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광고]안성기부터 김연아까지…'맥심'의 얼굴은 달랐다
인간 맥심, 연아 커피까지…브랜드와 모델 동일시
최근 박보영·홍경·안유진 등 세대교체 시작

감미로운 피아노 음악이 흐른다. 어두운 방 안에서 테이블 위로만 은은한 조명이 비친다. 펼쳐진 책 앞에 검은 셔츠를 입은 남자가 앉아 있다. 왼팔로 머리를 살짝 괴고 오른손에 든 스푼으로 흰 커피잔 안을 천천히 휘젓는다. 잠시 후 그는 잔을 들어 올려 천천히 입에 가져간다.
'커피를 알게 될수록 깊은 맛이 좋아집니다'라는 차분한 목소리가 흐른다. 커피를 음미하는 남자의 얼굴이 화면을 채운다. 만족스러운듯한 잔잔한 미소가 번진다. '커피다운 커피, 맥심'이라는 내레이션이 이어진 후 마지막으로 남자가 말한다.
"맥심을 마셔야 커피를 마신 것 같죠."
이 광고는 국민 배우 안성기가 동서식품의 대표 커피 브랜드 '맥심'의 모델로 활동하던 시절의 대표작입니다. 맥심 커피의 깊은 맛을 강조하는 대사가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통해 전달되면서 맥심은 '고급스러운 정통 커피'라는 이미지를 굳힐 수 있었습니다.
지난 1월 안성기 씨가 별세하면서 38년이나 이어온 동서식품과의 인연이 다시 화제가 됐습니다. 동서식품도 "커피 한 잔이 전하는 일상의 여유와 따뜻함을 소비자에게 전달해줬다"며 고인을 추모했죠.
최장수 모델
안성기는 1983년 맥심 모델로 발탁된 뒤 2021년까지 38년간 활동하며 국내 단일 브랜드 최장수 모델이 됐습니다. '맥심은 안성기'라는 공식을 만든 셈입니다. 안성기가 처음으로 동서식품의 모델로 발탁되던 당시는 이제 막 인스턴트커피와 믹스커피가 대중화되던 시기였습니다. 카페 문화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전이라 가정과 사무실에서 마실 수 있는 커피가 인기를 얻기 시작했죠.
그래서 커피 브랜드에게는 고급스러우면서도 일상적인 이미지가 필요했습니다. 동서식품의 경우 광고에 제품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담는 대신 여유와 사색 같은 정서적 가치를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안성기가 맥심의 모델로 발탁된 것도 그의 편안하면서도 신뢰감 있는 이미지 때문이었습니다.

