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열면 나라 뒤집힌다” 박왕열發 판도라의 상자 열리나 [정락인의 사건 속으로]

정락인 탐사저널 사건전문기자 2026. 4. 5.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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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유통의 검은 유착…한국 사회 ‘숨은 이름들’ 겨냥
강남클럽·연예계·수사기관·권력층까지…‘커넥션’의 파장은

(시사저널=정락인 탐사저널 사건전문기자)

드디어 그가 왔다. 3월25일, 새벽부터 인천국제공항은 묘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입국장 앞에는 수많은 취재진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7시16분쯤,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일제히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렸다. 

남색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사내. 양팔에 새겨진 문신과 날카로운 눈매, 고개를 꼿꼿이 세운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취재진을 향해 "넌 남자도 아녀"라고 소리치며 날 선 반응을 보이는 등 위세를 과시하기도 했다. 사법 체계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과 자신감의 표출이다. 그가 바로 필리핀 사탕수수밭에서 3명의 한국인을 권총으로 살해하고, 텔레그램에서 닉네임 '전세계'로 불리며 악명을 떨치던 박왕열(48)이다. 

시사저널은 3월16일 마약왕 박왕열의 실체를 생생히 보도했다(시사저널 1900호 '필리핀 교도소에서 대한민국을 물들이는 마약왕 박왕열의 실체' [정락인의 사건 속으로] 기사 참조). 공교롭게도 본지 보도 열흘 만에 박씨는 국내에 송환됐다. 현지 교도소에서 '황제'로 군림하며 국민 자존심에 상처를 냈던 마약왕의 귀환이다. 박왕열의 송환은 단순히 범죄자 한 명을 데려온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입을 통해 나올 진술은 국내 마약 지도의 실체이자, 정·관계와 연예계 등에 파장을 일으킬 핵심 열쇠가 될 전망이다.

이제 닫혀 있던 판도라의 상자가 어떻게 열릴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그 상자 안에는 피 묻은 돈과 텔레그램 속 은밀한 대화, 그리고 그를 비호해온 검은 그림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박왕열의 등장을 보며 떨고 있을 자들은 누구일까. 

ⓒChatGPT 생성이미지

돈·조폭·권력 결합한 '마약 카르텔'의 실체

박왕열이 마약왕으로 등극한 것은 2016년 필리핀 바콜로드시의 사탕수수밭 살인 사건 이후다. 당시 살해된 피해자들은 국내에서 150억원대 유사수신 사기를 벌이고 현지로 도주한 상태였다. 그들은 거액의 도주 자금을 가지고 있었다. 박왕열은 이들을 살해한 뒤 투자금 명목의 7억2000만원만 빼돌렸다고 주장했으나, 사라진 나머지 100억원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다. 

하지만 이후 박왕열에게는 엄청나게 큰돈이 생겼다.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면 박씨의 자금 원천은 단 한 곳. 피해자들의 도주 자금이다. 이 핏값은 박왕열의 마약 제국을 건설하는 종잣돈이 됐다. 유사수신 피해자들의 눈물 고인 돈이 사기범들의 피를 묻힌 후 박왕열을 통해 마약 자금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거친 것이다. 이것이 다시 국내로 유입돼 덩치를 불리는 악순환의 시작점이 됐다. 이 돈의 흐름을 제대로 추적해야만 박왕열이 세운 거대 마약 세계의 문을 열 수 있다. 

'돈이면 무엇이든 통한다'는 필리핀에서 막대한 자금을 가진 박왕열의 행보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는 필리핀 수감생활 중 두 차례나 탈옥에 성공했다. 무장경찰이 지키는 현지 감옥을 마치 안방 드나들 듯 빠져나온 것은 배후나 조력자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가장 유력한 세력은 현지에 진출한 국내 폭력 조직들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국내 조폭들은 경찰의 수사망을 피하고 사업 다각화를 위해 필리핀이나 베트남 등지에 거점을 마련했다. 이들은 현지에서 카지노 정킷방(카지노 업체에 돈을 내고 빌린 전용 영업장)을 운영하거나 불법 도박 사이트를 관리하며 현지 경찰이나 교도관 등과 뇌물 고리를 형성했다. 박왕열도 피해자들의 투자금으로 정킷방을 열었다가 갈등이 생기자 살해했다. 일각에서는 박씨가 처음부터 피해자들의 도주 자금을 노리고 계획적으로 범행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박왕열이 현지 교도소를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도 조폭들이 손발이 됐기 때문일 수 있다. 그의 탈주는 개인의 도망이 아니라 마약 카르텔을 유지하기 위한 조직적 구출 작전이었을 가능성도 큰 것이다. 실제 2023년 5월, 경찰은 전직 폭력 조직원이 필리핀에서 휴대전화를 이용해 한국 내 중간책을 모집하고 필로폰을 밀반입해 유통시키려던 것을 적발하기도 했다. 

