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판 위에 놓인 첫사랑의 기억⋯연극 ‘십번기’, 상처와 성장의 대화로 풀어[리뷰]

장선 기자 2026. 4. 5.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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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시립예술단, 1987년 수원 남문중 교실과 기원 오가는 단단한 성장기 “호평”
▲ 수원시립예술단이 정조테마공연장에서 3~5일까지 무대에 올리는 연극 십번기 단체 사진.

수원시립예술단이 선보인 연극 '십번기'가 바둑을 매개로 한 관계의 서사를 통해 성장과 치유의 의미를 전했다. 

작품은 2002년 장안일보 편집국 기자 정훈이 문화부 취재를 맡아 경기도문화의전당을 찾으면서 시작된다. 무대 위에서 중학교 시절 첫사랑 연희를 마주한 순간, 기억은 1987년 남문중 3학년 교실로 되돌아간다.
▲ 연극 십번기 주인공 정훈역 장준혁(왼쪽), 최연희역 최다영.
왁자지껄한 교실에 전학 온 연희는 미술시간 물감이 사라지는 소동 속에서도 묘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후 동네 기원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은 바둑을 통해 관계를 이어간다. 연희는 서울법대에 다니는 흥식 형과의 대국에서 승리하며 실력을 드러내고, 훈은 기원 사범의 제안으로 연희와 '십번기'를 시작한다.
▲ 연극 십번기 남문중 친구들.

두 주인공의 대국은 단순한 승부를 넘어 감정의 축적 과정으로 확장된다. 훈은 다섯 판을 연달아 패하며 자신이 지켜온 세계에서 흔들린다. 바둑판 위에서의 패배는 곧 내면의 균열로 이어진다. 반면 연희는 담담한 태도로 자신의 삶을 드러낸다. 어머니의 부재, 기원을 운영하던 아버지와의 생활, 바둑을 통해 버텨온 연희의 시간은 인물의 결을 더욱 또렷하게 만든다.

두 인물은 돌을 놓고, 닦는 반복 속에서 서로의 상처를 확인한다. 공부를 강요받으며 쌓인 훈의 압박감, 외로움 속에서 성장한 연희의 고독이 교차한다. 감정은 과장되지 않는다. 짧은 대사와 정적인 장면이 오히려 관계의 밀도를 높인다.

연희가 던진 말은 작품의 핵심을 관통한다. "바둑은 둘만의 대화"라는 정의는 곧 인간 관계의 본질로 확장된다. 마주 앉아야만 가능한 소통, 혼자서는 완성할 수 없는 관계의 구조가 바둑판 위에 구현된다. 이는 첫사랑의 감정과도 맞닿는다.

연출을 맡은 권호성 감독은 "이 작품은 승패를 다루는 이야기가 아니라 관계를 배워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바둑판은 인물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공간이자, 감정을 드러내는 무대 장치다"고 설명했다. 이어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조를 통해 기억이 현재를 어떻게 흔드는지 보여주고자 했다"고 밝혔다.
▲ 연극 십번기 무대 위 8조각 배경은 유려하게 흐르면서 또 다른 주인공 역할을 한다.

무대는 교실과 기원을 오가며 시간의 층위를 자연스럽게 겹친다. 홍지현 안무는 신체 움직임을 통해 감정의 간극을 시각화했고, 김보경 무대감독은 최소한의 장치로 공간 전환의 리듬을 살렸다. 장준혁(정훈 역)과 최다영(연희 역)은 절제된 연기로 인물의 내면을 밀도 있게 구축했다.

'십번기'는 바둑이라는 소재를 통해 인간관계와 감정의 본질을 되짚는다. 승부의 긴장 대신 대화의 깊이를 택한 선택이 작품의 방향을 규정한다. 바둑판 위에 놓인 돌 하나하나가 기억과 감정의 흔적으로 남는다. 결국 이 무대는 첫사랑의 회상이 아닌,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글·사진 장선 기자 now482@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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