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산 팽나무는 알고 있다. 잊지 말아야 할 약속이 있다고[서헌의 북적북적 책읽기]
황석영 <할매>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로 시작하는 소설, 사라지는 모든 것들을 위한 위대한 서사가 장엄하게 펼쳐진다. 소설 <할매>에 등장하는 600년 된 팽나무는 단순히 오래된 나무가 아니라, 생명과 시간, 그리고 순환의 깊이를 온몸으로 증언하는 존재다. 600년 된 팽나무에게도 시작이 있다는 것, 개똥지빠귀의 뱃속에 있던 팽나무 열매가 땅속에 함께 묻혀, 그것의 몸속에서 싹이 트고 움이 솟아올라 풀 같은 묘목으로 자라났다는 소설 초반부는 모든 자연의 섭리에는 시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우리의 시작도 누군가의 사랑에서 잉태되었듯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로를 향해 기울던 온기와 기다림이 만나, 하나의 생명으로 태어난 것이다. 씨앗이 어둠 속에서 빛을 꿈꾸듯, 파도가 바람을 만나 길을 얻듯, 모든 탄생은 사랑이라는 보이지 않는 힘에 기대어 세상에 발을 디딘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누군가의 품과 시간을 건너온 존재이기에, 우리의 숨결 하나에도 오래된 마음의 흔적이 담겨 있다. 그렇게 삶은 이어지고 나아간다.
팽나무 '할매'의 나이테에는 인간의 시간으로는 다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삶과 생명의 흔적들이 새겨져 있다. 누군가의 운명이 스며들고, 누군가의 슬픔이 말라붙으며, 또 다른 누군가의 희망이 새잎처럼 돋아난다. 그렇게 생명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꾸어 이어진다.
잎이 떨어져 흙이 되고, 그 흙이 다시 뿌리를 살찌우듯, 삶 또한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으로 흘러간다. 팽나무 '할매'는 그 순환의 이치를 아는 듯, 바람과 햇빛과 물안개와 가랑비와 폭풍까지 견디며 눈 덮인 겨울이든 비바람 몰아치는 여름이든 그 자리를 지킨다.

소설에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고, 병인박해, 동학농민운동과 우금치 전투, 일제강점기에 가미카제로 끌려간 조선 청년들과 군부독재 시절 인혁당 사건과 새만금 간척사업에 이르기까지 인간군상의 파란만장한 삶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보인다.
몽각 스님 일화는 구전설화인 '조신의 꿈' 서사를 가져와, 한 인간의 삶이 얼마나 덧없고도 깊은 의미를 품을 수 있는지를 비춘다. 한순간의 꿈처럼 펼쳐지는 인생, 그 안에서 사랑하고 집착하며 괴로워하는 시간이 사실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이 두 이야기를 관통한다. 작가는 이 오래된 조신 설화를 소설 속으로 불러와, 인간이 붙잡는 삶의 무게와 욕망을 조용히 흔들어 놓는다.
몽각 스님의 이야기는 시간과 존재를 다시 사유하게 하는 장치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지금'이라는 시간의 실체를 마주하게 된다. 팽나무 '할매'의 삶 또한 그러하다. 수백 년을 견디며 이어진 생은 개인의 시간이 아니라, 수많은 삶과 죽음이 겹쳐진 거대한 순환의 일부 임을 보여준다.
몸은 여기 있는데 몸의 주인이라던 나는 어디로 갔나. 나는 없어져 버렸다.(중략)
나는 없다. 나무도 풀도 물도 나무도 바람도 돌도 모두 나와 같다. 지금 여기에 모두 다 그냥 있다. 서로가 무심하고 편안하다. (82쪽)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과 결을 같이하는 조신 설화와 몽각 스님의 일화를 한 줄기로 이어놓은 것은, 우리가 붙는 이 삶이 얼마나 허술하고 부서지기 쉬운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이토록 애쓰며 살아가는지를 일깨워주기 위함이다. 꿈처럼 스쳐가는 생 속에서 중요한 것은 소유나 성취가 아니라, 그 순간을 어떻게 살아내는가에 있다는 사실. 두 이야기를 연결한 까닭은, 삶의 허무를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허무 속에서도 빛나는 존재의 온기를 드러내기 위함이지 않을까….
서울까지 팔백리 길을 육십오일 동안 세 걸음 걷고 절하고 가면서 그들은 육신이 부서져 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으나, 한편으로는 뉘우침의 길이 되었다. 이게 다 이 시절 우리 모두의 탓이라는 참회의 길이었다. 그들이 해창 갯벌을 떠날 때 밝혔듯이 삼보일배는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위해 스스로를 바치려는 안간힘이었다.(201쪽)
소설 <할매>속에서 새만금 개발사업에 맞서 이어지는 삼보일배는 단순한 저항의 몸짓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 앞에서 얼마나 낮아질 수 있는지를, 그리고 생명을 지키려고 얼마나 오래 견딜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느리고 깊은 기도에 가깝다. 세 걸음을 걷고 한 번 절하는 그 반복 속에는 땅을 향한 사죄와, 바다를 향한 연민,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생명을 향한 간절한 약속이 담겨 있다.
