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발표… 일제시대 최고 인기 누려

김재근 선임기자 2026. 4. 5.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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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인 충청의 인물과 사건] 10)충남 논산 출신 극작가 임선규
주변 도움으로 강경상고 입학, 연극에 큰 관심
당대 최고 배우 문예봉과 사랑 고난 끝에 결혼
해방후 사회주의 활동 1948년 월북, 68년 사망
극작가 임선규는 주변의 도움으로 어렵게 충남 논산 강경읍 소재 강경공립상업학교(현재 강경상고)를 다녔다. 사진은 일제시대인 1931년에 준공된 교장 관사. 김재근 선임기자

한국인이면 누구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홍도야 우지 마라'를 기억한다. '사랑에… '는 일제 때 가장 유명했던 연극이고, '홍도야… 는 이 연극을 영화로 만든 영화의 주제가이다. '홍도야… '는 일제 강점기 이래 전국민이 즐겨 불러온, 생명이 아주 긴 히트곡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쓴 극작가 임선규는 별로 알려진 게 없다. 해방 이후 작품활동이 거의 끊겼고, 월북하여 북한에서 사망했기 때문이다.

임선규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와 '동학당' 등을 지은 일제 시대 대표적인 극작가이다. ​​​​​(좌측) , 임선규의 아내 문예봉은 일제시대 최고 여배우로 '삼천만의 연인'으로 불렸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극작가 임선규는 충남 논산 출신이다. 요즘은 영화나 연극, 드라마의 시나리오 한편만 잘 써도 스타가 되지만 임선규는 1936년~해방공간까지 10여 년을 풍미한 최고의 스타작가였다. 그의 작품은 흥행의 보증수표였고, 늘 관객이 넘쳐났다.

본명은 임승복으로 1912년 2월 논산시 연산면 관동리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소작농으로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못했으며 그나마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다. 마을에서 서당을 다니다 논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927년 강경공립상업학교(강경상고)에 진학했다.

강경상고의 현재 모습. 임선규는 1927년 아 학교에 입학, 1931년에 중퇴했다. 김재근 선임기자

당시 강경은 금강의 뱃길을 따라 평야와 바다의 물자가 몰려드는 상업 중심지로 대구, 평양과 함께 전국 3대 시장으로 손꼽혔다. 강경상업학교는 금융권 취업이 보장되는 명문학교였다. 부농의 도움으로 이 학교에 입학을 했으며, 친형이 머슴살이를 하며 돈을 댔다.

임선규는 강경상업학교 시절 연극에 눈을 떴다. 1928년 강경에 강경극장, 1930년 경 논산극장이 문을 열었다. 당시 조선연극사가 논산극장에서 공연하는 것을 보고 연극을 꿈꾸게 되었다고 한다. 고교 재학시절 그가 지은 '수풍령'이란 작품이 <개벽>지에 실렸다고 한다. 학교에서 검도를 배웠으며 매우 사교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학비 조달이 어려워 1931년 학교를 중퇴하고 만다.

상경한 그는 자신이 흠모했던 조선연극사(朝鮮演劇舍)의 배우 강홍식을 찾아가 연구생 배우로 입문했다. 조선연극사는 1929년 지두한을 중심으로 천한수 변기종 강홍식 전옥 이애리수 등의 30여 명의 배우가 참여하여 만든 극단이었다. 임선규는 여기서 '콘라도야 잘 있거라'를 번안하고, '양자강의 범선'을 쓰면서 배우가 아닌 극작가로 변신했다.

임선규는 조선연극사에서 훗날 조선 최고의 배우가 되는 문예봉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문예봉은 유랑극단 단장 문수일의 딸로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어려서부터 아역으로 출연했다. 아버지는 폭력까지 행사하면서 딸을 무대에 올렸다.

명문 고등학교를 중퇴한 그는 함흥여자공립보통학교를 중퇴한 문예봉에게 오라버니와 스승 같은 존재였다. 문수일은 딸 문예봉을 '연극시장'이라는 자신의 극단에 출연시켜 돈을 벌 생각으로 가난한 임선규를 싫어했고 둘을 갈라 놓았다. 문수일이 그를 극단에서 쫓아냈지만 사랑은 식을 줄 몰랐고 1933년 21살 임선규와 16살의 문예봉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다.

청양 출신 배우 복혜숙은 가난한 임선규 문예봉 부부를 자식처럼 돌봐줬다.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겨우 살림을 차렸지만 아주 가난했고, 임선규는 폐결핵에 걸려 다른 사람을 만나기도 어려웠다. 문예봉은 어린 아이를 집에 홀로 남겨두고 외출하여 영화에 출연하는 등 힘든 신혼을 보냈다. 1932년 '임자 없는 나룻배'를 찍을 때는 아이를 데리고 나와 촬영을 하고 촬영장 숙소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힘들고 난감한 처지였지만 문예봉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처신, 주변에서 현모양처라며 칭송했다고 한다. 청양 출신으로 아버지 문수일의 동료였던 배우 복혜숙이 이들 부부를 친자식처럼 돌봐줬다.

