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판 위에 놓인 첫사랑의 기억⋯연극 ‘십번기’, 상처와 성장의 대화로 풀어[리뷰]

수원시립예술단이 선보인 연극 '십번기'가 바둑을 매개로 한 관계의 서사를 통해 성장과 치유의 의미를 전했다.


두 주인공의 대국은 단순한 승부를 넘어 감정의 축적 과정으로 확장된다. 훈은 다섯 판을 연달아 패하며 자신이 지켜온 세계에서 흔들린다. 바둑판 위에서의 패배는 곧 내면의 균열로 이어진다. 반면 연희는 담담한 태도로 자신의 삶을 드러낸다. 어머니의 부재, 기원을 운영하던 아버지와의 생활, 바둑을 통해 버텨온 연희의 시간은 인물의 결을 더욱 또렷하게 만든다.
두 인물은 돌을 놓고, 닦는 반복 속에서 서로의 상처를 확인한다. 공부를 강요받으며 쌓인 훈의 압박감, 외로움 속에서 성장한 연희의 고독이 교차한다. 감정은 과장되지 않는다. 짧은 대사와 정적인 장면이 오히려 관계의 밀도를 높인다.
연희가 던진 말은 작품의 핵심을 관통한다. "바둑은 둘만의 대화"라는 정의는 곧 인간 관계의 본질로 확장된다. 마주 앉아야만 가능한 소통, 혼자서는 완성할 수 없는 관계의 구조가 바둑판 위에 구현된다. 이는 첫사랑의 감정과도 맞닿는다.

무대는 교실과 기원을 오가며 시간의 층위를 자연스럽게 겹친다. 홍지현 안무는 신체 움직임을 통해 감정의 간극을 시각화했고, 김보경 무대감독은 최소한의 장치로 공간 전환의 리듬을 살렸다. 장준혁(정훈 역)과 최다영(연희 역)은 절제된 연기로 인물의 내면을 밀도 있게 구축했다.
'십번기'는 바둑이라는 소재를 통해 인간관계와 감정의 본질을 되짚는다. 승부의 긴장 대신 대화의 깊이를 택한 선택이 작품의 방향을 규정한다. 바둑판 위에 놓인 돌 하나하나가 기억과 감정의 흔적으로 남는다. 결국 이 무대는 첫사랑의 회상이 아닌,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글·사진 장선 기자 now482@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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