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주의 막차 탔나 괴로웠는데… 연극 인생 50년, 이제야 ‘만선’”
‘이런 게 연극인가. 내가 할 수 있을까….’
1973년, 서라벌고를 막 졸업한 청년은 서울 명동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 앞을 서성이며 생각했다. 당대 한국 연극계를 뒤흔든 극단 산울림의 ‘고도를 기다리며’(이하 ‘고도’)를 보고 나온 길이었다. 서울 마포구 산울림 소극장에서 최근 만난 제36회 이해랑연극상 수상자 심재찬(74) 연출가는 “그 충격, 그 감동, 뭐라 표현할 수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 까까머리 청년은 훗날 자신이 바로 그 극단 산울림에서 연극을 하고, ‘고도’ 40주년 기념 공연을 직접 연출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모든 게 연극을 향했던 젊은 날
중학교 2학년 때 본 극단 광장의 ‘학마을 사람들’(이범선 작, 이진순 연출)이 ‘열병’의 시작이었다. 기대가 컸던 4형제 중 장남. 아버지는 배고픈 연극을 하겠다는 맏아들을 이해 못했다. 집안 반대로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할 수 없게 된 그는 친구와의 인연으로 서라벌예대 극회에 들어갔다. 그가 대학생이 아닌 걸 모두 알았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없었다. 낮엔 시간만 보내다 오후에 연극 연습이 시작되면 밤새 무대를 만들고 릴테이프에 음악과 음향 효과를 담았다. 1년 만에 극회 대표였던 형이 연출을 맡겼다. 서라벌예대가 중앙대와 합병된 뒤에 자연스레 중앙대 극회에 합류했고, 대학극장에서 ‘세일즈맨의 죽음’을 연출했다. 만 스무 살 때였다. “난 한 번도 배우를 해 본 적이 없어요. 처음부터 연출이었지.”
◇우리 연극 거목들이 차례로 불러
제대 뒤 극단 ‘고향’에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직업 연극인의 길에 들어섰다. 스물다섯에 서울 정동 연극회관(현 국립정동극장 세실)에서 공연한 ‘2번가의 죄수’(1978)로 연출가 데뷔를 했다. 극단 고향 박용기 대표는 성실하고 열정 넘치는 그를 가리켜 “참 소 같은 놈”이라고 했다. 심씨는 “옛날 분들에게 그 정도면 큰 칭찬”이라며 웃었다.
한국 연극의 기라성 같은 거목들이 차례로 그를 불렀다. 차범석 선생의 부름을 받아 갔던 극단 ‘산하’를 거쳐, 허규 선생이 대표로 있던 극단 ‘민예’로 갔다. 그는 “내 연극이 시대에 뒤떨어진 건 아닌지 고민이 컸던 시절”이라고 했다. “당시 연극의 중심은 신촌 소극장들이었는데, 젊은 연극인들이 다들 부조리극이나 실험극을 했어요. ‘아, 이거 나만 한국 사실주의 연극 막차 탄 거 아닌가’ 갈등했어요. 그럴 때 마침 극단 ‘민예’에 있던 연출가 손진책 형이 부른 거예요.”
‘민예’는 우리 전통을 현대화한 새로운 연극을 시도하고 있었다. 객석 방향만 열린 프로시니엄 무대(객석에서 액자처럼 보이는 액자형 무대)에서 연극을 했던 그는 사방이 열린 마당에서 객석과 무대의 구분 없이 진행되는 민예의 연극을 경험하며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고 했다. “3년 반 북채를 들고 고수를 했어요. 한(恨)과 흥이 정반합을 이루는 한국 사실주의가 이런 거구나, 느껴지기 시작했달까요.”
◇운명처럼, 임영웅의 산울림으로
1987년 임영웅 연출가가 대표로 있던 극단 산울림에 입단했다. 산울림이 올리는 모든 연극 현장에는 임영웅과 그가 함께 있었다. 1989년 산울림이 ‘고도를 기다리며’로 세계 최대 공연 축제 중 하나인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 참가했을 때 처음 아비뇽에 갔다. “아침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 하루 4편씩 코피 쏟을 때까지 연극을 봤어요. 축제도 공연도, 이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기획을 하는 건지 궁금했어요. 우리나라는 왜 이런 걸 못 하지?”
1990년 자신의 극단 전망을 창단했다. “심재찬이 작심했다”며 호평이 쏟아졌던 창단 작품 ‘표류하는 너를 위하여’로 백상예술상 신인 연출상을 받았다. ‘거울 속의 당신’으로 영희연극상(1993), ‘여시아문’으로 히서연극상(1996)을 받았다. 하지만 연극은 해도 해도 적자였다.
마침 1995년 한국문예진흥원 지원으로 해외 연수를 떠났다. 폴란드·체코 등 동유럽과 영국 런던, 미국 뉴욕 등에서 작은 공연 축제 사무국 같은 곳을 찾아다녔다. 축제 기획과 예술 행정이라는 또 다른 길이 여기서부터 열렸다. 한국연극협회 부이사장이던 2000년 거장 로버트 윌슨의 ‘바다의 여인’을 개막작으로 열었던 서울연극제는 규모와 라인업 면에서 하나의 전설이 됐다.
◇든든한 ‘연극인들의 맏형’
2005년부터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사무처장, 국립극단 사무국장 등을 맡는 동안 예술계 처음으로 연극 장르에서 시작된 민간 복지 재단인 한국연극인복지재단 일을 놓지 않았다. 이 재단은 2011년 예술인복지법 제정과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출범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심재찬은 2013년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초대 대표를 맡았다.
그는 연극 현장의 목소리를 두루 들어 조율하고 정책에 반영할 줄 아는 탁월한 예술 행정가였다. 그는 “연극계 맏형이라는 말을 오래전부터 들었는데 그 말이 참 좋더라”고 했다. “멘토, 스승 이런 말은 거리감이 있잖아요. 맏형은 부모를 대신할 수 있고, 동생들 다 신경 써주고, 그러나 군림하지 않으며 늘 발맞춰 함께 가는 사람이죠.”
◇국립극단 ‘만선’, 한국 사실주의의 모범
심재찬은 지난해 극단 산울림의 ‘고도를 기다리며’ 40주년 공연에서 직접 연출을 맡았다. “심재찬의 ‘고도’는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을 받으면 내 대답은 늘 같았어요. ‘임 선생님 하신 대로 충실하게 하고, 다림질만 한 번 깔끔하게 잘해서 내놓았습니다.’”
국립극단이 70주년 기념 공연으로 한국 사실주의 연극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만선’(작 천승세)을 올리기로 했을 때, 당시 이성열 예술감독이 심재찬에게 전화를 했다. “이 작품은 선생님이 하셔야 될 것 같은데요.” 심재찬은 “대본을 보니 예전에 임영웅 선생이 연출하신 버전이더라”고 했다. “이게 결국 나한테 돌아오는구나 생각했어요. 결국 이 길을 가게 될 것을 왜 그 시절엔 피하고 싶어 했을까 부끄럽기도 했고.” ‘만선’은 2021년, 23년, 25년 세 차례 공연했다. 평생 그가 걸어온 길, 꿋꿋이 지켜온 한국 사실주의 연극의 꽃이 활짝 피어난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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