문예봉은 '임자 없는 나룻배' 이후 '춘향전'(최초의 유성 영화) '춘풍' '장화홍련전' '미몽' 등의 영화로 조선 최고의 스타, 삼천만의 연인으로 떠올랐다. 1935년부터 해방까지 조선영화는 문예봉이 나오는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를 나눌 만큼 영화계의 흥행을 좌우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 출연한 배우들

황철(철수 역). 사진=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왼쪽부터), 심영(영호 역) 사진=나무위키, 차홍녀(홍도 역) 사진=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김선초(시어머니 역)

가난과 질병으로 고생하던 임선규도 동양극장에서 공연한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로 일약 인기작가로 떠오른다. 1935년 홍순원이 세운 동양극장은 당대의 극작가와 배우, 연출가들을 전속으로 두고, 청춘좌와 호화선 2개의 극단을 운영하면서 우수한 공연을 계속 선보였다. 동양극장의 청춘좌는 비수기인 1936년 여름 이광수 원작 '단종애사'를 각색하여 무대에 올렸다가 왕실로부터 핍박을 당한다. 조선 왕실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공연정지 명령을 받은 것이다. 연출가 박진은 경성방송국에서 드라마로 내보냈던 신인 극작가 임선규의 대본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찾아내 부랴부랴 무대에 올렸다.

동양극장 전속극단 청춘좌와 호화선의 공연을 알리는 신문광고.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출연진에 황철 차홍녀 한일송 김선초 이동호의 이름이 나와있다.

작품 줄거리는 흥미로운 요소가 가득했다. 오빠의 학비를 벌기 위해 기생이 된 홍도가 부잣집 아들인 오빠 친구 영호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영호는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홍도는 시어머니의 계략으로 시집에서 쫓겨난다. 유학에서 돌아온 영호마저 홍도를 외면한 채 부잣집 딸과 약혼을 하게 되는데 약혼식장에 달려간 홍도가 약혼녀를 칼로 찌른다. 살인 현장에 달려온 순사가 오빠였고, 오빠는 홍도의 손목에 쇠고랑을 채운다.

1935년 무용가 배구자의 남편 홍순원이 세운 동양극장은 청춘좌와 호화선이라는 2개의 전속 극단을 운영했다. 사진=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4막 5장의 이 작품은 7월 23일부터 31일까지 동양극장에서 초연됐는데 관객들이 공연 내내 울고 웃고 분노하는 등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줄을 서서 표를 샀고, 배우들을 만나러 온 기생들이 극장 앞에 인력거를 대놓고 기다렸다.

임선규는 이 작품에 자신의 실력을 한껏 발휘했다. 가난과 배신, 돈, 신분차별, 자유연애 등 당대의 분위기를 잘 담아냈다. 사랑과 돈, 순수와 욕망 등 성격이 뚜렷한 캐릭터와 선명한 갈등 구조, 빠른 전개도 돋보였다.

임선규는 애초에 동양극장 멤버를 염두에 두고 각본을 썼다. 극중의 철수는 배우 황철, 홍도는 차홍녀, 영호는 심영을 생각했는데 그의 의도대로 해당 배우들이 주연을 맡았고, 흥행의 대성공으로 모두 인기 배우의 반열에 올랐다. '사랑에… '는 수년간 서울과 지방에서도 공연되는 등 전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됐다.

영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한 장면. 남편역은 배우 김동규(왼쪽), 시어머니역은 김선초(가운데), 홍도역은 차홍녀(오른쪽)가 맡았다. 사진=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영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부민관에서 상영한다는 신문광고.

이런 인기에 힘입어 3년 뒤인 1939년 조선영화주식회사가 이 작품을 영화화(감독 이명우)했다. 영화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주제곡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이서구 작사, 김준영 작곡, 남일연 노래)와 부주제곡 '홍도야 우지마라'(이서구 작사·작곡, 김영춘 노래)가 크게 히트했다. 특히 '홍도야… '는 당시 10만장 넘게 팔리는 등 하도 유명해져 나중에 나오는 연극이나 영화는 아예 '홍도야… '를 작품 이름으로 사용했다.

영화 주제곡 '홍도야 우지 마라'를 불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가수 김영춘. (왼쪽) , 영화 주제곡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부른 가수 남일연은 충남 논산 출신이다. 사진=나무위키

임선규는 동양극장에서 '유정무정' '유랑 삼천리' '북두칠성' 등을 지었고, 1939년부터 극단 아랑에서 활동하며 '청춘극장' '김옥균' '바람 부는 시절' '동학당' 등 총 80여 편의 희곡을 지었다. 신파적 요소가 강한 가정비극, 화류비극이 주류였으나 잘 짜여진 구조에 자연스러운 대화체의 언어를 사용, 큰 인기를 끌었다. 그의 이름만 들어가면 극장이 만석이 될 정도였다. 1940년 '김옥균'을 공연할 때는 무대와 의상 비용이 8000원이나 투입됐고, 경비행기로 홍보전단을 뿌렸다.

1941년 태평양전쟁 시기부터 그는 친일의 길로 들어선다. 조선총독부가 만든 친일 연극 단체 조선연극문화협회의 이사를 맡았으며, 지원병을 찬양하는 작품도 발표했다.

문예봉에 북한에서 출연한 '빨치산 처녀'(1954년)
문예봉은 한때 숙청됐으나 1999년에 사망,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광복 이후의 삶도 부초처럼 시대적 흐름에 휩쓸려갔다. 남조선로동당(남로당) 계열의 예술인들과 함께 활동하던 중, 1948년 정부 수립후 좌익 단체 검거령이 내려지자 아내를 뒤따라 월북했다. 북한에서의 작품은 알려진 게 없고, 폐결핵으로 고생하다 1968년 12월에 56세에 세상을 떴다.

아내 문예봉은 북한에서 비교적 유복한 삶을 누렸다. '빨치산 처녀' '생명수' '돌아오지 않는 밀사' 등 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한때 스승 나운규를 찬양했다는 이유로 숙청됐다가 복권돼, 1999년 82세에 사망,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인민배우라는 직함으로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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