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의 하위주체는 어떻게 저항을 말하는가

4·3의 하위주체가 '구연적 재현'을 하는 가운데 자주 상기하고 힘주어 강조하곤 하는 대목이 있다. 언어절의 지옥 속에서도 하위주체로서 여성은 토착 제의인 제사와 굿을 수행하면서 4.3의 예외적 한계 상황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견뎌나갔던 것이다. 이 토착 제의를 수행하는 것은 4·3 당시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4·3사건으로 인해 1954년 한라산 금족령이 풀린 후에도 4·3의 하위주체들은 그 무간도의 지옥에 대한 창조적 저항의 현재성을 수행하는 그들만의 오래된 미래의 방식으로 토착 제의를 수행한다.
가령, 제주의 대지모신(大地母神)을 모시는 송당 본향당의 굿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던 토벌대 대장에 관한 구술과, 4·3 당시 집단 학살터로 이송당하는 아버지에게 말을 듣고 아버지가 남긴 돈을 씨앗돈으로 하여 아버지 원혼을 위무하고 추도하는 일련의 제의―대소상, 삭제, 제사, 명절 차례―를 지내며 살아온 삶의 내력에 관한 구술에는, 표면상 당시 역사의 광풍에 대한 정치사회학적 인식은 드러나 있지 않다. 대신, 참혹한 어려운 시기를 여성 하위주체들이 일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말할 따름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주시할 '구연적 진실'이 그들의 말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4·3 당시 국가권력을 참칭하는 토벌대가 산부대를 무차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그래서 한라산 중산간 부락(송당 마을도 해당)의 원주민을 대한민국의 비국민(非國民)으로 배제하는 국민국가의 정치적 폭력이 자행되었다. 그런데 송당 본향당의 굿이 4·3 당시뿐만 아니라 이후 지속적으로 연행되고 있다는 것은 송당이란 한 마을을 지켜냈고 송당의 신격(神格)과 그 제의를 무사히 보전하고 있다는 차원이 아니라 적성(赤城/敵城) 지대로 간주된 중산간 부락이 국민국가의 근대적 폭력으로 결코 완전히 소멸될 수 없다는 섬공동체의 삶의 욕망과 의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제주의 대지모신을 토착 제의의 위력으로써 근대적 폭력을 저지했다는 것은 4·3혁명이 비록 현실적으로는 국민국가의 근대적 폭력에 패배했지만 그 미완의 혁명이 지닌 가치가 섬공동체의 일상 속에 시나브로 스며들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섬공동체의 일상이 비단 굿 외에도 다른 토착 제의와 함께 여성 하위주체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지속되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근대의 국민국가가 가부장중심의 남성 질서가 근간을 이루는데 반해 제주의 여성 하위주체들은 이 근대 가부장중심의 남성 질서를 답습 및 판박이하는 데 있지 않고 남자가 부재한 것을 대신하여 '가모장적(家母長的, matriarchal) 공간'을 주도적으로 창출하고 그에 부합하는 토착 제의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부장중심의 남성 질서에 순응하고 이를 재현하는 게 결코 아니다. 그보다 근대의 폭력에 섬공동체의 바탕과 근간이 절멸되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제주 섬공동체의 여성 하위주체로서 저항의 정동이 예의 토착 제의를 수행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게 온당하다.
그런가 하면, 하위주체의 '4·3증언서사' 중 4·3항쟁에 직접 연락병으로서 참여한 여성 항쟁주체의 목소리는 '탈식민‒냉전'에 대한 정치사회학적 상상력을 보여준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4‧3사건을 항쟁사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는 정치역사적 맥락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증언자는 당시 그의 아버지와 항쟁 주체들 사이에 주고받은 대화를 기억해낸다. 증언자의 아버지는 일제 식민 시기 고향을 떠나 일본에 가서 공장을 운영하며 조국 해방을 맞이하자마자 고향으로 귀국하였는데 4·3항쟁이 일어난 해 집단 학살을 당하였다. 구술자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서 주목되는 것은 그가 일본이 2차 대전에 패망하는 전후의 국제 정세를 나름대로 파악하고 있듯,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에 드리우기 시작한 미국과 옛 소련 중심의 냉전체제의 징후 속에서 민족분단이 이들 제국의 패권에 의해 현실화될 것을 심각히 우려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민족분단에 대한 래디컬한 저항으로 한반도의 남과 북의 정세와 동아시아를 에워싼 냉전체제에 대한 주도면밀한 이해와 전략적 접근 없이 자칫 섬공동체의 파국을 초래할 수 있는 민중봉기를 적극화하는 남로당 제주도당(濟州島黨) 항쟁 지도부의 혁명적 모험주의를 경계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전혀 가능성이 없지 않은 해방공간 당시 김구를 중심으로 한 남북협상파의 정치사회적 움직임을 중시했다고 한다.
이렇듯이, 여성 하위주체의 '4·3증언서사' 중 4·3항쟁을 동아시아의 냉전체제와 국제 정세 및 당시 남로당 제주도당의 동향을 포괄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 증언이 소중한 것은 도당(島黨) 내부에서 4·3항쟁에 대한 혁명적 모험을 적극화하는 항쟁 지도부에 대해 이것을 경계하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이고, 당시 김구가 함의하는 남북협상을 통한 평화적 통일독립에 대한 정치적 기대를 가졌다는 사실이 여성 하위주체의 구술로 표면화된 것이다.
끝으로, 문학적 차원에서 4·3의 하위주체의 '4·3증언서사'를 살펴보면서 아쉽고 안타까웠던 것은 구술자의 증언이 표준어를 중심으로 채록·표기되고 있는바, 표준어로 표기될 경우 표준어가 미치는 문자성의 파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듯, 표준어와 근대 국민국가의 상상력 사이의 인력(引力)이 강해 '4·3증언서사' 자체뿐만 아니라 4·3의 하위주체를 구미중심의 근대 국민국가의 상상력으로 구속한 가운데 정작 '증언서사'로서 문학적 진실, 즉 '구연적 진실'의 힘을 약화할 수 있다. 따라서 표준어 중심의 문자성 위주의 표기를 지양하여 하위주체의 생동감 있는 정동의 구술성을 표기하는 것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덧보태자면, 증언자가 구술하는 가운데 수반하는 아주 사소한 '구연적 재현'도 놓치지 않고 구술 속에 표현해야 한다. 왜냐하면 구술자의 '구연적 재현'에는 (비)언어적 표현을 망라한 재현이 모두 소중한바, 특히 하위주체에게 이러한 '구연적 재현'은 필설로 다 할 수 없든지 아예 필설이 허락되지 않는 예외적 한계 상황을 하위주체만의 방식으로 '구연적 진실'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문화인류학 및 정치사회학의 접근과 달리 (비)언어적 표현을 거느린 문학으로서 '구연적 상상력'에 미치는 구술성의 몫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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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철
1998년 『월간문학』 신인문학상이 당선되면서 문학평론가 등단. 현재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저서로는 『세계문학, 그 너머』, 『문학의 중력』, 『뼈꽃이 피다』, 『칼날 위에 서다』 등 다수. 4.3문학 및 트리콘티넨탈문학(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문학)을 세계문학의 관점에서 심화 확장하는 연구와 비평 활동을 하고 있다. 'DMZ세계문학페스타 2026' 공동집행위원장과 국립 아시아문화전당의 아시아문학포럼 운영위원.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성균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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