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정극에 머물지 않는다…자본·권력 탐하는 여성 빌런들의 진화
(시사저널=정덕현 문화평론가)
최근 빌런(스토리 내 악역) 역할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여성 캐릭터들이 눈에 띈다. 《클라이맥스》 차주영, 《대한민국에서 건물주 되는 법》 심은경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이 구현하는 여성 빌런은 과거와 사뭇 다른데, 그 핵심은 '탈(脫)성별화'에 있다.
"내가 방태섭을 어떻게 밟아야 가장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망하게 할까 고민을 좀 해봤거든? 그런데 그 답이 추상아 당신이더라. 그 인간이 가장 아끼는 걸 내가 망가뜨리는 거야."
ENA 월화드라마 《클라이맥스》에서 이양미(차주영 분)는 자신이 뒤에서 밀던 서암시장 남혜훈(윤사봉 분)의 성 상납 비리를 방태섭(주지훈 분) 검사가 폭로하자, 그의 아내인 배우 추상아(하지원 분)에게 이렇게 협박한다. 이 장면은 여성과 여성의 대립처럼 보이지만, 이양미라는 빌런이 그런 협박을 하는 건 치정 때문이 아니다. 거대한 권력을 손에 넣으려는 욕망 때문이다.

막후의 실력자 꿰찬 여성 악당들
이양미는 자신의 욕망이 방해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방태섭은 물론, 추상아까지 조각조각 파괴하려 한다. 그간 드라마에서 여성 빌런은 주로 '여적여(여성의 적은 여성)' 프레임에 갇혀 남성을 둘러싼 치정 갈등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이양미는 권력을 향해 무한질주하며 기존의 틀을 깨고 있다는 점에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만든다. 새로운 여성 빌런의 면면이 보여주는 통쾌함이랄까.
이양미는 대한민국 최상위 권력 카르텔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전략가형 빌런으로, 권력자에게 기생하거나 아부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WR호텔 사장이자 WR그룹 실세라는 압도적인 자본주의적 지위를 바탕으로 정치·자본·연예계가 촘촘하게 교차하는 거대한 권력의 판을 직접 설계하고 통제한다. 서암시장을 지원해 차기 대권주자로 세우려는 그의 모습은 과거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킹메이커' 혹은 '막후의 실력자' 포지션을 이 여성 빌런이 채우고 있다는 걸 말해 준다.
이 드라마는 대한민국 최고 권력을 노리는 검사 방태섭의 무한질주를 그린다. 이양미는 방태섭의 반대편에 서서 자신이 그 권력을 쥐려고 한다. 상황에 휘둘리기보다는 판의 흐름을 냉철하게 읽어내고, 자신에게 유리한 선택을 만들어내는 전략가의 면모를 보여준다. 판이 흔들리는 순간에는 회피하는 대신 과감하고 파괴적인 선택도 서슴지 않는다.
이 캐릭터가 주목받는 이유는 남성 빌런을 대입해도 이질감이 없을 만큼 '탈성별화'됐기 때문이다. '여적여' 프레임에 갇혀 있거나, 멜로 드라마의 문법 안에서 주인공의 순수성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평면적인 배신자 역할로 소비되던 과거 여성 빌런들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이 여성 빌런은 연애 감정이나 치정, 사적인 질투 같은 동기가 아니라 자본 축적, 정치적 권력 장악, 무자비한 생존 투쟁, 순수한 지배욕 같은 주체적인 욕망에 의해 움직인다.
tvN 토일드라마 《대한민국에서 건물주 되는 법》의 요나(심은경 분)라는 여성 빌런 역시 마찬가지다. 겉으로 보기에는 자본주의가 낳은 무자비하고 냉혹한 괴물로서 상부 지시를 받는 실무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요나는 자신의 욕망을 거스를 때는 상관마저 가차 없이 제거하는 능동적인 빌런이다. 이 인물은 첫 장면에서부터 건물주를 협박하는 섬뜩한 모습으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대규모 재개발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들어온 해외자본의 폭력을 대리하는 이 빌런은 '영끌'해 간신히 생계형 건물주가 된 주인공 기수종(하정우 분)을 벼랑 끝까지 몰아넣는 악당이다. 요나라는 빌런의 특별함은 마치 무감정한 자본 속성을 그대로 내면화한 인물처럼 보이는 데서 나오는 사무적인 살벌함에 있다. 협박하면서도 정중한 척 존대하고, 앞에서는 고개를 조아리면서도 뒤에서는 언제든 칼을 꽂을 것만 같은 모습이다.
