가 북극항로를 제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현실화되면 세계는 제국주의 시대의 약육강식 질서로 되돌아가게 된다. 미국의 패권은 항모전단을 통한 해양 통제력으로 상징돼 왔다. 미국이 호르무즈 해협을 다시 열지 못하면, 이란보다 훨씬 강력한 중국과 러시아 앞에서 ‘힘이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된다.
미국은 영국이 그랬듯 ‘제국적 과잉확장’의 징후도 보이고 있다. 미국 정부의 높은 부채 비율은 이미 오래전부터 걱정거리였다. 지난해 미국의 재정적자는 GDP의 6%에 육박했고, 올해는 7%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미국 정부의 국채 이자 지급액은 국방예산을 넘어섰다. 세계 최강 군사력을 유지하는 비용보다 빚 이자가 더 많다는 뜻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빚더미 미국 경제…과잉확장, 감당할 수 있을까
트럼프 행정부는 이란 전쟁을 위해 2000억달러의 추가 예산안을 의회에 제출했고, 내년에는 국방예산으로만 1조5000억달러를 요구하고 있다. 국방비를 늘리면 당장 군사력은 강화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경제는 어떻게 될까.
그동안 미국은 만성적인 재정적자에도 불구하고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 덕분에 비교적 낮은 비용으로 국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트럼프가 동맹까지 위협하고 달러마저 무기화하면서 미국 국채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 달러 대신 금을 사려는 수요가 급증한 이유다.
이란 전쟁 한 달째에 이뤄진 미국 국채 입찰에서는 수요가 부진해 10년 만기 금리가 급등했다. 지난 2월 27일 4%를 밑돌던 미국 10년 국채 금리는 최근 4.3~4.4%대에서 움직이고 있다. 채권 금리 상승은 가격 하락을 뜻한다. 호르무즈 봉쇄로 인한 에너지 공급망 대란은 물가는 끌어올리고 경기는 짓누르는 재료다. 중앙은행으로서는 금리를 내리기 어렵고, 오히려 더 올려야 할 수도 있다. 금리가 오르면 국채 발행 비용이 커지고, 경기가 후퇴하면 기업과 민간의 소득이 줄어 세수도 부진해진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국방도 곤란해진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플레이션이 나타나자 미국 10년 국채 금리는 4%대로 치솟았다. 그럼에도 달러인덱스는 112까지 오르며 다른 통화 대비 초강세를 보였다. 지금 금리는 4%대 중반으로 그때와 비슷한데, 달러인덱스는 100 안팎이다. 같은 이자를 줘도 달러를 예전만큼 선호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2025년 4월 6일 트럼프가 관세전쟁을 선포하자 미국 10년 국채 금리는 0.5%포인트 급등했는데, 달러 가치는 오히려 폭락했다. 미국 국채 금리가 오르는데 달러 가치가 하락하는 현상은 이례적이다. 2024년 9월 트럼프의 재선 가능성이 커지면서 이런 흐름은 더 뚜렷해졌다. 이때부터 달러보다 금이 더 주목받기 시작했다.
미소 짓는 중국…달러는 약세인데 위안화는 강세
그런데 미국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곳이 있다. 중국이다. 중국의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지금 1.8%대다. 통상 금리가 낮은 나라의 통화는 약해지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란전이 시작된 이후 위안화는 오히려 강세를 보이고 있다. 달러당 7.33위안이던 환율이 6.88위안까지 내려왔다. 위안화가 절상됐다는 뜻이다. 금리도 낮고 경기 불안도 큰 중국으로 자본이 들어오고 있다. 달러에서 빠져나온 돈의 일부가 위안화 자산으로 향하고 있는 셈이다. 과거 달러에서 나타나던 현상이 중국에서 일부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 2기 취임 직전인 2025년 1월 달러인덱스는 109.5였다. 지금은 100이다. 15개월 만에 9포인트 가까이 빠졌다. 같은 기간 금값은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고 위안화 가치는 상승했다. 패권의 몰락은 대안이 나타난 뒤에 오는 것이 아니다. 신뢰를 잃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이란 전쟁의 최대 수혜국 역시 중국일 수 있다. 중국도 호르무즈 봉쇄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원유는 러시아에서 조달할 수 있다. 이란 역시 중국 선박의 호르무즈 통과는 허용할 가능성이 크다.
독일은 1899년 보어전쟁에서 고전하던 영국을 바라보며 해군력 증강을 가속했다. 이란도 꺾지 못하는 미국이다. 중국으로서는 대만 공략에 대한 자신감을 키울 수도 있겠다.
미국과 달러의 시대 저무나…천천히 그리고 갑자기
미국이 당장 몰락하는 것은 아니다. 대체 수단도 아직 뚜렷하지 않은데 달러 패권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가능성도 높지 않다. 권위주의적 중국의 지도력이 글로벌 패권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하지만 미국과 달러가 예전 같지 않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패권의 교체, 혹은 그 전조인 난세에 이미 들어섰는지도 모른다. 역사를 보면 보어전쟁 이후 영국의 패권이 저물면서 열강 경쟁이 격화됐고, 1차 세계대전을 거쳐 미국의 패권이 형성됐다.
1차 세계대전 직후를 배경으로 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 몰락한 귀족 마이크 캠벨은 어느 날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자신이 부자였던 시절을 회상한다. 허세와 자조가 섞인 캠벨의 넋두리에 친구가 묻는다.
“그런데 어쩌다 빈털터리가 된 거야? (How did you go bankrupt?)”
“두 가지로. 천천히, 그리고 갑자기. (Two ways, gradually and then suddenly.)”
소설 속 캠벨은 여기저기서 빚을 내다 망했다. 빚을 쓸 때는 잘 몰랐지만, 어느 날 갑자기 빈털터리가 됐다. 강대국도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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