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이론의 홍수 속 노동의 ‘길’을 내던 사람들

한겨레 2026. 4. 6.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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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 장남수 노동의 문장] 17화 민주노조에서 노협으로
1984년 3월 서울 홍제동성당에서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노협)의 창립 대회가 열렸다.(왼쪽 사진) 1988년 1월 노협 제5차 정기총회가 열려, 필자가 앞에서 활동 보고를 하고 있다.필자 제공

1984년 3월10일, 서울 홍제동성당은 모여든 인파로 인산인해였다. 빼곡히 들어찬 사람들은 눈과 귀를 모아 염원했다. 해고자 방용석 원풍모방 전 노조위원장도 “민주노동조합을 지키려고 몸부림치다 권력의 탄압에 희생된 당사자로서 … 노동운동의 주체성 통일성 연대성을 드높이자”라고 선언하며 한껏 달아올랐다.

주변은 사복경찰이 둘러쌌으나 충돌은 없었다. 전두환 정권이 1980년 5월 광주 시민을 학살해 권력을 찬탈한 뒤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인 공분이 팽배했다. 정당성이 위태로웠던 권력이 나름의 유화 국면을 조성한 때였다. 창립 대회 장소를 홍제동성당으로 정한 이유나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노협)라는 이름으로 출범한 것도 전략이었다.

지학순 주교를 이사장으로, 부이사장 박형규 목사, 이사 조지송 안병무 함세웅 이효재 이우정 등, 사무국장 이창복…. 종교계나 학계 명망가들이 울타리를 맡았다. 실제 일할 인력으로는 위원장 방용석, 부위원장 남상헌(고려피혁) 박순희(원풍모방) 이총각(동일방직) 김문수(한일도루코), 운영위원 유동우(삼원섬유) 최순영(YH무역) 민종덕(청계피복) 조경수(동남전기) 조금분(반도상사) 정선순(원풍모방) 배옥병(서울통상), 간사 이영순(콘트롤데이타) 등 1970년대 노동운동의 선봉에 섰던 해고자들이었다.

이날의 풍경을 한 노동자는 이렇게 썼다. “설렘이었다. 다시 일어선다지. 한걸음 더 앞으로 내딛는다지, 설레는 가슴들이 천명, 천오백명, 이천명 … 그칠 줄 모르게 넓지도 않은 공간을 가득가득 메우고 있었구나. … 그렇게 가슴은 자꾸만 자꾸만 설레고 있었다.”

노협 결성 전까지는 일명 ‘고자모임’이 있었다. 노동운동을 하다가 해고된 사람들이 마땅히 모일 장소가 없어 주로 관악산을 이용하면서 “고자들, 거기로”라는 말로 통하면서부터다. 기관의 눈을 피해 등산복 차림으로 만나면서 마치 거세당한 내시처럼 서로를 부른 것이다.

1988년 1월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제5차 정기총회가 열려, 필자가 앞에서 활동 보고를 하고 있다. 필자 제공
1984년 서울 도림동 ㅅ빌라 101호에서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사무실 개소식을 열었다. 문익환 목사(맨 오른쪽), 두번째 이소선 어머니(오른쪽 두번째), 필자(가운데 노란 옷) 등이 참석했다. 필자 제공

노협은 출범 뒤 점차 인천노협(1985) 남부노련(1987) 동부노련(1987) 등 지역 지부를 늘려 활동했다. 중앙은 전국의 노동조합을 순회하며 실무 교육, 조직 강화 교육을 제공했는데 연간 백차례가 넘을 정도였다. 인천노협만 해도 대흥, 한독, 만도, 콜트악기 등 67개의 신규 조직 결성을 지원했다.

“조직 지원 활동이 비교적 수월했던 건 위장 취업으로 몰린 학생 운동가들이 주로 지하그룹으로 활동하는 것과 달리 인천노협의 경우 사무실을 성당 안에 두는 등 대중성·책임성·안전성에서 신뢰를 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최연봉, 동일방직 해고자, 당시 인천노협 위원장)

남부노련은 법률사무소 사무장으로도 일한 조경수 위원장의 전문성을 살려 구로공단에서 법률상담, 생활상담 등을 전개했다. 동부노련은 성수 지역에서 삼성제약, 풍성전기, 삼미산업 등을 지원하며 실무팀과 현장 조직팀으로 역할을 분담해 활동했다.

특히 노협은 창립 초기부터 “노동자들의 눈과 귀와 입이 되기 위하여” 기관지 ‘민주노동’을 발간했다. 창간호에는 “민주노동이 전 노동자들의 목탁이 되어주고, 민주주의 창달과 노동문화 형성의 첨병이기 바란다.” 지학순 주교의 격려, 농민회 회장의 축사와 함께 태창메리야스, 에스콰이어, 대우정밀 등의 현황, 민주화운동 소식들이 담겼다. 초기에는 박승옥(당시 출판사 돌베개 편집장) 선생이, 얼마 후엔 재야 연합조직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의 임채정(전 국회의장), 이해찬(전 국무총리) 선생이 기획위원으로 매달 편집 회의에 참석해 방향을 논의하며 도와주었다. 당시엔 인쇄소에서 글자를 찍은 사식판을 만들어와서 오리고 붙여가며 직접 편집했다. 홍보부원에서 홍보부장으로 승진(?)한 나는 인쇄소를 뻔질나게 드나들고, 노동악법 개정을 위한 전국 순회 공청회에 카메라를 들고 뛰어다녔다. 1985년 ‘노동운동 탄압 규탄 대회’ 중에는 회원들과 함께 연행되어 인천중부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했다. 그렇게 공장과 광장, 지방과 도시를 넘나들었다. 재정 문제 해결을 위한 장터를 열고, 명절 특산품 판매도 하며 실무자들은 “본업이 뭔지?” 푸념하기도 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바쁘고 치열했던 이십대의 나날이었다.

