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별된 문장의 힘, 《쥬디할머니》가 다시 불러낸 박완서 작가의 세계

이혜미 기자 2026. 4. 5.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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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디할머니》 박완서 작가 지음 , 문학동네, 2026년 1월 (이미지=출판사)

[한국독서교육신문 이혜미 기자]

 이 책은 97편에 이르는 박완서 작가의 단편 가운데 한강을 비롯한 31명의 소설가들이 추천한 10편을 모아 기획 출간된 작품집이다.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이 작품집은 여러 작가들이 각자의 시선으로 다시 읽어낸 박완서 문학의 핵심 단편을 엄선해 담아낸 기획으로, 작가의 문학적 깊이와 현재성을 함께 보여주고자 한 데 의미가 있다.

한 작가의 작품을 또 다른 작가들이 다시 고르고 읽어낸다는 점에서 이 책은 단순한 선집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온라인 서점가 독자 리뷰에서도 이러한 특징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짧은 이야기지만 쉽게 잊히지 않는다", "읽고 나면 오히려 더 많은 생각이 남는다"는 반응은 이 작품집이 지닌 밀도와 여운을 잘 보여준다. 빠르게 소비되는 글과 달리,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읽는 순간보다 읽은 이후의 시간이 더 길게 이어지는 특성을 지닌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크게 느껴지는 점은 일상의 사소한 장면 속에서도 인간의 내면을 깊고 날카롭게 포착해낸다는 점이다. 등장인물들은 극적인 사건 속에 놓여 있지 않지만, 그들의 말과 행동, 그리고 말하지 않은 침묵까지도 의미를 지니며 독자의 시선을 붙든다. 자칫 평범해보이는 사람들의 일상은 끊임없는 선택의 기로와 좌충우돌의 연속이다. 그 안에서 드러나는 감정의 결은 결코 가볍지 않고,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며 각자의 특별한 이야기로 남는다.

특히 인물들이 보여주는 감정과 판단은 낯설기보다 익숙하게 느껴진다. 관계 속에서의 거리감, 쉽게 내리지 못하는 선택, 그리고 지나간 뒤에야 돌아보게 되는 마음의 흔적들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독자는 이야기를 읽는 동시에 자신의 삶을 함께 떠올리게 된다. 어떤 장면에서는 이미 지나온 시간을 다시 마주하는 느낌을 받기도 하고, 어떤 순간에는 아직 말하지 못한 감정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 나이로 불혹을 넘긴 작품이 대다수이고 상황과 조건은 지금과는 다른 시대의 작품이지만 현재와의 간격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역시 작가의 통찰력 때문일 것이다.

요즘은 일정한 형식과 메시지를 중심으로 빠르게 만들어지는 글들도 많다. 읽기에는 편하지만 금세 잊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쥬디할머니》는 그와 다른 방향에 서 있다. 문장마다 시간이 축적되어 있고, 감정이 켜켜이 쌓여 있어 쉽게 지나칠 수 없다. 한 편을 읽고 나면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때부터 생각이 이어진다.

이 작품집은 읽는 이에 따라서는 화려하거나 자극적일수도 있고 담담하게 이어지는 문장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어느 지점에서는 가슴 깊은 울림을 느끼며 작가의 통찰력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한 번 읽고 덮기보다는, 시간이 지난 뒤 다시 펼쳐보고 싶어지는 책으로 남는다. 《쥬디할머니》는 그렇게 독자의 시간 속에 머물며, 조용하지만 분명한 방식으로 오래 지속되는 감정을 머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