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복은 누구를 위한 옷인가

이은선 2026. 4. 5.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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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의 ‘틀을 벗어난’ 칼럼] 몸에 입히는 ‘학생다움’의 규율

학교 교칙을 보면 여학생 규정과 남학생 규정이 따로 있다. 그런 걸 보면 학교와 사회가 학생들이 어떻게 행동하기를 원하는지, 즉 ‘학생다움’의 기준에는 단지 학생으로서만이 아니라 특정 ‘성별’로서의 몸과 태도를 다르게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몸의 사용 범위를 제한해버린 치마 교복

나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내내 치마를 입고 다녔다. 정확히 말하면, 입고 싶어서가 아니라 입어야 했기 때문이다. 치마 안에 바지를 입으면 안 됐고, 스타킹을 신는 것이 ‘규정’이었다. 그건 선택이 아니었으나 이내 익숙함이 되었고, 익숙함은 곧 당연한 것이 되었다.

교복 단속은 더 이상했다. 치마 길이를 본다며 학생을 책상 위에 올려 세우고, 치마 안이 보이든 말든 신경 쓰지 않던 장면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때 나는 ‘학생’이기 이전에, 통제를 받는 몸으로 다뤄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치마는 단순한 옷이 아니다. 할 수 있는 행동의 범위를 제한하는 장치이기도 했다. 다리를 편히 벌리고 앉을 수 없었고, 움직임은 늘 조심스러워야 했다. 나는 체육을 좋아했지만, 초등학교 시절 사복을 입고 자유롭게 뛰어놀던 때와 달리, 운동장에서 놀이와 운동기구를 사용하는 것조차 스스로 제한하게 되었다. 내가 다닌 학교는 체육시간 외에는 체육복 착용도 철저히 금지했기 때문에 그 제약은 더 컸다.

교복은 나와 같은 여학생들에게 단지 ‘입는 옷’이 아니라, 몸의 사용 방식을 바꾸는 규율이었다.

▲ 2017년, ‘두발 자유’를 요구하며 염색을 하고 등교한 모습. (사진-이은선 제공)

‘학생’이라는 표식이 드러날 때

졸업식 날은 사복을 입을 수 있었다. 나는 우리 학교 학생회장이었고, 그래서 더 자유롭게 입고 싶었다. 그런데, 사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교사들에게 지적을 받았다. 학교에서의 마지막 날까지도, 내가 무엇을 입는지는 내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교복은 종종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라고 말해진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쉽게 동의하지 못하겠다. 한 번은 ‘두발 자유’를 요구하며 탈색을 하고 학교에 간 적이 있다. 하교하는 길, 교복을 입고 있은 여자가 머리를 탈색했다는 이유로 낯선 아저씨에게 시비가 걸렸다. 그 순간 교복은 나를 보호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학생’이라는 표식으로 드러내어 위험하게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학창 시절 교복을 입고 다니며 ‘어린 X’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주위에 드러내고 다니는 기분을 느꼈다. 사회에서 그 위치가 나를 안전하게 만들어 준 적은 별로 없다.

 

경제적 격차를 가려준다?

최근 정부에서 교복 가격 안정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교복을 둘러싼 논의가 다시 활발해지고 있다. 가격 조사, 불공정행위 대응, 편한 교복 전환, 바우처 지원 등 다양한 방안이 제시되고 있지만, 교복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는 빠져 있는 것 같다.

교복을 옹호하는 논의에서 자주 등장하는 “경제적 격차를 가려준다”는 말도, 나에게는 조금 의아하다. 이미 학교에서는 가방, 패딩, 휴대폰, 학원 등 수많은 방식으로 학생들이 서로의 경제적 조건을 알고 있는 상황인데, 교복 하나가 그것을 가려줄 수 있을까. 그리고 정말로 ‘가리는 것’이 해결일까. 격차를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격차가 드러나도 그것이 조롱이나 차별로 이어지지 않는 교육환경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정장 교복’과 같은 ‘비싼 교복’ 문제도, 가격을 낮춘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까 싶다. 한편에서는 “몽클레르가 교복”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미 옷은 또 다른 방식으로 위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한편으로는 ‘편한 교복’이라는 말도 자주 등장한다. 체육복처럼 편하게 만들면 된다고. 하지만 그냥 체육복을 입으면 되는 일 아닐까. 왜 그것조차 ‘학교가 정해주는 형태’로만 입어야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실제 ‘편한 교복’ 역시 학교의 로고가 부착되고, 다양한 형태가 있다 하더라도 카라가 있는 디자인이 대부분이다.

▲ 2018년 3.8 세계여성의날 기념 한국여성대회가 열린 광장에서 “우리는 청소년 서프러제트”라는 피켓을 들고 참여했다. ‘서프러제트’(suffragette)는 20세기 초 영국에서 여성 참정권을 요구하며 시위했던 운동가들을 칭하는 용어이며, 이를 인용하여 선거연령 하향 등 청소년의 참정권 보장을 요구하며 투쟁하는 한국의 청소년 인권활동가를 뜻함. (사진-이은선 제공)

가격이냐, 형태냐의 문제가 아니라, 왜 학교가 특정한 옷을 정해놓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강제하는가,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하지 않을까.

 

교복, 가격과 형태만이 문제가 아니다

교복 논의는 우리 사회에서 사실 오래된 이야기다. 이미 한 번 폐지되었다가, 통제의 논리로 다시 돌아온 제도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더욱, 지금 이 질문을 던져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교복은 누구를 위한 옷인가. 학생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학생을 일정한 모습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것인가. 교복은 과연 학생을 보호하고 평등하게 만드는 장치인가, 아니면 특정한 ‘학생다움’의 기준을 강제하는 기성세대의 규율 장치인가.

 

[필자 소개] 이은선. 고등학생 시기 학칙 개정과 학생인권조례 제정 활동을 하며 청소년 인권 운동을 만났다. 청소년이 학교와 사회에서 그저 버티는 존재가 아니라, 부당한 순간에 목소리를 내고 변화를 만들어가는 시민이 될 수 있기를 고민하며 활동해 왔다. 현재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폭력에 반대하며 비건을 실천하고 있다. 『우리는 청소년-시민입니다』, 『노키즈존 한국 사회』 등을 공저했고 청소년의 경험과 권리, 젠더화된 규범에 대해 글을 써왔다. 주변 존재들에 물들고, 물들이는 것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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