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에 있다. 전국에 잇다]함안 700년 역사 간직한 아라홍련
여선동 2026. 4. 6. 20:21
함안군 가야읍. 함안IC를 빠져나와 차로 5분 남짓 달렸을까. 가야읍 연꽃테마파크에 들어서자, 화려한 꽃들의 잔치 대신 봄바람에 실려 온 싱그러운 흙 내음이 먼저 코끝을 간질인다.
축구장 15개를 합쳐 놓은 듯한 10만 9800㎡의 광활한 늪지는 이제 막 겨울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모양새다. 비어 있는 듯한 수면 아래에선 홍련과 백련의 뿌리들이 단단한 생명력을 품은 채 다가올 여름을 준비하고 있다. 이 고요한 생명의 터전 한가운데, 70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건너온 '아라홍련'의 전설이 새봄의 햇살 아래 다시금 숨을 고르고 있다.
축구장 15개를 합쳐 놓은 듯한 10만 9800㎡의 광활한 늪지는 이제 막 겨울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모양새다. 비어 있는 듯한 수면 아래에선 홍련과 백련의 뿌리들이 단단한 생명력을 품은 채 다가올 여름을 준비하고 있다. 이 고요한 생명의 터전 한가운데, 70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건너온 '아라홍련'의 전설이 새봄의 햇살 아래 다시금 숨을 고르고 있다.

◇땅속 700년, 기적처럼 피어난 생명
2009년 5월, 함안 성산산성(사적 제67호) 발굴 현장. 연못 유적지를 조심스럽게 파헤치던 발굴단의 손끝에 작고 단단한 씨앗들이 걸렸다. 모두 18개. 얼핏 보면 그저 작은 돌멩이처럼 보이는 이 씨앗들이 700년 전 고려시대 땅속에 묻힌 연꽃 씨앗이라는 사실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연구진은 반신반의하며 18개 중 8개를 가려 파종했다. 이듬해인 2010년 7월, 그 중 3개의 씨앗이 마침내 세상을 향해 꽃봉오리를 열었다. 700년의 긴 잠을 깨고, 고려의 씨앗은 21세기의 빛 아래 붉디붉은 꽃잎을 펼쳐 보였다. 세상이 들썩였다. 과학자들은 경이로워했고, 사람들은 탄성을 질렀다.
함안군은 이 연꽃에 이 땅의 옛 이름을 붙였다. 아라가야의 '아라'를 따 '아라홍련'이라 명명한 것이다. 이름 속에는 1000년 전 이 고을을 지배했던 고대 왕국의 기억과 700년의 침묵을 깨고 피어난 꽃의 신비가 함께 녹아들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성산산성 추가 발굴 조사에서 고려시대 씨앗보다 훨씬 더 오래된 씨앗 4개가 추가로 발견됐다. 함께 출토된 기와와 항아리 등 9세기 유물을 근거로, 함안군은 이 씨앗들이 최대 1200년 전의 것으로 추정했다.
경남도 화훼연구소가 이 씨앗들을 정성껏 육성한 결과, 4개 중 3개가 싹을 틔우는 기적을 또 한 번 보여주었다. 아쉽게도 꽃을 피우는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1200년의 시간을 껴안은 씨앗이 다시금 생명의 싹을 올렸다는 사실만으로도 학계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연꽃 씨앗이 왜 이토록 오랜 세월을 견딜 수 있었을까. 연꽃 씨앗의 껍질은 매우 단단하고 치밀해 수분과 산소의 침투를 완벽하게 차단한다. 혐기성 환경의 진흙 속에서 씨앗의 대사 작용이 극도로 억제된 채 휴면 상태가 지속된다. 과학이 설명하는 이 메커니즘조차 700년의 기다림 앞에서는 경이로움을 거두지 못한다.

◇향기 가득한 함안연꽃테마파크
아라홍련의 성공적인 개화를 기념하고, 이 특별한 꽃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자 함안군이 조성한 것이 바로 '함안연꽃테마파크'다. 함안IC에서 불과 5분 거리, 가야읍 한가운데 자리 잡은 이 공원은 이제 여름이면 전국 각지에서 방문객이 몰려드는 경남의 대표 관광지로 우뚝 섰다.
공원의 첫인상은 '광활함'이다. 천연 늪지를 활용해 조성한 자연친화형 테마파크답게, 10만 9800㎡의 광대한 면적에 걸쳐 홍련과 백련, 수련이 장관을 이룬다. 꽃밭 사이로 S자 형태로 부드럽게 휘어진 제방 둑길을 따라 18개의 꽃밭이 이어진다. 산책로 총 길이는 2.7㎞. 천천히 걸어도 40분이면 한 바퀴를 돌 수 있다.
