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멤버·한글 가사 없어도… LA 연습생들 “우린 K팝 아이돌”

윤수정 기자 2026. 4. 6.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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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K]
<6> ‘K팝 제작 시스템’ 수출 시대

하이브 아메리카 사옥은 미국 음악 산업의 핵심지인 로스앤젤레스 산타모니카 한복판에 있었다. 지난달 찾아간 이곳은 글로벌 3대 음반사인 유니버설뮤직그룹(UMG), 워너뮤직, 소니뮤직의 본사와 산하 계열사들이 밀집한 지역에 지상 3층짜리 건물을 빌려 쓰고 있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산타모니카 한복판에 있는 하이브 아메리카 건물 외관. /하이브

LA의 상징과도 같은 야자수가 심긴 중정과 건물 외관만 보면 이국적인 현지 음반사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지만, 문을 여는 순간 한국에서 자주 보았던 K팝 제작 환경이 펼쳐졌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자사 그룹들이 안무 연습과 녹음을 할 수 있고 그 옆에서 소셜미디어 콘텐츠까지 실시간 제작할 수 있게 만든 두 개의 대형 연습실이었다. 이곳에서 처음 탄생한 다국적 걸그룹 ‘캣츠아이’를 비롯해 남미 시장 공략을 위해 만든 ‘산토스 브라보스’(하이브 라틴아메리카) 등 해외 시장 공략을 위한 ‘전략 그룹’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들의 음악은 한국어 가사도 아니고, 한국인 가수들이 부르는 것도 아니지만 K팝의 산물로 인식된다. K팝이 성공시킨 제작 방식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성공해 전 세계로 뻗어 나간 K팝의 DNA와 성공 방정식이 미국 음반 산업의 메카 한복판에서 새롭게 이식되고 있다.

하이브 아메리카 직원 200여 명 중에는 본사인 한국에서 안무와 앨범 제작 비법(秘法)을 갖고 온 파견 인력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캣츠아이’ 제작 당시만 해도 인근 스튜디오를 빌려서 썼고, 일부 훈련은 서울 용산 하이브 본사에서 해야 했다. 하지만 최근엔 완벽한 자체 연습실과 스튜디오 녹음 훈련실을 갖추고 현지화를 완성해 가고 있다.

◇연습생 합숙부터 팬덤 만들기까지… LA 한복판에 ‘K팝 비법’ 심었다

국내 최대 규모 K팝 기획사인 하이브는 2019년 미국 법인 ‘하이브 아메리카’를 출범시켰다. 초기엔 미국 현지에서 하이브 소속 K팝 그룹들의 미국 앨범 유통과 홍보 업무를 주로 전담했다. 하지만 최근 K팝 방식으로 길러낸 그룹을 미국과 남미 현지에 데뷔시키는 전초기지로 변모했다.

K팝과 K컬처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가수’나 ‘앨범’이 아닌 ‘K팝 제작 시스템’ 자체가 수출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하이브를 포함해, 국내 기획사 JYP는 2023년 미국 리퍼블릭 레코드와 합작 걸그룹 ‘비춰’를 제작하면서 미국 법인에 본사 전문가들을 파견해 K팝식 훈련을 도입했다. SM은 지난해 영국 현지 음반사 문앤백에 자사 연습생 훈련과 K팝 제작 노하우를 전수하며 현지 멤버들로만 구성된 보이 그룹 ‘디어 앨리스’를 출범시켰다.

수십 명의 작곡진과 프로듀서를 한꺼번에 모아 수백 곡을 빠르게 만들어 내고, 그중 활동할 때 부를 곡을 추려내는, 이른바 K팝식 ‘송캠프’ 전략도 새로운 노하우로 각광받고 있다.

