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말은 한다” 이념논란에 일갈 나훈아… “좋은 사람이 꿈” 정치발언 절제 남진[장재선의 한국문화 ‘논란의 초상들’]
(12) 남진 · 나훈아 라이벌 경쟁 <하>
나훈아, 작년 은퇴공연서 “오른쪽이 어데고 왼쪽이 어데고?”
정치 발언 내놓자 진보진영 비판받아… 그마저도 ‘일소’
2009년 야쿠자 루머에 바지 지퍼 열며 “5분간 보여주겠다”
남진, 80년대 정치권력에 의해 방송출연 금지 당해
낙향후 사업하며 폭력배 흉기에 찔려… ‘세상 덧없다’ 느껴
이념 편향 시비 안 부르고 진중… 신앙 바탕 삶의 기쁨 집중


“가수의 자존심을 높여 준 두 선배.” 남진과 나훈아에 대해 가요계 후배들이 이렇게 말하는 걸 수차례 들었다. 수십 년 동안 자신의 음악 세계를 가꾸며 그 생명력을 인정받았다는 점에서다. 두 사람은 그런 공통점과 함께 상이한 매력으로 후배들의 롤 모델이 됐다. 남진은 늘 친근한 이미지로 대중 가까이 있되 온화하고 진중한 품격을 보이며 사회적 발언은 절제했다. 반면에 나훈아는 신비주의 콘셉트로 잘 보이지 않다가 가끔 나타날 때마다 탁월한 공연을 선보였고 당대의 세상에 대해 소신껏 할 말을 다 했다.
나훈아가 지난 2009년 연 기자회견은 세상의 논란을 정면 돌파하는 결기를 만천하에 과시한 것이었다. 그가 일본 야쿠자와 한 여배우를 놓고 시비가 붙어 음경을 절단당했다는 괴소문이 돌던 때였다. 그는 회견장 단상 위로 올라가 바지의 지퍼를 내리는 몸짓을 하며 “제가 내려서 5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아니면, 믿으시겠습니까”라며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퍼포먼스를 벌였다. 그때 괴소문을 퍼 나르는 매체들을 향해 “여러분이 펜으로 사람을 죽이는 겁니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후 논란은 쑥 들어갔고, 후배 여배우를 보호하기 위해 그런 회견을 한 나훈아의 사내다움이 화제가 됐다.
◇“살인마 앞에서 노래 못한다”
그는 문재인 정부 시절에 평양공연 남측예술단 참여를 요청받았으나 불참했다. 나중에 그는 “내 노래는 다 서정적인데 고모부를 처형하고 이복형을 암살하는 살인마(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앞에서 노래가 어떻게 나오겠느냐”라며 그 이유를 밝혔다. 1980년대 남북 교류를 위해 평양 공연에 동참한 적 있으나, 인륜을 저버린 김정은 앞에서의 무대는 사양한 것이다.
좌파 인사들이 이에 대해 유튜브 방송 등에서 앙앙불락했으나 그 소리가 크진 않았다. 그들의 불만이 터진 것은, 나훈아가 2025년 1월 은퇴 공연에서 “오른쪽이 어데고, 왼쪽이 어데고, 니는 잘했나”라고 발언한 후였다. 그는 계엄 이후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지금 우리 머리 위에 폭탄이 떨어져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는 나라가 대한민국인데, 텔레비전에서 군인들이 잡혀 들어가고 어떤 군인은 울더라…. 누가 좋아하겠냐, 북한 김정은이 얼마나 좋아하겠냐”라고 했다.
이에 대해 더불어민주당 의원인 김원이가 페이스북에 “무슨 오지랖이냐”라는 글을 올렸고, 같은 당 의원 최민희 등도 공격에 가세했다. 한 시사 평론가는 나훈아 발언이 중립을 표방했으나 정치 집회에 나오는 그 또래 노인들의 음성으로 들어야 한다며 “가장 비열하다”고 비난했다. 그는 노인층을 향해 “살 날이 얼마나 있다고 제발 입 다물고 집안에서 TV 보면 좋겠는데, 나도 살아 있다고 목청 높여 외친다”고 했다.
이 평론가는 K-TV 프로그램 ‘최고수다’를 진행할 때 나훈아 특집 방송을 했다. 그때 ‘꺾기’ 창법이 민요에서 나온 것이라는 식견을 자랑한 바 있다. 그랬던 그가 나훈아와 우파 집회의 노인들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난한 것이다. 좌파 진영에 자신의 존재감을 호소하기 위해 “나도 있다”고 목청껏 외친 셈이다.
