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언어는 마음을 나르는 뗏목

이영숙 시인 2026. 4. 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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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엿보기
이영숙 시인

 마지막 숙제 같은 현지답사를 위해 충북 보은으로 향했다. 조철현 감독의 영화 <나랏말싸미>와 국어학자 정광 교수의 인터넷 강의 '한글 창제를 둘러싼 비밀', 최시선 작가의 《훈민정음 비밀코드와 신미 대사》를 정독하고 '훈민정음 창제설'에 대한 각가지 사료를 공부해 오던 터였다. 지난주 초정 행궁에 이어 이번 행선지는 창제의 숨은 주역, 신미 대사의 발자취가 서린 보은 '훈민정음 마당'과 속리산 복천암이다.

 정이품송 인근에 조성된 '훈민정음 마당'은 왕실과 불가가 맞잡은 세종과 신미의 인연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공간이다. 이곳을 거닐며 영화 속 장면들을 복기해 본다. 유교 국가의 바탕을 흔든다는 유생들의 거센 비난 속에서도 "가장 낮은 곳의 백성에게 제소리를 내는 법을 알려주어야 한다"라던 세종의 집념, 그리고 그 서슬 퍼런 시대적 명제에 응답했던 신미의 고뇌가 겹친다.

 현장의 기록들은 영화보다 입체적이다. 세종과 문종, 한글 보급의 숨은 공로자인 정의공주, 그리고 수양·안평대군까지. 왕실의 핵심 인물들이 신미 대사와 교유하며 글자를 다듬었던 흔적을 훑다 보면, '숭유억불'이라는 서슬 퍼런 시대의 벽도 '백성을 위한 글자'라는 대의 앞에서는 무색함을 깨닫는다.

 국어국문학과 국어교육을 전공했음에도 그간 겉핥기로 알았던 창제 원리를 다시금 짚는다. 아·설·순·치·후(ㄱ, ㄴ, ㅁ, ㅅ, ㅇ)의 오음(五音)을 바탕으로 한 자음 14자와 천·지·인(ㆍ, ㅡ, ㅣ)의 우주적 원리를 담은 모음 10자. 그리고 이제는 사라진 여린히흫(ㆆ), 반치음(ㅿ), 옛이응(ㆁ), 아래아(ㆍ)까지. 이 28자의 체계 안에는 산스크리트어와 티베트어 등 다국어 음운학에 능통했던 신미 대사의 식견이 촘촘히 박혀 있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담아내려 했던 수행자의 고뇌가 문자 하나하나에 맺혀 있는 듯하다.

 세조 길을 따라 한 시간 남짓 걸었을까, 산비탈 언저리 고즈넉한 복천암에 닿았다. 신미 대사의 부도를 만나기 위해 암자 우측 가파른 계단을 휘돌아 300m를 오르자, 세속의 소음이 차단된 고요한 자리에 두 기의 부도가 보인다. 신미 대사 부도인 '수암화상탑'과 제자 학조대사의 부도다. 화려한 장식 대신 단단하고 소박한 석탑의 외형은, 왕실의 극진한 예우를 받으면서도 끝내 산사로 돌아와 수행에 정진했던 대사의 삶을 닮았다. "공(功)은 왕의 것이고, 나는 그저 길을 닦았을 뿐"이라며 담담히 물러나던 영화 속 뒷모습이 오버랩되는 순간이다.

 산사를 내려오는 길, "언어는 마음을 담는 그릇이요, 문자는 그 마음을 잇는 다리이다"라는 문장을 되새긴다. 백성이 제 뜻을 펴지 못함을 가엾게 여긴 세종의 애민과 소리의 이치를 정립한 수행자의 집념이 600여 년의 시간을 넘나들며 산자락에 감긴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이 언어의 풍요는 결코 가벼운 결과물이 아니다. 28자 속에 깃든 숭고한 집념과 '문자로 만백성을 구제하고자 했던' 그들의 진심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오늘을 사는 후손의 도리이다.

 언어가 마음을 나르는 뗏목이라면 그 뗏목이 처음 물길을 잡은 이곳 청주를 '훈민정음특별시'로 지정하려는 목소리도 만백성을 향했던 세종의 숭고한 애민 정신을 기리고 우리 글의 뿌리와 그 속에 담긴 인본주의적 가치를 세계만방에 알리고자 하는 의도이다. 한글은 K-문화를 담아내는 가장 높은 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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