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향만리) 잠시 안녕 / 박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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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건너가지만 의미는 머뭇거린다.
직설은 하나의 의미만 남기지만, 은유는 말과 뜻 사이, 화자와 청자 사이, 현실과 상상 사이에 여백을 남긴다.
박성규(1958~, 경주 출생)의 잠시 안녕은, "봄부터 가을까지" 미처 말하지 못한 것들에게 '말 걸기'이다.
결국, 박성규의 잠시 안녕은, '나'야말로 수많은 '너'로 이루어진 겹침의 존재임을 밝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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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부터 가을까지/ 한결같이 살아왔던 너/ 이젠 떠나는구나!// 떨어져서는/ 뒹굴기도 하고/ 휩쓸려 가기도 하고/ 담 모퉁이를 서성이기도 하고/ 몇몇은 끝끝내 떨어지지 않으려고/ 매달려 있지만 // 잠시 안녕/ 세상의 순리를 가장 잘 따르면서도/ 내년을 기약하며 겨울잠을 청하며/ 잠시 안녕을 고하는 너// 그동안 내 일 한다고/ 관심을 주지 못했었는데/ 한 해의 마무리를 눈앞에 두고서/ 너를 생각한다/ 나도 너를 닮아야겠다
『대구문학』(2026년 5·6월호)
말은 건너가지만 의미는 머뭇거린다. 언어는 사물을 그대로 옮겨 담지 못한다. 화법이 은유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언어 자체가 세계를 직접 보여주는 도구가 아니라, 대신 가리키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화법은 직접 말하기를 피하는 방식이다. 화법은 '사이'를 만드는 예술이다. 직설은 하나의 의미만 남기지만, 은유는 말과 뜻 사이, 화자와 청자 사이, 현실과 상상 사이에 여백을 남긴다. 화법은 전달이 아니라 접속이며, 대상은 타인이 아니라 세계 전체이다.
박성규(1958~, 경주 출생)의 「잠시 안녕」은, "봄부터 가을까지" 미처 말하지 못한 것들에게 '말 걸기'이다. 언어는 설명이 아니라 독백의 은유로 이루어져 있다. 목소리가 좋으면 금방 호감이 가듯, 시 역시 화법은 사물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오래된 형식이다. 「잠시 안녕」은, 지나간 시간을 품은 형상의 변형과 축적을 품고 있다. "너"의 귀에 대고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멋지다. 독백은 '말하기'의 시법처럼 보이지만, '들림의 방식'이기도 하다. '나'와 '너' 사이는 침묵이기도 하고, 방백이기도 하다. 말은, 반드시 어떤 기미와 기척으로 우리 곁을 맴돈다. 미처 알아채지 못할 뿐, 수많은 목소리로 자신에게 들려준다. 침묵의 결로, 어긋남으로, 이해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몸짓으로 말은 서성거린다.
박성규는 '봄과 가을'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서로가 서로에게 들려주고 있다. 「잠시 안녕」은 타인을 묻는 형식으로 결국 나의 심연을 겨냥한다. 열매와 시간 사이가 그랬듯, 몸과 마음 역시 잠시 "떨어져" "뒹굴"었지만, "끝끝내" 함께 "매달려" 살아온 셈이다. '너'는 바깥의 누군가이면서 동시에 이미 내 안에 들어있는 흔적이다. 기억으로, 상처로, "세상의 순리"로, "내년을 기약하며 겨울잠을 청하"는 너이기도 하다. 우리는 타인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타자의 형상을 만난다. 순환은 논리가 아니라 리듬이며 시의 본질이다. 리듬은 소리와 소리 사이, 침묵과 발화 사이에서 태어나는 시다. 존재와 존재의 이어주는 시간이자 틈이다. 비어 있지만 가장 충만한 무(無)처럼, 결핍이 아니라 내면을 환하게 밝히는 등잔이다. 결국, 박성규의 「잠시 안녕」은, '나'야말로 수많은 '너'로 이루어진 겹침의 존재임을 밝힌 셈이다.
김동원(시인·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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