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팔면 내가 만든다"…괴짜 억만장자의 집념이 빚은 '이네오스 그레나디어'[야! 타 볼래]
스마트 SUV 시대에 등장한 원초적 운전의 즐거움
BMW 엔진·마그나 슈타이어 기술력으로 높은 완성도

세상은 온통 편리함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차가 스스로 주차를 하고 앞차와의 간격을 알아서 맞추며 심지어는 운전자가 졸고 있으면 따끔하게 경고까지 해주는 시대입니다. 자동차는 이제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바퀴 달린 스마트폰'이 되기를 자처합니다. 첨단 센서가 모든 위험을 걸러내는 '온실 속 주행'에 익숙해진 나머지, 인간의 의지로 거친 자연에 도전하고 그 끝에서 맛보던 정복의 희열은 잊힌 지 오래입니다. 오늘 소개할 이네오스 그레나디어는 편리함을 거부하고 모험을 선택한 이들을 위한 가장 무식하고도 명쾌한 해답입니다.
이 차를 이해하려면 먼저 한 남자의 광기 어린 집념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주인공은 영국 최대 화학 기업 이네오스 그룹의 수장, 짐 래트클리프입니다. 그는 자산만 수십 조원에 달하는 억만장자이자 지독한 자동차 마니아입니다. 특히 그는 랜드로버의 전설적인 오프로더 디펜더(특히 구형 모델)를 사랑하다 못해 숭배하는 수준이었죠. 그런데 2016년 일이 터졌습니다. 랜드로버가 환경 규제와 안전 기준을 이유로 1세대 디펜더 생산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박스형 차체에 동그란 헤드램프, 외부로 드러난 도어 힌지까지. 차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지프나 구형 디펜더를 떠올릴 만한 디자인입니다. 하지만 올드 디펜더의 '정신적 후계자'를 자처하는 모델답게, 완전히 새로운 브랜드임에도 전반적인 인상은 익숙하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단순한 복제품을 넘어섭니다. 래트클리프 회장은 겉모습만 흉내 내는 데 그치지 않고 21세기에 걸맞은 내구성을 가진 기계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생 브랜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최고의 파트너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문을 열고 운전석에 오르는 순간 시간은 단번에 과거로 회귀합니다. 화려한 앰비언트 라이트로 멋을 부린 요즘 SUV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인테리어가 압권인데요. 센터패시아부터 천장까지 빼곡하게 들어찬 물리 버튼이 마치 육중한 탱크의 조종석에 들어앉은 듯한 기분이 들게 합니다. 터치스크린 하나에 모든 기능을 몰아넣어 운전 중 눈을 돌려야만 하는 디지털 방식에 찌든 요즘 차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직관성을 자랑합니다. 큼지막한 다이얼과 레버는 조작할 때마다 '딸깍', '찰칵' 소리가 나는데, 이러한 기계적인 피드백이 전해주는 묘한 안정감에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대시보드 위에는 흔하디흔한 계기판조차 없습니다. 운전대 뒤편에는 '텔 테일(Tell-Tale)'이라 불리는 손바닥만 한 작은 LCD 패널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차가 자기 상태를 은근슬쩍 티 내는 신호라는 의미를 담은 이 명칭이 지극히 영국스럽고 투박하다는 감상입니다. 속도나 RPM 같은 정보는 센터패시아 중앙의 디스플레이를 통해 확인해야 하죠.

편의 사양을 찾다 보면 허탈한 웃음이 나옵니다. 겨울철 필수품인 핸들 열선은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선바이저를 내리면 거울조차 없습니다. "거울 볼 시간 있으면 앞이나 똑바로 보고 운전하라"는 제작자의 호통이 들리는 듯합니다. 정차 시 발의 피로를 덜어주는 오토홀드 기능도 없고, 크루즈 컨트롤은 앞차와의 거리를 조절해 주는 어댑티브 기능이 빠진 아주 기초적인 형태입니다.
대신 천장에는 항공기 조종석을 방불케 하는 수많은 물리 버튼이 배열되어 있습니다. 디퍼렌셜 락을 걸거나 각종 오프로드 장비를 제어하는 버튼들은 두꺼운 공업용 장갑을 낀 상태에서도 확실히 조작할 수 있도록 큼지막하게 설계되었습니다. 이 차는 도심에서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부리는 차가 아닌, 아프리카 사막이나 알래스카의 설산을 넘기 위해 태어났음을 온몸으로 웅변하고 있습니다.

타이어가 푹푹 빠지는 진흙길에서 그레나디어는 BMW 가솔린 엔진의 강력한 힘으로 밀어붙이며 손쉽게 탈출합니다. 전자장비가 세심하게 개입하여 운전자를 보조하기보다는, 기계적인 사륜구동 시스템이 노면을 꽉 붙잡고 우직하게 나아가는 느낌이 강합니다. 차체가 뒤틀리는 소리 하나 없이 바위를 타고 넘는 견고함은 왜 이 차가 마그나 슈타이어의 손길을 거쳤는지 증명합니다. 운전자에게 "나와 함께라면 당신은 어떤 길이든 갈 수 있다"는 무한한 신뢰를 심어줍니다.

그레나디어는 결코 대중적인 차가 아닙니다. 백화점 발렛 파킹을 맡기거나 아이들의 등하교용으로 쓰기에는 너무나 불편하고 거칠며 투박합니다. 하지만 이 차에는 요즘 그 어떤 고급 차에서도 느낄 수 없는 영혼이 깃들어 있습니다. 효율성과 수익성만을 따지는 거대 자동차 기업들은 절대 만들지 못할, 오직 한 마니아의 고집과 집념이 빚어낸 결정체이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모두 전기차의 정숙함과 자율주행의 편안함을 이야기할 때, 그레나디어는 기름 냄새 풍기며 거친 숨을 내뱉는 기계 본연의 즐거움을 말합니다. 편리함보다는 강인함을, 화려함보다는 신뢰를 택한 이 차의 태생적 성격은 독보적입니다.

권지용 기자 senna@newsw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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