2019년 4월12일 마약 투약 혐의로 구속돼 경찰 수사를 받아온 남양유업 창업주의 외손녀 황하나씨가 검찰 송치를 위해 호송 차량에 오르고 있다. ⓒ연합뉴스

VIP 전용 루트, 강남 클럽과 연예계로 뻗어

박씨의 황제 수감생활도 마찬가지다. 그가 교도소 내에서 스마트폰을 이용해 마약 유통을 지시하거나 관리하고, 에어컨이 나오는 방에서 호화생활을 누린 것은 '돈의 힘'만 가지고는 쉽지 않은 일이다. 국내 조폭들이 구축한 현지 로비망이 박왕열에게 연결되고, 그 대가로 동남아 마약 유통권이 조폭들에게 수익 모델로 제공됐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세력은 'MZ 조폭'이다. 1980년대에서 2000년대 사이에 태어난 이들은 과거처럼 흉기나 야구방망이를 휘두르지 않는다. 대신 컴퓨터 앞에 앉아 불법 도박 사이트를 운영하고 가상화폐를 만지며 돈을 깨끗하게 세탁한다. 거친 폭력 대신 IT 기기와 SNS를 활용해 기업형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이들은 오래전부터 박왕열이 필리핀에서 보낸 마약의 국내 유통망을 관리하고, 판매 대금을 가상화폐로 세탁하는 실무를 담당했을 것이라는 의심을 샀다. 박왕열의 탈옥과 수감생활을 뒷받침한 자금이 다시 국내 MZ 조폭들의 주머니로 흘러들어 조직의 덩치를 키우는 병참기지 역할을 했는지도 살펴야 할 대목이다. 

마약은 수요가 없으면 공급도 끊긴다. 박왕열이라는 괴물을 키운 토양은 바로 우리 사회 상류층의 뒤틀린 욕망이었다. 지금까지 드러난 박씨의 국내 마약 유통망은 '바티칸 킹덤'을 통해 전국으로 뻗어나갔다. 현재까지 검거된 인원만 236명에 달하지만, 여전히 베일에 싸인 지역별 총책과 조직원들은 부지기수다. 바티칸 킹덤이란 우두머리는 잡혀 들어갔지만, 현장에서 마약을 나르던 '드라퍼'(운반책)와 판매책들은 전국 곳곳에 숨어있다. 박왕열은 경찰 조사에서 지능이 낮은 남성까지 꼬드겨 마약을 들여오게 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것은 마약 유통을 위해 무차별로 사람들을 끌어모았다는 뜻이다. 돈 몇백만원에 눈이 멀어 마약왕의 손발이 되었던 조직원이 몇 명이었는지 아직은 가늠하기조차 힘든 것이다. 

이들이 소화전이나 우편함 등을 이용한 '던지기 수법'으로 마약을 유통했다고 알려졌지만, 이것은 눈에 보이는 루트였을 뿐이다. 강남 지역의 유흥가 등에는 이보다 더 은밀하고 직접적인 유통 경로가 존재한다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강남의 대형 클럽과 연예계, 재벌가 자제들이 연루된 특수 루트다. 

이미 남양유업 창업주 외손녀인 황하나가 바티칸 킹덤을 통해 마약을 구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황씨가 연예인들의 마약·성범죄로 논란이 됐던 '버닝썬 클럽'의 단골 고객이었던 것을 감안해 경찰은 박왕열과 버닝썬의 연결고리를 살펴보고 있다. 경찰 수사에서 'VIP 구매자'들의 명단이 얼마나 드러날지는 지켜봐야 한다. 박왕열이 수사 과정에서 이들의 신원이나 접선 장소 등을 토해낼 경우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만약 이 비밀 루트가 실제 존재한다면 이들은 단순히 투약자에 그치지 않고, 자금 지원이나 정보 공유를 통해 박왕열 조직의 생존을 도운 공범 관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경찰은 연예계 기획사 주변이나 사회 지도층 자제들의 사적 모임 공간으로 마약이 직접 배달되는 전용 통로가 있는지를 집중 들여다볼 것으로 보인다. 

