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하게 위대하게, 10년 두드려 완성한 걸작

양형모 기자 2026. 4. 5.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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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오프닝. 북한 특수부대 요원들이 혹독한 전투훈련을 받는 장면으로 액션과 아크로배틱이 볼거리를 제공하는 최고의 명장면이다. 사진제공 | 주다컬쳐
[스포츠동아 양형모 기자] 뮤지컬 ‘은밀하게 위대하게: THE LAST’를 은밀하게 보고 왔다. 무려 10주년 공연이다. 10년간 맨땅을 파도 우물이나 유전이 나올 터인데, 한 작품을 10년간 두드렸으니 그 단단함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그것은 수없이 반복된 선택과 버팀의 결과다. 무대에서 보여주는 것들도 그만큼 많아졌다.

이 작품은 시작이 빠르다. “나는 들개로 태어나, 괴물로 길러졌다.” 이 한마디가 공연 전체의 방향을 정리한다. 이어지는 오프닝에서는 북한 특수부대원들의 훈련 장면이 등장한다. 무술동작과 아크로배틱이 긴박하게 펼쳐진다. 최후의 대결신과 함께 이 작품 최고의 볼거리를 제공하는 두 개의 기둥 중 하나다.

이야기는 비교적 익숙하다. 김수현이 주연으로 나온 동명의 영화를 보신 분들도 많을 것이다. 북한 5446부대 요원 세 명이 대한민국 달동네에 숨어든다. 원류환은 동네 바보 ‘동구’, 리해랑은 가수 지망생, 리해진은 학생이라는 설정이다.

초반은 깃털처럼 가볍다. 동구가 심부름 배달을 다니고, 미역국을 먹고, 주민들과 어울리는 장면에서 웃음이 나온다. ‘동구야 배달’ 넘버는 빠른 동선과 반복 동작으로 일과를 보여주는데, 설명 없이도 상황이 이해된다. 똑같은 초록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앙상블이 하나둘 불어나며 정신없이 바쁜 동구의 일상을 표현한 연출도 인상적이다.

뭐니 뭐니 해도 이 작품을 보는 최고의 재미는 액션이다. 체력으로 승부를 보는 작품이다. 무대가 넓어진 만큼 움직임의 범위도 커졌다. 전투 장면에서는 영화와 다른 무대만의 생동감을 만끽할 수 있다. 애당초 편집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기에 배우들 간 타이밍과 합이 매우 중요한데, 국정원 요원과 5446부대가 맞붙는 장면도 황홀할 정도로 멋지다. 배우들의 동선이 전깃줄처럼 얽혀있지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착착 맞아 돌아간다. 서정주 무술감독의 솜씨다.

살인병기로 키워진 북한 특수부대원들. 2층에서 이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인물은 이 작품 최고의 빌런 ‘김태원’이다. 사진제공 | 주다컬쳐
김동준 ‘원류환’, 영빈 ‘리해랑’, 이지함 ‘리해진’, 김수용 ‘김태원’, 성재 ‘서수혁’, 전국향 ‘순임’ 캐스팅으로 보았다. ZE:A 출신 김동준은 ‘올슉업’, ‘드림하이’, ‘캐치 미 이프 유 캔’ 등 이미 다수의 뮤지컬 무대에서 관객과 만난 경험이 있다. 동구가 가진 두 얼굴을 잘 표현했다. ‘제국의 아이들’ 리드보컬 출신답게 음정이 안정적이고 발성은 힘이 있다. 감정이 터지는 장면에서도 무리하지 않는 노련함을 보여주었다.

김수용의 ‘김태원’ 연기는 오래전부터 정평이 나 있다. 이 김태원은 ‘부활’ 김태원과는 사뭇 다른 이미지로, 조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득한 냉혈한이다. 남파된 요원들의 스승이며, 10대 아이들에게 온갖 살인기술을 전수한 인간이다.

김수용의 ‘김태원’은 등장할 때마다 무대의 온도를 2도쯤 떨어뜨리는 존재감을 보여준다. 싸늘하다. 비수가 날아와 요추 4번과 5번 사이를 찌르는 것 같다.

최후의 대전투가 벌어지기 전. 폭풍전야와 같은 평온함은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슬프다. 세 요원이 함께 빨래하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오래 남는다. “형님, 꿈이 뭐예요?”라는 막내의 질문에 원류환은 “평범하게 태어나서, 평범하게 살다가, 평범하게 죽는 것”이라고 답한다. 평범함이 허락되지 않은 운명은 얼마나 가혹한가.

이번 시즌 뮤지컬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확실히 통이 큰 작품이 됐다. 액션, 군무, 무대, 다 쏟아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큰 것 못지않게 작은 것들도 남는다. 밥 먹는 장면, 같이 웃는 시간, 별것 아닌 대사 몇 마디.

10년 동안 이 이야기를 계속 다듬어온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남길 것인지 확실히 알고 만들었다. 엔딩은 담담하고 애틋하다. 그 따스함이 오히려 슬픔의 옆구리를 찌르고 만다. 나는 객석에서 조금은 은밀하게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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