이 공원의 주인공은 단연 연꽃이다. 아라홍련과 법수홍련, 가람백련 등 다양한 품종의 연꽃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 이 공원만의 매력이다. 여기에 물양귀비, 물아카시아, 물수세미, 무늬창포, 좀개구리밥 등 다채로운 수생식물이 어우러져 생태적으로도 풍성한 경관을 연출한다.
공원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꽃은 법수홍련이다. 본래 함안군 법수면 옥수늪에서 자생하던 토종 연꽃으로, 형질이 뛰어나 테마파크로 이식해 대규모 단지를 이루게 됐다. 유전자 조사 결과 경주 안압지(동궁과 월지)의 연꽃과 동일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신라시대 연꽃으로 추정되는 귀한 품종이다.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경복궁 경회루의 연꽃 복원 품종으로도 선정됐다.
꽃잎의 맥이 선명하고 짙은 연분홍빛을 띠는 것이 법수홍련의 특징이다. 7월 중순부터 개화하기 시작해 9월 초순까지 꽃을 유지하는 만생종으로, 개화 기간이 길어 공원 내 가장 많이 심어져 있다. 공원 광장 옆에는 흔치 않은 가시연밭이 펼쳐진다. 온몸에 가시가 돋친 긴 꽃줄기 끝에 어른 주먹 크기의 보랏빛 꽃이 피는 가시연은, 아라홍련 못지않게 귀한 대접을 받는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정자가 보이는 꽃밭 길 사이로 돌다리가 나타난다. 인증사진을 찍으려는 방문객들이 줄을 서는 유명한 돌 징검다리다. 이 돌다리 위에 서면 사방이 연꽃으로 둘러싸여, 마치 꽃 속에 잠겨드는 듯한 황홀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새벽빛 들면 연꽃을 제대로 만나는 시간
연꽃의 청아한 아름다움을 온전히 감상하고자 한다면 이른 아침을 놓쳐서는 안 된다. 연꽃은 오전 중에 꽃잎을 열었다가 햇살이 강해지는 오후가 되면 다시 꽃잎을 닫는 특성이 있다. 오전 6시부터 11시 사이, 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이른 아침에 방문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다.
특히 7월부터 8월은 연꽃이 절정에 이르는 시기다. 청초한 꽃잎과 그윽한 향기가 어우러진 연꽃밭을 거닐다 보면, 진흙 속에서도 청결함과 고귀함을 잃지 않아 예부터 '군자화(君子花)'라 불려온 연꽃의 기품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아라홍련의 아름다움은 함안을 넘어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은 2023년 국립세종수목원 한국전통정원 내 궁궐 정원에서 '아라홍련 특별전'을 열었다. K-정원문화의 가치를 높이고 함안의 역사를 알리고자 기획된 이 전시에는 함안군 시배지에서 채집한 연근 37개체가 활용됐다.
이는 함안박물관 외부에서 아라홍련이 처음으로 개화에 성공한 사례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현재 해당 개체들은 외부 반출 없이 국립세종수목원 내 도담지에서만 엄격히 보존·관리되고 있다. 특별전에는 아라홍련과 함께 신라 시대 계보를 잇는 법수홍련도 나란히 전시됐으며, 송이고랭이·질경이택사·물수선화 등 우리나라 자생 수생식물 10종이 함께 어우러져 깊이 있는 연못 경관을 연출했다.
이처럼 아라홍련은 한 지역의 관광 자원을 넘어, 우리 민족의 역사와 생명력을 상징하는 문화적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함안군은 연꽃테마파크의 매력을 더 널리 알리기 위한 독특한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매년 7~8월, 연꽃이 절정에 이를 무렵이면 '스마트폰 사진 공모전'이 열린다. 전문 장비 없이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누구든 참여할 수 있는 이 행사는 방문객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
2024년 '제1회 인증샷 사진 공모전'을 처음 선보인 데 이어, 2025년에는 '여름, 연꽃이었다'라는 주제로 제2회 공모전을 성황리에 마쳤다. 현장 투표 방식으로 방문객이 직접 심사에 참여하는 방식이 특히 인기를 끌었다. 함안군은 앞으로도 방문객 참여 중심의 이 행사를 정례화하며, 함안 연꽃테마파크를 경남을 대표하는 여름 관광 명소로 더욱 굳건히 할 방침이다.
700년 동안 아무도 모르게 땅속에 잠들어 있다가, 때가 되자 아무렇지 않게 꽃을 피워낸 씨앗. 그 씨앗이 전하는 말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게 아닐까.
기다림에는 끝이 있다. 그리고 그 끝에는 반드시 꽃이 핀다.
여선동기자·취재 도움=함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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