6년 만의 한국 드라마 복귀에 생애 첫 악역으로 도전한 심은경은 독보적인 연기로 이 능동적인 빌런의 아우라를 만들었다. 섬뜩한 잔혹함에 아이 같은 순수함이 뒤섞이고, 살벌한 성실함이 더해진 사이코패스로 복합적인 양면성을 부여한 것이다. 그런데 요나라는 여성 빌런 역시 과거의 통속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있다. 오직 건물을 차지하려는 자본의 맹목적 논리와 파괴적 본능에만 충실한 모습이다. 게다가 이 빌런은 뒤에서 지시를 내리는 데 머물지 않고 물리적인 폭력도 서슴지 않는다. 마치 그 폭력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욕망의 성차를 지우다
물론 이런 빌런의 모습은 그동안 누아르나 범죄 스릴러 장르에서 남성 악당들의 전유물처럼 그려진 바 있다. 하지만 요나는 생글생글 웃는 앳된 여성의 얼굴로 가장 끔찍하고 잔인한 방식의 협박과 폭력을 자행한다. 요나는 성별의 틀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절대 악 그 자체로, 시청자들에게 서늘한 공포를 선사하는 새로운 차원의 여성 빌런이다.
탈성별화된 여성 빌런의 등장은 최근 몇 년 사이 부쩍 눈에 띈다. 《더 글로리》에서 타인이 겪는 육체적·정신적 고통에 무감각한 사이코패스로서 그저 부모에게 물려받은 거대한 부와 계급적 우월성을 즐기는 빌런 박연진(임지연 분)이 그렇다. 《파인: 촌뜨기들》에서 1970년대를 배경으로 우아한 척하는 젊은 사모님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 노골적이고 추악한 욕망을 숨기고 있는 양정숙(임수정 분)도 마찬가지다. 주로 남성들의 세계로 그려지곤 했던 정치 드라마 역시 예외가 아닌데, 《돌풍》 같은 작품에서 한때는 정의감에 불타던 학생운동권 출신이었지만 갈수록 부패한 기득권 세력이 되어가는 정치형 빌런 정수진(김희애 분)이 그 사례다.
남성 전유물처럼 여겨져 오던 빌런 역할을 이제 여성 빌런들이 맡게 된 데는, 그만한 극적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도 제작자들에겐 매력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사실 조폭이나 부패 정치인 등 남성 빌런들이 보여주는 악행들은 어느 정도 패턴화돼 클리셰처럼 느껴지는 면이 있다. 하지만 '여적여' 프레임 같은 틀을 벗어난 본격적 여성 빌런은 지금껏 많이 그려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신선하게 다가온다. 허를 찌르는 전개가 가능하고,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이 공포와 긴장감을 유발한다.
이양미나 요나의 모습에서 느껴지듯, 이들 빌런은 그간 틀 안에 갇혀 꺼내 놓지 않았던 욕망을 마구 꺼내 보여준다는 점에서 폭발적인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해준다. 여성에게 강요됐던 '무해함'이나 '온건함' '모성애' 같은 사회적 금기들을 무참히 짓밟고 통제되지 않는 날것의 욕망을 발산하는 데서 오는 매력이다. 여성 빌런은 여성 연기자들에게 연기 스펙트럼을 넓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악역을 하지 않았던 심은경이나 임수정 같은 배우들은 이런 역할을 통해 자신에게 고정된 이미지를 깨고 좀 더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는 배우로 거듭날 수 있었다.
사실 작품 속 빌런은 비뚤어진 형태일지언정 당대 사회가 품은 '욕망의 인간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와 권력에 대한 욕망이 비뚤어진 괴물을 탄생시키는 이유다. 따라서 과거 여성 빌런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그들이 발현하는 욕망이 감정적이고 사적이며 소소한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은 실제 현실에서 욕망의 성차(性差)가 분명히 존재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제 그 욕망의 성차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탈성별화된 여성 빌런, 이른바 '젠더리스 빌런들'은 이 시대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선명한 징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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