그래픽=김현국

◇‘K팝 제작 시스템’ 자체가 수출 상품

K팝이 그대로 나가는 것은 아니다. K팝은 현지의 팬덤 문화와 현지 출신으로만 채운 멤버 등과 결합하며 독특한 새 장르를 파생 중이다. 지난 13일 하이브라틴아메리카 소속 산토스 브라보스는 데뷔 후 처음 선보인 EP 앨범 ‘DUAL’에 ‘가와사키(KAWASAKI)’라는 곡을 담았다. 멤버 전원이 미국·브라질·멕시코·페루·푸에르토리코 출신에 ‘가와사키’란 노래도 브라질에서 유행하는 같은 이름의 오토바이 브랜드에서 따왔다. 강렬한 라틴팝 댄스곡에 가깝지만, 뮤직비디오를 트는 순간 멤버들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칼각’ 군무가 이들의 뿌리가 ‘K팝’임을 확실하게 각인시킨다. 노래에 맞춘 단체 의상과 얼굴 윤곽이 자연스럽게 도드라져 보이는 K팝식 화장, 여기에 그룹의 군무를 전체적으로 돋보이게 만드는 카메라의 움직임도 한국 음악 방송과 뮤직비디오에서 봤던 기법이다.

그룹의 일거수일투족을 소셜미디어 콘텐츠화하거나, 연예 활동 전반의 모든 것에 대한 종합 교육과 관리를 제공하는 것 또한 미국 현지 음반사에는 없는 시스템이다. 예컨대 언론과 매력적으로 인터뷰하는 법, 무대 의상뿐 아니라 공항 패션과 일상 사복에도 적용할 수 있는 스타일링 전략, 개인의 외국어 역량과 음악 활동에 연관된 교양 수업까지 총체적으로 제공된다. 미국 음반사들이 공연과 언론 홍보, 연예 활동을 관리하는 매니저와 회사가 각각 따로 있을 정도로 세분화된 것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데뷔 과정 자체를 경연 방송이나 다큐 콘텐츠로 제작해 초기에 열성 팬덤을 확보하는 것도 K팝의 독특한 필승 전략으로 꼽힌다. 보컬, 춤, 작·편곡 실력, 뛰어난 외모 등 각 분야에 가능성을 갖춘 수백~수천 명 지원자를 특정 기간에 모아, 각계 전문가가 한데 모여 심층 분석하는 대형 오디션 자체가 영미권에선 드문 방식. 영미권에선 주로 자작곡을 지원받거나 입소문이 퍼진 실력자들을 주로 뽑지만, K팝은 아직 실력이 미숙해도 발전 가능성이 있다 싶으면 연습생 단계부터 캐스팅한다. 하이브 관계자는 “이런 방식에 대한 팬들의 열렬한 지지와 오디션 열기는 해외 관계자들이 매번 놀라워하는 부분”이라고 했다. 지난 2023년 하이브가 캣츠아이를 데뷔시키기 위해 유튜브로 송출한 경연 방송 ‘드림아카데미’ 때는 지원자 12만명이 몰리기도 했다.

◇선후배 팬덤 문화까지 이식… 인구 감소 시대에 유리한 전략

팬덤의 온라인 구매 취향과 이동 경로까지 분석해 반영하는 ‘팬 플랫폼’도 해외 음악계에선 상상 못 했던 방식이다. 캣츠아이와 산토스 브라보스는 하이브 아메리카 내에서 연습 장면을 찍어 팬 플랫폼에 올리고,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가 매일 출근해 연습하는 일상 공간을 함께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또 자사 소속 선후배 그룹이 서로의 앨범이나 신곡 발매 때 홍보용 쇼츠 영상을 함께 찍어 팬 플랫폼에 올리면 자연스럽게 팬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기도 한다.

업계에선 이를 “장기적으로 K팝 수요층 자체를 넓힐 수 있는 전략”으로 바라보고 있다. 한 대형 기획사 관계자는 “국내 팬덤은 이미 인구 감소로 10대 팬이 점점 줄고 있다”며 “최근 K팝 기획사들이 젊은 팬층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남미와 인도 법인 설립에 적극적인 것도 이 같은 시대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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