안성기는 무려 38년이나 맥심의 모델로 활약했습니다. 그 사이 "커피, 이제는 향입니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마시고 싶습니다" 같은 카피들이 그의 입을 통해 전달됐습니다. 화려한 연출이나 과장된 표현 없이 커피 한 잔을 음미하는 모습만으로도 소비자들에게 '맥심=좋은 커피'라는 인식을 심었습니다.
안성기 이후에도 동서식품을 대표하는 광고 모델이 여럿 있습니다. 배우 이나영은 2000년부터 2024년까지 24년간 맥심 모카골드 모델로 활동했고요. 배우 원빈은 2008년부터 16년간 맥심 티오피의 모델을 맡았습니다.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는 2012년부터 14년째 맥심 화이트골드 광고를 이어가고 있고요. 배우 공유는 2011년부터 15년째 카누 모델로 활동 중입니다.
물론 동서식품은 시기마다 다양한 톱스타를 광고 모델로 기용했습니다. 2000년대 들어 고소영, 이정재, 장동건, 조인성, 정우성 같은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맥심 광고에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각 제품의 대표 얼굴만큼은 한 사람을 오래 유지하는 '장수 모델' 전략을 이어왔습니다.
브랜드=얼굴
동서식품의 장수 모델 전략은 제품 특성과 모델 이미지를 정교하게 맞추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배우 이나영은 2000년 동서식품이 신제품 맥심 모카골드를 출시할 당시 모델로 발탁됐습니다. 오리지널 커피믹스와는 다른 새로운 제품인 만큼 젊고 신선하면서도 세련된 이미지를 가진 모델이 필요했는데요. 이나영이 여기에 딱 맞는 케이스였습니다.
이나영은 세련되면서도 활기찬 이미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는데요. '여름이니까 아이스 커피, 여름엔 맥심 아이스'라는 CM송도 이나영의 목소리로 기억될 정도로 각인됐죠. 이나영에게는 '인간 맥심'이라는 별명까지 붙었을 정도입니다.
이나영과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는데요. 맥심 모카골드가 인기를 끌자 비슷한 이름의 유사 제품이 시장에 쏟아지던 때가 있었는데요. 이런 '짝퉁' 제품을 사서 먹어보니 맛이 다르다는 소비자들의 항의가 빗발쳤습니다.
이에 동서식품은 아예 제품 패키지에 이나영의 얼굴을 직접 인쇄하기로 했습니다. 이나영의 얼굴이 그려진 제품이 진짜라는 걸 알려주는 수단이었는데요. 브랜드와 모델이 완전히 동일시된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피겨퀸' 김연아 역시 화이트골드 제품이 출시될 때에 맞춰 모델로 기용됐습니다. 무지방 우유를 함유한 화이트골드는 '하얀', '순백' 이미지가 필요했습니다. 동서식품은 당시 '국민 여동생'으로 인기몰이를 하던 김연아를 모델로 택했는데요. "우유만 마시던 연아가 커피를 마신다"는 티저 광고가 화제를 모으며 출시 한 달 만에 매출 100억원을 돌파했습니다.
김연아는 우유 광고 모델로도 활동한 적이 있어 제품 특징을 강조하는 데 적합했다고 하네요. 화이트골드 역시 '연아 커피'라는 별명을 얻으며 높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원빈 역시 2008년 맥심 티오피 론칭 때부터 모델로 나섰는데요. 당시 그의 나이가 30세였습니다. "30세, 에스프레소가 맛있어지는 나이"라는 광고 문구를 앞세워 프리미엄 정통 커피라는 콘셉트를 내세웠습니다. 특히 이후 나온 "이게 그냥 커피라면 이건 TOP야"라는 카피도 여러 분야에서 패러디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카누의 모델인 공유도 론칭 당시부터 카누의 얼굴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카누가 출시된 2011년 당시 인스턴트 커피 시장은 설탕과 우유가 들어간 믹스커피가 대세였는데요. 카누는 블랙 인스턴트 커피로서 '새로운 커피'라는 점을 앞세운 제품이었습니다.
당시 공유는 드라마 '커피 프린스 1호점'으로 커피 이미지가 강한 배우였지만 군 제대 직후라 공백기였다고 하는데요. 이때 카누의 새로운 얼굴로 발탁돼 카누를 대표하는 얼굴이 됐습니다.
변화의 시대
이런 장수 모델 전략을 통해 동서식품은 제품과 모델을 동일시 할 수 있었습니다. 소비자들은 '이나영'을 떠올리면 모카골드를, '공유'를 떠올리면 카누를 자연스럽게 연상했습니다. '연아 커피', '인간 맥심', '카누 바리스타' 같은 별명이 생기면서 브랜드 신뢰감도 커졌죠.
일반적으로 커피 광고 모델에게는 도시적이면서도 따뜻한 이미지가 요구됩니다. 지적인 분위기에 휴식과 사색의 느낌을 줄 수 있어야 하고요. 남녀노소 누구나 마시는 제품이다 보니 전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친숙함도 필요합니다. 동서식품의 장수 모델들은 모두 큰 논란 없이 대중에게 오래 호감을 유지했다는 점도 중요했습니다.

물론 최근 동서식품의 장수 모델 전략도 변화를 맞고 있습니다. 2024년 이나영과 원빈 부부와의 계약이 동시에 종료됐는데요. 동서식품은 24년간 모카골드의 얼굴이었던 이나영 대신 배우 박보영이 새 모델로 발탁됐습니다. 16년간 티오피를 이끌었던 원빈 자리에는 배우 홍경이 들어섰습니다.
맥심의 다른 제품들도 새로운 얼굴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인기 K팝 그룹 아이브의 안유진이 맥심 슈프림골드 모델로 나선 것이 대표적입니다. 동서식품은 젊은 소비자층 공략에 나선 것으로 보입니다. 20대와 30대 초반 소비자들에게 친숙한 모델을 앞세워 세대교체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제품이 세대 교체를 한 건 아닙니다. 김연아는 14년째 화이트골드 모델로 활동하고 있고요. 공유도 15년째 카누의 얼굴입니다. 동서식품은 익숙함과 신선함 사이에서 균형을 찾고 있는 셈입니다. 이렇게 동서식품은 국내 믹스커피 시장에서 여전히 압도적인 1위를 지키고 있습니다. 커피 한 잔을 음미하던 안성기의 모습이 40년 뒤에도 기억되는 이유입니다.
정혜인 (hij@bizwat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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