몸만 바빴으면 좋았겠다. 노협 결성 1년 만에 내부가 격랑에 휩싸였다. 광주항쟁을 겪은 뒤 운동권의 반성과 의기가 팽창하던 때다. ‘선도투’ ‘삼민투’ ‘제헌의회’ 등 각종 정파가 난무하고 이론이 넘쳐나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한국노동운동의 방향 정립을 위하여’(일명 ‘노방’)라는 문건도 반향을 일으켰다.

일부 지식인 급진파들은 노조를 통해 불평등 해소와 민주적인 사회를 꿈꾼 1970년대 민주노조를 일컬어, “자기 조직만 살아남겠다고 움츠리다 각개 격파당한 ‘조합주의’라 했다. 연대 투쟁도 정치 투쟁도 하지 않은 탓이라는 게다. 온갖 ‘주의’들이 난무하면서 노조 조직 강화에 매진하던 노협은 시대에 뒤떨어진 ‘개량주의’가 되어버렸다. “보라, 혼자 살겠다고 노동조합 끌어안고 있어 봤자 다 깨지지 않았느냐, 노동조합은 무용하니 정치 투쟁의 전선으로 나가자.” 노동조합무용론까지 등장했다. 이들은 노동자들을 광장 투쟁의 동력으로 동원하고 싶어 했다. 그 논리는 날카롭고 선명해 보였다. 혁명이론이 앞선 운동가들 눈에 ‘사회과학적 통찰을 지니지 못한’ 노동자 출신 지도자들이 안타까웠는지 모르겠다.

각자의 방식으로 임하면 될 텐데 규정하고 가르며 ‘지도’되지 않으면 못 견뎌 했다. 동등하지 않은 시선의 판단과 목소리는 컸고 이름 지을 수 없는 배제의 기운이 불편했다. 바람이 불어 일부가 새로운 조직으로 떠나갔으나 현장의 힘을 믿으며 노협은 묵묵히 하던 대로 일했다.

마침 최근 읽은 ‘이해찬 회고록’에서 그 상황을 짚는 대목을 보았다.

“서노련(서울노동운동연합)은 노동자들을 정치 투쟁으로 이끌고 싶어 했지만, 노동자들이 갑자기 그렇게 되지는 않잖아요. 노동자들이 중심이었던 노동자복지협의회는 그걸 잘 아니까…. 노동운동은 노동자가 해고되면 힘이 떨어져요. 자본주의가 일정하게 발전하고 노조가 생산라인을 장악해야 가능한 운동이에요. 그런데 학생운동 출신들이 노동 현장에 들어가서 선도 투쟁을 하다가 노동자들이 생산 현장에서 쫓겨나면 운동의 의미가 없어지잖아.” (이해찬 회고록, 돌베개, 2022)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의 기관지 ‘민주노동’ 표지. 필자 제공

1987년, 노동자전국대투쟁이 타오르면서 노동조합무용론은 자취를 감췄다. 노협은 더욱 바빠졌다. 급박한 정세에 발맞추어 ‘민주노동’을 신문 형태로 바꿔 대량 제작했다. 인쇄소에서 나오면 회원들이 가방에 나눠 담고 공단으로 달렸다. 1989년부터는 잡지 ‘샘터’ 크기의 월간 소책자로 바꿔 전국의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유료 배분했다. 이 책은 특히 신규 노동조합이나 미조직 공장 노동자들의 교육 자료로 활용되었다. 그 후 노협은 ‘한국민주노동자연합’(한노련)으로 재편해 활동하다 ‘전국노동자협의회’(전노협, 1990)가 자리 잡은 뒤 ‘발전적 해소’를 선언하며 1993년 한 시대의 역할을 매듭지었다.

그 시절 최소한의 생계는 유지할 대안이 있던 지식인 운동가들과 노동이 아니면 다른 길이 없었던 노동자들의 방향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절박함을 알지 못하면서 오만한 잣대로 노동자들을 날카롭게 재단했던 지식인 중에는 지금 전혀 다른 자리에서 다른 말과 행동을 하는 이도 있다. 이상한 명분을 누덕누덕 걸친 저이가 한때 손 맞잡고 같이 달리던 그인지 참으로 낯설기만 하다.

노협은 발전적 해소를 선언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걸어갔지만, ‘고자모임’을 하던 사람들과 그날의 꿈은 오늘 어떤 울림으로 남아있는지…. 관악산 골짜기의 버들강아지는 여전히 움트고 있는지도 궁금한 봄이다.

장남수 | 경남 밀양 출생. 1958년생으로 열여섯살부터 공장에서 일하며 신정야학에서 공부했다. 원풍모방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해고된 뒤 노동운동을 하며 글을 써왔다. 늦깎이로 검정고시를 거쳐 성공회대에서 공부했다. 지금은 제주도에 살면서 걷고 배우며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1984년 ‘빼앗긴 일터’를 시작으로 ‘빼앗긴 일터, 그 후’ ‘파문’ ‘노동의 시간이 문장이 되었기에’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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