박왕열은 과거 언론 인터뷰에서 "내가 입을 열면 대한민국이 뒤집어진다. 옷 벗을 검사도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우리 사법 체계를 비웃는 것이거나 그 안의 치부를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말이 단순한 엄포일 수도 있지만, 범죄자가 해외에서 9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이리저리 수사망을 피하며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 내부 조력자가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국내 수사기관 내부에 수사 정보를 흘려주거나 추적을 무마해준 배후 세력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박왕열과 직접적인 선이 닿지 않았더라도 마약 유통 상선들과 하부 조직은 수사기관과 먹이사슬 형태로 연결됐을 수도 있다. 국내 폭력 조직과 일부 수사기관 관계자들이 오랜 시간 유착을 통해 공생 관계를 맺어온 것도 사실이다. 범죄자는 정보를 얻고, 수사 관계자는 뒷돈을 챙기는 검은 거래의 고리다. 

실제 2008년 12월, 5조원대 다단계 사기를 친 조희팔이 중국으로 밀항했고, 이후 그의 사기와 밀항 등 과정에서 수사 정보를 제공하거나 편의를 봐준 수사기관 관계자들이 줄줄이 드러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심지어 조희팔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관은 거액의 뇌물을 받고 조희팔이 밀항한 이후에도 21차례나 중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것은 오래전부터 범죄자들과 수사기관 종사자들이 유착된 먹이사슬의 한 형태다. 

3월27일 박왕열이 의정부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치고 나오고 있다. ⓒ시사저널 임준선

"박왕열이 비웃던 국가 공권력의 살아있음을 증명할 기회"

박왕열이 필리핀에서 마약왕으로 군림하는 동안 우리 공권력이 왜 무력했는지, 그가 교도소 안에서 어떻게 외부 수사 상황을 훤히 꿰뚫고 있었는지도 수사를 통해 밝혀야 할 내용이다. 박왕열이 언급한 '옷 벗을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가 죽인 피해자들의 핏값과 마약 유통으로 축적한 막대한 범죄 수익이 누구의 주머니로 들어갔는지 밝혀내는 것이 이번 수사의 최종 목적지다.

이번 수사의 끝에서 박왕열이 말한 "대한민국을 뒤집어놓을 진실"이 투명하게 공개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수사기관에 주어진 시간도 많지 않다. 임시 인도 기간은 6개월에 불과하다. '임시 인도'는 피청구국(필리핀)에서 재판이나 형 집행이 진행 중인 범죄인을, 청구국(한국)이 수사와 재판을 위해 잠시 신병을 넘겨받는 제도다. 한국에 들어오면 한국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형량을 선고하는 과정은 정상적으로 진행되지만, 이 절차가 끝나면 반드시 돌려보내야 한다. 

이 기간 안에 박왕열이 구축한 거대 카르텔의 뿌리를 얼마나 뽑아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단순한 마약 투약자 몇 명을 잡아넣는 수준의 '꼬리 자르기' 수사는 국민적 분노만을 키울 뿐이다. 

박왕열은 개인이 아니라, 국내외 폭력 조직과 부패한 권력, 그리고 뒤틀린 상류층이 결합해 만들어낸 '범죄의 몸통'이다. 수사 당국은 박왕열의 입과 휴대전화, 그리고 자금 흐름을 낱낱이 파헤쳐 국내 마약 유통의 실체를 완전히 드러내야 한다. 전문가들은 "이번 수사는 박왕열이 비웃던 국가 공권력이 살아있음을 증명할 기회"라고 입을 모은다. 우리 사회에 깊숙하게 퍼져 있는 마약이라는 독버섯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 뿌리가 닿아있는 검은 성채를 통째로 무너뜨려야 한다.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통해 범죄자를 국내로 데려오고, 수사기관이 수사에 나선 지금, 멈춰있던 정의의 시계가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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