같은 진영의 발언꾼들도 이에 질세라 언어의 죽창을 휘두르며 우리 시대의 걸출한 대중음악인에 대한 사상 검증에 나섰다. 나훈아가 애써 중립 지대 언어를 골라 발언한 것을 극우 쪽으로 몰아붙이며, ‘내 편이 아니면 모두 비열한 적’이라는 저열한 인식을 드러냈다. 그런 꾼들의 게정이 여기저기 쏟아졌으나, 나훈아는 일소에 부쳤다.

가수 생활을 하는 동안 남진은 정치적으로 해석될 만한 발언을 삼갔다. 인연이 있는 정치인들의 행사장에 나타나는 경우는 있으나, 여야를 넘나들어서 편향 시비를 부르지 않았다.
이런 신중한 언행은 타고난 성품에 바탕했지만, 정치 권력에 의해 방송출연 금지를 당했던 경험과 관련이 있다. 그는 1979년부터 4년간 미국에 있다가 돌아왔다. 1982년 12월 귀국 콘서트는 대성황이었고, 방송 출연 약속이 줄줄이 잡혔다. 그런데 갑자기 그 모든 일정이 취소됐다. 방송국 PD들은 그 이유를 대지 못했다. 그는 나중에 당시 군사정권의 정적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부친의 친분 때문이었음을 알게 됐다. 전남 목포 유지였던 그의 부친은 조병옥, 신익희, 장면, 박순천 등 정치인들과 가까웠다. 김 전 대통령이 젊은 시절에 찾아오면 용돈을 주곤 했다. 부친의 그런 이력을 빌미로 정권의 실세가 그의 방송 출연을 막은 것이다(권력의 이런 야만이 훗날 블랙리스트 사태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한국 문화사 오점이다).
그는 방송출연 금지가 길어지자, 낙향을 해서 사업가로 변모했다. 극장식 카바레 클럽 ‘하와이 관광’을 운영한 것. 사업이 잘되니 조직폭력배들의 갈취 협박이 이어졌는데, 베트남전 용사라는 자부가 있는 그는 이에 과감히 맞섰다. 그로 인해 나중에 폭력배들의 칼부림에 당해 허벅지에 큰 상처를 입어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그의 노래 ‘빈잔’이 히트했다. 방송에 나가지 못해 구전으로만 불리던 곡이었다. “… 어차피 인생은 빈 술잔 들고 취하는 것….” 남진은 이런 가사가 자신의 인생과 똑 닮았다며 지금도 애착하는 곡으로 꼽는다.
그는 인기를 누리면서도 세상이 덧없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베트남전에서 전우들이 죽어갈 때, 정치권력에 의해 방송 출연 금지를 당할 때, 조직 폭력배의 흉기에 찔릴 때 그랬다. 가수협회장을 하며 원로 가수들의 늘그막이 처참한 것을 눈으로 보며 더욱 그랬다. 그런 그를 삶의 기쁨에 충만한 사람으로 만들어준 것은 신앙이었다.
그는 초등 5학년 때부터 개신교 교회를 다녔으나, 대중 스타로 바쁘게 살면서 오랫동안 찾지 않았다. 그러다가 가수 출신인 장욱조 목사 소개로 2015년부터 경기 용인 새에덴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소강석 담임목사의 유머러스하면서도 진솔한 설교가 그를 사로잡았다. 소 목사는 시인이기도 해서 그와 정서적으로도 통했다. 2017년 장로가 된 그는 신앙의 기쁨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을 소명으로 여기며 기꺼이 특송과 간증에 나서고 있다.
영성을 중시하는 그는 이런 노년의 소망을 갖고 있다. “오늘날 나를 있게 해 준 팬들에게 좋은 모습과 노래로 보답하고 떠나는 게 나의 숙제이다… 노래만 잘한다고 좋은 가수가 아니다. 동료와 선후배, 팬들에게 좋은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겠다.”
남진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무대에 서겠다는 다짐을 수차례 밝혔다. 반면 나훈아는 “박수칠 때 떠나겠다”며 지난 2024년 은퇴 선언을 한 후 이듬해 1월 고별 공연을 마쳤다.
