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홀 뚜껑’과 ‘세한삼우’로 리움의 얼굴 바꾼 멕시코 거장

“여기 맨홀 뚜껑을 눈여겨보세요.”
멕시코 출신 현대미술 대가 가브리엘 오로스코(64)는 웃으며 돌로 짠 정원 바닥을 가리켰다. 지난달 30일 오전 매화가 활짝 핀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 신축 야외 정원의 동남쪽 끝자락에서 정원을 설계한 작가를 만나 설명을 들었다. 약동하는 동심원 이미지를 즐겨 드로잉해온 작가의 발치 앞 돌바닥에도 동심원들이 겹을 이뤄 뻗어나간 무늬들이 펼쳐졌고, 그 바닥 중심에 시커먼 금속제 맨홀 뚜껑이 놓여 있었다. 맨홀 뚜껑 역시 크고 작은 동심원들이 어우러진 무늬로 채워졌는데, 그 사이에 ‘SEOUL/상수도 제수밸브’ 글자가 새겨진 모습이 보였다.

“여기는 정원의 끝인 시크릿 파티오(비밀스러운 공간)입니다. 감상의 묘미는 이 맨홀 뚜껑에 있지요. 우리가 발 디딘 땅 밑은 자동차로 차 있는 주차장이고, 그 위가 비밀스러운 정원 혹은 마음의 평화를 주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사람들은 대부분 모르고 지나가잖아요. 싱크홀이나 지하세계를 연상시키는 맨홀 뚜껑을 봄의 정원 바닥에 놓아 지금 여기 땅속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하고 싶었습니다. 일종의 상징적 개입인 것이죠. 맨홀 뚜껑은 과거 서울 거리를 돌아다닐 때 사진으로 찍은 걸 재현한 저의 또 다른 작품이기도 해요.”
지난 3일부터 공개된 오로스코의 정원은 식물의 유기적인 면모와 원형 공간의 기하학적 면모가 어우러졌다. 충남 보령에서 캔 보령석으로 동글동글한 단을 쌓아 앉을 자리를 만들고, 전통 회화의 주된 소재로 ‘세한삼우’로 불리는 매화꽃, 소나무, 대나무 줄기가 자라는 곳도 표시한 파티오(마당) 영역 10군데로 이뤄진 1650㎡(500평)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지난 20여년간 이 자리에는 원래 알렉산더 콜더의 ‘거대한 주름’(2004~2005), 루이즈 부르주아의 ‘엄마’(2005~2012), 애니시 커푸어의 ‘큰 나무와 눈’(2012~2023) 등 세계적 거장들의 기념비적 대형 조각들이 놓여 있었다. 이제 공간의 갱신이 필요한 때가 됐다고 판단한 삼성가 의뢰로 정원 작업을 맡게 된 오로스코는 기존 수직적인 조각 배치에서 벗어나 건축물과 자연·사람의 경험이 공존하는 수평적이고 장소 특정적 작업으로 야외 데크의 의미를 넓히는 시도를 펼쳤다.
1990년대 초 베네치아비엔날레에서 바닥에 빈 신발상자 하나를 놓은 작품을 발표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한 오로스코는 이 시대 가장 명민한 개념미술 거장으로 꼽힌다. 지난 30년간 고정된 작업실을 두지 않고 세계 주요 도시를 누비면서 장소 특정적 작품들을 선보여온 그는 스쳐가는 도시의 일상 풍경이나 잡동사니 사물을 풍부한 울림을 지닌 명품으로 탈바꿈시켜 ‘21세기 미다스의 손’ ‘작가들의 작가’로 불려왔다. 회화, 조각, 설치, 사진, 드로잉, 건축 디자인 등을 아우르며 뉴욕 모마와 런던 테이트모던 등 서구 미술관에서 전시한 바 있고 내년엔 리움 회고전도 예정돼 있다.

리움 정원은 오로스코가 10년간 펼쳐온 정원·조각 프로젝트 중 세번째 작품이다. 2016년 사우스런던갤러리(SLG)에서 방치된 터를 교차하는 원형 패턴으로 만드는 리모델링 작업을 펼친 데 이어, 2019년부터 6년간 멕시코시티 차풀테펙 공원을 세계 최대 규모의 공공 생태 문화 공간으로 꾸려낸 바 있다. 리움 정원은 이전의 두 공간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몸을 움직여 겪고 인식하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되 세한삼우로 대표되는 자연과의 어울림에 더욱 신경 쓴 듯하다. 돌바닥의 원형 패턴을 따라 걷고, 대나무숲에서 쉬고, 계절마다 피고 지는 매화를 보며 ‘공간 안에서 시간을 조직하는 장치’라고 작가 스스로 개념 지은 장소특정적 조경의 진수를 경험하도록 했다. 하나의 원에서 출발한 기하학적 패턴이 데크 전체로 확장되고, 크고 작은 원들이 연결된 10개 공간이 거대한 플라자 혹은 파티오를 형성하는 특유의 공간 분할과 연결의 미학을 펼쳐낸다. 작가의 주문으로 리움 야외 조각 데크 보도를 덮었던 나무 구조물들을 떼어내 정원을 받치는 데크 옆벽에 촘촘하게 붙여놓기도 했다. 이런 재활용 방식을 통해 작가는 정원을 식물이 자라는 거대한 그릇(플랜터)의 개념으로 빚어내는 발상의 전환도 보여줬다.

오로스코는 “대비되는 일상적 요소들에 대한 호기심이 나를 자극한다”고 했다. 인공과 자연, 기하적인 것과 유기적인 것, 질서와 혼돈, 예측가능성과 우연 사이에 일어난 긴장과, 그 긴장 사이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휴먼 스케일로 자신의 작업이 계속 구동된다는 말이었다. 2024년 2월 첫 스케치를 하면서 운을 뗀 리움 정원 설계 작업은 배경으로 존재하는 건축가 마리오 보타와 장 누벨, 렘 콜하스의 각기 다른 미술관 건물들을 이어주는 연결점이자 그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의 몸이 건축물·자연과 상호작용하는 플랫폼을 형성하도록 하는 과정이었다고 한다.
“사물과 인간의 행위는 항상 유동적이라 생각해요. 삶과 죽음,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 유기적인 것과 기하학적인 것 사이에서 꿈틀거리며 흘러가는 인간의 모습들이 결국 정원 공간의 진정한 주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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