할매가 품는 시간처럼, 삼보일배의 걸음도 직선이 아닌 순환이다.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사라져가는 갯벌과 생명은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쉽게 자연의 숨결을 지워버리는지를 말해준다. 그러나 그 길 위에서 몸을 낮추는 이들은, 속도를 늦추고 고개를 숙이며 다른 방식의 삶을 선택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빠르게 나아가는 문명이 놓치는 것들∼작은 생명, 보이지 않는 숨결, 그리고 공존의 가치∼를 다시 불러내는 것이다.
4월이 오면, 바람은 유난히 조용해지고 마음은 설명할 수 없는 무게로 가라앉는다. 꽃은 피어나는데, 그 봄빛 속에 스며 있는 시간은 여전히 어둠을 품고 있다. 제주 4.3 사건의 봄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세월호 참사의 바다는 여전히 차갑게 출렁인다.
사람들은 계절을 따라 살아가며 새로운 일들로 하루를 채워가지만, 어떤 기억은 그렇게 흘려보내기에는 너무 깊이 박혀 있다. 이름조차 다 불러보지 못한 이들의 시간, 끝내 돌아오지 못한 약속들, 그리고 그날 이후 멈춰버린 누군가의 시계. 그러나 세상은 점점 더 빠르게 잊는 법을 배우는 듯하다. 기억은 희미해지고, 아픔은 기록 속 문장으로만 남아있다.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 이후 이어진 삼보일배의 길은, 단순한 시위가 아니라 기억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인간의 가장 낮고도 단단한 마음이다. 세 걸음을 옮기고 한 번 절하는 그 느린 반복 속에는, 돌아오지 못한 이름들을 한 번 더 불러보는 마음과, 진실이 끝내 묻히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가 스며 있다. 몸을 낮출수록 더 또렷해지는 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단지 생명이 아니라 '지켜졌어야 할 약속'이었다는 사실이다.
평생에 한 번 자신의 업보를 풀기위해 성산을 향해 오체투지로 기어가는 것은 티베트의 민중적 수행 방식이었다. 세상 어느 곳에서나 그곳 사람들의 삶의 방식대로 실천하는 것은 생명과 평화의 길이요 하느님의 뜻이다.(200쪽)
생명과 평화의 길을 지키는 일은 거창한 구호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한 걸음 멈추어 서서 내가 딛은 땅을 바라보는 일, 내가 누리는 편리함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묻는 일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땅의 형태가 아니라 그 위에서 숨 쉬는 모든 생명의 관계라는 것을. 그리고 그 관계를 지키는 길은 멀리 있지 않다. 오늘 내가 내딛는 한 걸음이, 누군가의 삶을 덜 아프게 하는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자신에게 묻는 것. 그 물음이 이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생명과 평화의 길 위에 서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 "이놈아, 어디 갔다 인제 오냐."는 단순한 목소리가 아니다. 꾸짖음 같지만 실은 품어주는 말, 늦었지만 아직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의 문장이다.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잃고 난 뒤에야 그 부름을 듣는다. 그러나 그 부름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돌아올 길을 밝힌다. 팽나무 '할매'가 지켜온 세계는 더디고 불편하지만, 그 속에는 사라지지 않는 생명의 순환과 서로 살리는 질서가 있다. 그 질서를 무너뜨리는 순간, 인간 역시 그 안에서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작가는 조용히 일깨운다. 우리는 어디까지 멀어졌으며, 이제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 개발과 욕망의 길 끝에서 잠시 멈춰 서서, 다시 생명이 숨 쉬는 자리로 발걸음을 돌리라는 목소리. 그 소리에 응답할 때, 우리는 비로소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은 유산을 건넬 수 있을 것이다.
<추천하고 싶은 영상>
다큐멘터리 <영혼의 순례길> (2018년 5월 개봉, 장양 감독)
다큐멘터리 <수라> (2023년 6월 개봉, 황윤 감독)
<추천하고 싶은 책>
문은아 글, 박건웅 그림 <세월 1994-2014> (2024년 3월 출간, 노란상상)
세상과함께 엮음 <길 위의 삼보일배>, <길 위의 오체투지> (2024년 9월 출간, 푸른역사)
/서헌 창녕 영산고 교사
☞ 필자는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학생들은 약한 존재이지만 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장 강한 존재라고 생각하며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임을 인식하는 관계를 지향하고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해 이해하는 '문학', 그리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살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들여다보는 '역사'를 꾸준한 책읽기를 통해 심어주자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