남진과 나훈아는 우리 대중음악사에 여러 기록을 남겼지만, 그중 하나가 1970년대 초반에 단독 대형 리사이틀 시대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 이전엔 여러 가수들이 함께 쇼를 꾸몄다. 나훈아는 중년 이후 이 단독 공연 무대를 적극 활용해 자신의 카리스마를 쌓았다. 남진이 콘서트뿐만 아니라 방송과 각종 행사에 자주 출연하는 반면에 나훈아는 오랜 잠행을 통해 충실히 음악을 준비해서 콘서트를 여는 데 집중했다. 팬들은 오랜만에 등장한 그를 보기 위해 줄을 섰고, 언론은 그걸 크게 다룰 수밖에 없었다. 그 공연 때마다 나훈아는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노래와 춤뿐만 아니라 무대 연출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한 것이 그의 은퇴를 앞당긴 게 아닐까 싶다.
◇듀엣 무대 지금껏 딱 한 번
남진과 나훈아는 방송인들이 꼽는 최고의 라이벌로 꼽히지만, 두 사람이 함께 무대를 꾸민 프로그램은 딱 한 번이었다. 1987년 KBS TV가 방영한 ‘스타데이트’이다(유튜브에서 그 희귀 영상을 볼 수 있다).
두 사람은 옛 가요를 한 소절씩 나눠서 노래했고, 또한 자신들의 노래를 바꿔 부르기도 했다. 이때 서로의 입을 막는 듯한 제스처를 보여준다. 나훈아는 토크쇼 시간에 “둘이 싸우는 것처럼 보여야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말했다. 대중의 심리를 간파한 쇼맨십인 셈이다. 두 사람은 프로그램 말미에 ‘Let it be me’를 듀엣으로 들려줬다.
그 노래를 듣고 있으면 긴 여운과 함께 하나의 소망이 솟는다. 한국 가요사를 대표하는 두 사람이 노년에 함께하는 무대가 한 번쯤 있어도 좋지 않을까.
김지미·윤복희 관련 풍문 함구하며 지켜준 두 남자

나훈아와 남진은 개인사인 결혼에서도 유명세를 치러야 했다. 각종 풍문에 시달렸으나, 두 사람은 그에 대해 구구하게 설명하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예인이자 기인으로 불리는 나훈아는 유독 굴곡진 가정사를 겪었다. 1973년 배우 고은아의 사촌인 이숙희 씨와 결혼했으나 3년 만에 이혼했다.
그는 1976년 당대 최고 여배우였던 11세 연상의 김지미와 결혼한다고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두 사람은 혼인 신고를 하진 않았으나 김지미의 고향인 대전에서 함께 살며 다정한 모습을 보여줬다. 6년 만인 1982년 헤어졌는데, 훗날 나훈아는 김지미에 대해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 준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1983년 14세 연하의 후배 가수 정수경과 동거를 시작해 아들을 얻었다. 1985년 결혼식을 올리고 딸까지 낳았으나, 1993년 아이들 유학을 위해 아내가 미국으로 가며 부부 사이가 티격났다. 나훈아가 5년간 연락을 끊고 2007년 아들 결혼식까지 불참하자 정수경이 이혼소송을 했다. 법정 공방이 벌어졌고 2016년 이혼 판결이 났다. 이 과정에서 정수경은 언론에 불만을 터트렸으나, 나훈아는 아내에게 섭섭하다는 내용의 편지를 쓴 것 이외에 공개적으론 침묵했다.

남진은 30세 때인 1976년 가수 윤복희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3년 만에 헤어졌는데, 실제로 함께 산 기간은 1년 정도였다고 한다. 이혼 관련해서 남진 폭행설 등 사실무근의 루머가 나돌았는데, 당사자는 함구했다. 나중에 윤복희가 “내가 전 남편의 질투를 끌어내기 위해 남진 씨를 이용한 것”이라고 고백했다. 남진은 주변의 질문에 “그런 이야기를 들추는 것은 그분에 대한 실례”라며 끝까지 신의를 지켰다.
1979년 미국으로 떠난 남진은 뉴욕에 사는 교포 강정연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그는 처가에서 운영하는 레스토랑 중 하나를 맡아 꾸렸다. 당초 예정보다 미국에 더 머물며 딸 셋을 연년생으로 얻었고, 1982년 귀국 후 아들을 낳았다.
그가 ‘딸 바보’라는 것은 가요계에 유명한데, 자식들이 아이를 낳은 후에는 스스로를 ‘손자 바보’라고 한다. 그는 가정의 화평을 으뜸으로 삼으며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가족은 두 어깨에 짊어진 짐인 듯 하지만, 사실은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이다.”
장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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